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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도사 Aug 26. 2022

튀겨지고 눌어붙기

김양우의 〈67.32km〉와 『통근생활』이 기록하는 통근의 굴레

“경기도는 계란 흰자 같대. 서울을 감싸고 있는 계란 흰자.”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를 보지 않더라도 2022년의 경기도민이라면 이 명대사를 격언으로 간직할 것이다. 서울이 노른자고 이를 둘러싼 도시들이 흰자라면, 그 면적을 구성하는 도시인들은 아스팔트 위에서 튀겨지는 중일 것이다. 특히, 서울인접 신도시가 아닌 저 멀리, 노른자에서 한참 벗어나는 경기도민들은 서울을 넘나들다 끊임없이 튀겨진 끝에 소진되고 눌러 붙어 갈색으로 타들어간다. 나에게 김양우 작가의 〈67.32km〉는 드라마보다 훨씬 과몰입을 불러일으킨다. 67.32km는 작가가 작업 터전인 서울 을지로에서 거주지인 화성까지 이동해야 하는 거리다. 상투적이지만 때로는 드라마보다 현실이 더 지긋지긋한 법. 경기도민인 작가는 서울 중구에서 경기 남부 저 아래 화성까지, 걷고 내리고 오르고 타고 다시 걷는 무한루프에서 벗어날 수 없다.


〈67.32km〉는 통근이라는 이동의 굴레에 갇힌 작가를 기록한다. 이 작품은 통근하는 사람들과 차들의 거대한 군집 사이로 산란하는 빛과 버티고 선 조명들을 뒤섞으며 서울과 그 부대도시를 그려낸다. 열 개가 넘는 지하철 호선 가운데서도 가장 악명 높은 2호선에서 경기남부인의 필수 라인 4호선을 갈아타고 사당에서 빨간 버스로 이동하는 여정은 언뜻 직장인 일상을 기록한 브이로그 같기도 하다. 관람객은 지하철과 자동차, 사람들이 코러스처럼 만들어내는 혼잡한 소음들이 노이로제를 느끼며 영상 속 군중 하나가 됐다가도 중간 중간 작가가 만든 기계 사운드가 재생될 때는 정신이 반짝 들면서 작품을 보고 있다는 걸 자각하기도 한다.


이 작품은 도시와 직장을 다루는 수많은 드라마들의 클리셰처럼 도시로 시작되어 도시로 닫힌다. 그러나 수많은 사건사고가 벌어지더라도 통근의 삶은 몇 초 단위로 편집되거나 씬과 씬 사이로 사라지는 드라마에서와 달리, 김양우의 작품은 통근하는 움직임을 지루하게 기록해내며 도시의 이동거리가 주는 피로를 환기시킨다. 



중심으로부터 두터워지기, 『통근생활』


〈통근생활〉 프로젝트는 〈67.32km〉을 시작으로 아시아의 통근생활로 확장해나간다. 그 결과물 중 하나인 책 『통근생활』은 〈67.32km〉와 함께,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를 넘나드는 〈44.6km〉, 군마현에서 도쿄로 이동하는 〈88.2km〉를 함께 엮은 도록이다. 서울 을지로의 전시장 Slow Slow Quick Quick, Production 에서 열렸던 개인전 67.32km》 도록에 작품 전경들과 코로나 이후 통근자들의 인터뷰, 작가노트가 더해지면서 몸집을 불렸다. 


이러한 중첩에 따라 결과적으로 책은 서울 중심으로 두면서 경기도의 화성과 주변 도시들, 말레이시아의 조호르 바루, 일본 군마라는 여러 지방들로 뻗어나간다. 『통근생활』은 책이란 물성 자체를 실험하는 책이 아님에도, 어느 한쪽에서 다른 한쪽으로 읽어나가는 전통적인 책에서 벗어나 중심에서 주변부로 퍼져가는 형식이 된 것이다. 텍스트 또한 마찬가지다. 비평가라는, 서울 유수의 대학에서 고등교육을 받고 서구 이론으로 무장한 전문가의 언어들이 책의 중심에 자리 잡고 서울 변두리와 경기 곳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목소리는 한 편의 변주가 되어 주변 틈에 끼어서 존재한다. 미술 도록의 작품소개라면 줄곧 병기되는 한국어와 영어에 더해 일본어와 말레이시아어가 더해지면서 아시아 언어들이 영어라는 중심을 둘러싼다. 이미지 역시, 프로젝트의 기원이자 중심에 놓인 책 안에는 서울의 면면들로 가득하다. 서울에서 화성으로, 말레이시아의 남쪽 도시에서 싱가포르로, 일본 군마현의 작은 도시에서 도쿄로 이동하는 여정들을 기록한 작품 스틸컷들이 노른자를 감싸는 계란 흰자처럼 서울이라는 중심을 둘러싸고 묵직한 주변부의 모습들로 보여진다.


근대 서양, 통근이라는 개념이 생겨나기 시작했을 때 통근은 이동의 자유를 의미하는 축복적인 발명이었다. 오물로 가득한 중심도시를 떠나 교외의 목가적인 여유를 누릴 수 있는 권력이 있어야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이백년이 지난 아시아에서 통근은 할렘화된 대도시에서 벗어날 자유가 아닌, 값비싸진 대도시의 장벽에서 튕겨져 나온 자들에게 떠맡겨진 굴레이다. 작가는 바로 주변부의 ‘통근생활’을 물질적/비물질적 아카이브로 축적해낸다. 통근을 감내하는 개인들을 기록하는 작업은 그들을 중심의 위치에 놓거나 중심을 해체할 수는 없지만, 그 삶에 무게를 더하고 우리가 고민하고 이야기해야 할 공적인 담론으로 끌어올린다.




           


김양우 작가님의 『통근생활』 책을 읽고 짧게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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