<필름을 위한 선>을 대여하는 길
“빛이 있는 동안 기억하고 어둠 속에서도 잊지 않으리.” ¹
《그것은 무엇을 밝히나》 전시를 여는 두 작품, 피터 무어의 〈필름을 위한 선 Zen for Film (1965)〉과 우종덕의 〈디지털을 위한 선 Zen for Digital (2020)〉은 애거서 크리스티(Agatha Christie)의 단편소설 속 부고를 떠올리게 한다. 무어의 〈필름을 위한 선〉은 1965년 《뉴시네마 페스티벌 I New Cinema Festival I》에서 백남준이 동명의 원작 앞에 서서 퍼포먼스를 하는 모습을 기록한 사진이다. 요나스 메카스(Jonas Mekas)는 백남준의 〈필름을 위한 선〉을 “이미지 자체를 없애버린 곳에서 빛이 이미지가 되는”² 작품이라고 묘사한 바 있다. 무어는 이를 순환시키려는 듯, 이미지가 된 빛을 다시 이미지에 담았다. 대조적으로 우종덕의 〈디지털을 위한 선〉은 어둠으로 가득하다. 새까맣고 커다란 알루미늄 판은 현재의 디지털 미디어인 LED 모니터나 스마트폰 디스플레이와 닮았다. 관람객들은 알루미늄 판 옆에서 작가가 〈필름을 위한 선〉을 추적하며 〈디지털을 위한 선〉을 사유하는 과정을 담은 영상을 감상한다. 또한 스마트폰이나 태블릿PC로 QR코드에 접속해서 20세기의 잔재물인 16mm 필름이 21세기 디지털 시대의 빈 벽인 검은 화면을 밝히는 영상을 볼 수 있다.
피터 무어가 백남준의 뒷모습과 새하얀 벽 위로 덮인 〈필름을 위한 선〉을 ‘빛이 있는 동안’ 카메라 안에 담아 기억했다면, 우종덕은 반세기라는 시간이 흘러 무어가 포착했던 빛이 사라진 ‘어둠 속에서도’ 〈필름을 위한 선〉을 잊지 않는다. 일종의 부고처럼, 두 작품은 “어디에서도, 그 어디에서도”³ 〈필름의 선〉을 되새기게 한다. 그렇다면 빛과 어둠이 한 작품을 비추고 그 사이에 공백이 생길 때, 그 공백을 어떻게 할까? 다시 말해, 백남준의 〈필름을 위한 선〉은 어디에 있는가?
〈필름을 위한 선〉을 대여하려던 시도는 1965년 무어가 촬영한 사진과 2020년 우종덕이 만든 가상세계 사이의 공백을 메우려는 여정이었다. 대여를 위한 출발점 역시 여행 준비와 맞닿는다. 어떤 목표를 위해 여행지를 찾고, 특별한 장소를 방문하기 위해 그곳에 문의하는 것이다. 같은 방식으로, 작품을 대여하기 위해서 먼저 전시하려는 작품의 소장처를 확인한다. 그 다음 소장처의 대여 정책을 확인한다. 대여 신청이 가능한 기간과 다른 조건들이 미술관과 부합하다면, 소장처에 연락한다. 다만, 〈필름을 위한 선〉의 대여는 다양한 에디션과 텅 빈 필름 그 자체가 작품이라는 개념으로 인해 흥미로운 지점들을 동반한다.
백남준의 〈필름을 위한 선〉은 아무것도 찍혀있지 않은 텅 빈 필름을 상영한 작품이다. 촬영된 기록 대신, 환한 빛이 필름의 스크래치와 먼지, 그을림, 나아가 지켜보는 혹은 지나다니는 관객들을 밝힌다. ‘빈’ 필름이 곧 작품이기에 다양한 에디션이 존재한다. ‘플럭키트’에 포함된 작은 플라스틱 박스에 든 16mm 필름은 〈필름을 위한 선〉의 가장 대표적인 버전으로, 상자에 들어있는 필름 길이에 따라 20분은 물론 30분 혹은 44분까지 다양하다. 또한 〈플럭스 이어 박스 2 Flux Year Box 2〉는 8mm 필름으로 〈플럭서스 선집 Fluxfilm Anthology〉에는 16mm 필름으로 구성되는데, 다른 플럭서스 영상 작품들과 함께 〈필름을 위한 선〉이 포함되었다.⁴ 또한 플럭서스 에디션이 아닌, 1962년과 1964년 사이에 제작된 〈필름을 위한 선〉은 금속 필름 통 안에 필름 릴이 들어있다. 〈필름을 위한 선〉의 물질적인 구성을 소장하고 있는 형식적인 장소는 다음과 같다. 앤솔로지 필름 아카이브 (Anthology Film Archives, AFA), 일렉트로닉 아트 인터믹스 (Electronic Arts Intermix, EAI), 뉴욕현대미술관 (Modern of Museum Art, MoMA), 파리 퐁피두센터 (Centre Pompidou in Paris), 워커아트센터 (Walker Art Center) 등등.
여기서 잠시 우종덕의 작품으로 돌아가 보자. 〈디지털을 위한 선〉에서 금속 필름통이 처음 등장할 때 ‘EASTMAN Double-X Negative Film 7222’⁵이라는 모델명이 붙어 있었다. 그러나 우종덕은 금속 필름통에 원래 붙어 있던 스티커를 뜯어낸 뒤 ‘Zen for Film’이라고 제목을 써서 붙이기도 하고 ‘KODAK FILM’이라는 로고가 인쇄된 스티커를 붙이기도 한다. 이름 붙이기에 따라 필름이 작품으로 거듭나기도 하고 상품으로 남아있기도 한다면, 〈필름을 위한 선〉을 대여하는 형태에도 고민이 생긴다. 《그것은 무엇을 밝히나》 전시를 위해서 작품의 수많은 에디션 중 어떤 에디션을 대여할지, 작은 플라스틱 통과 필름조각이라는 물질성에 집중해야 할지, 아니면 물질과 구분되는 무언가가 있을지.
먼저 수원시립미술관은 AFA와 EAI에 연락을 취했다. AFA와 EAI가 소장하고 있는 에디션은 〈플럭서스 앤솔로지〉의 일부이며 〈필름을 위한 선〉 크레딧 화면이 포함된다. AFA에서 〈필름을 위한 선〉을 대여하려면, 〈플럭서스 앤솔러지〉 전체 필름을 대여해서 제한적인 횟수로 상영해야 한다. EAI 역시 디지털 파일 대여는 가능하지만, 〈플럭서스 앤솔러지〉 전체를 전부 대여해야 한다고 안내했다. 이번 전시에서 〈필름을 위한 선〉에 주목했던 이유는 빛을 투사하는 필름의 특성에 기반하기에, 전방위에 걸친 예술 실험으로 가득한 〈플럭서스 앤솔러지〉 전체를 대여할 수는 없었다.
다음으로 보존과학자 한나 횔링이 소개한 방법을 시도했다. 〈필름을 위한 선〉을 전시하기 위해 소장처에 “빈 필름 리더를 상영할 수 있는 허가를 얻는 것”⁶이다. 즉, 대여를 원하는 미술관이 별도로 16mm 필름과 영사기를 준비하고 소장처에 〈필름을 위한 선〉의 개념을 사용 허가를 얻어내는 방식이다. 작품에 사용된 필름은 50년이 지난 오래된 필름이므로 훼손될 위험이 있으며, 필름 위에는 아무것도 찍히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횔링이 소개하는 방법은 MoMA에서 실시하고 있는 정책이다. 단 MoMA가 소유한 〈필름을 위한 선〉 에디션은 동시에 두 장소에서 상영할 수 없다. 아쉽게도 MoMA의 에디션은, 수원시립미술관이 문의했던 시점부터 2021년까지 MoMA 4층 갤러리에서 상영 계획이 잡혀있었다.
워커아트센터에서는 ‘오브젝트’를 대여할 수 있다. 워커아트센터가 소장한 오브젝트는 백남준과 플럭서스 멤버들의 사진이 부착된 플라스틱 박스와 16mm 필름 조각이 든 〈필름을 위한 선〉 패키지로, 플럭키트의 일부이다. 그러나 수원시립미술관이 이번 기획전에서 관객들에게 소개하고 싶었던 〈필름을 위한 선〉은 오브젝트 그 자체가 아니었다. 텅 빈 필름 자체와 필름이 투사되는 벽과 그 벽까지의 공간, 그리고 시간의 흐름 속에서 빛이라는 ‘그것’이 ‘무엇을 밝히나’ 사유했던 백남준의 깊이였다.
〈필름을 위한 선〉의 대여는 결국 무산되었다. 사진과 영상, 검은 알루미늄 사이에서, 그리고 1965년의 기록과 2020년의 상상 사이에서 필름을 위한 자리는 공백으로 남았다. 그러나 우리는 피터 무어의 사진에서 텅 빈 필름이 비추는 그림자와 흔적들을 바라보고, 그 위에 또 다른 잔상을 더하기도 한다. 우종덕의 영상을 통해 변화된 디지털 미디어 경계를 거닐며 백남준의 사유를 이해하는 방법을 고민할 수 있다. 또한 선명하게 검은 알루미늄 판과 스마트 폰으로 우종덕 작가가 구현한 선의 세계를 체험하기도 한다. 이 여정을 통해 백남준의 〈필름을 위한 선〉이 무엇을 밝히는지 상상하면서, 빛을 그려낼 또 다른 방법을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주
¹ 애거서 크리스티, 「빛이 있는 동안」, 『빛이 있는 동안』, 김남주 옮김 (서울: 황금가지, 2002), 255.
² Jonas Mekas, Movie Journal: The Rise of the New American Cinema, 1959-1971 ed. Gregory Smulewicz-Zucker, 2nd ed. (New York: Macmillan, 1972;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2016), 152.
³ 크리스티, 『빛이 있는 동안』.
⁴ 〈필름을 위한 선〉에디션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Hanna Hölling, Revisions: Zen for Film (New York: Bard Graduate Center, 2015), 8-10, 49-53.
⁵ 코닥에서 발매한 16mm 필름의 모델명이다.
⁶ Hölling, Revisions, 55.
「공백을 위한 여정: 〈필름을 위한 선〉을 대여하는 길」.
『그것은 무엇을 밝히나』. 전시도록. 수원: 수원시립미술관, 2020.
미술관 코디네이터로 근무하며 가장 마음을 쏟으며 행복하게 일했던 전시에 글을 더할 수 있어 영광영광 ʕ◉ᴥ◉ʔ. (지금은 병 때문에 쉬고 있지만) 이 일의 초석을 단단히 여밀 수 있게 해주고 멋진 기회를 주셨던 큐레이터 선생님께도 와방 감사한 마음을 여전히 가지고 있지요! 역사를 그만두면서 글쓰기도 관둔 이후로 3년 만에 쓴 글이라 더욱 의미가 깊기도 한 글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