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도라의 상자 Die Büchse der Pandora (1929)〉
1920년대 바이마르 독일 영화는 성모와 악녀의 대결이 한창이었다. 〈기쁨 없는 거리 Die freudlose Gasse (1925)〉의 그레타나 〈메트로 폴리스 Metropolis (1927)〉의 마리아가 부조리한 사회에 맞서면서도 구원자 남성이 나타날 때까지 세상의 고통을 감싸는 성모였다면, 〈기쁨 없는 거리〉의 마리아나 〈메트로 폴리스〉의 로봇 마리아는 자신의 욕망 혹은 인공적으로 태어난 존재의 숙명으로 세상을 교란시키는 악녀였다. 영화에서 성모와 악녀의 대비는 마치 당시 독일 사회의 신여성에 대한 설교처럼 느껴진다. 세상에 눈을 뜨고 사회에 발을 딛기 시작한 여성들이 중요한 역할은 남성들에게 맡긴 채 그들을 잘 보필하고 순종한다면 안락한 해피 엔딩을 맞이할 수 있다. 그러나 계속 반항하며 남성들을 파괴한다면? 그 존재는 곧 세상을 파멸시키리! 파국만이 남는 것이다. 교회 사제의 지겨운 설교마냥 악녀들에 대한 경고는 1920년대 내내 독일 영화에서 끊임없이 되풀이되었다. 〈게누이네: 기묘한 집의 비극 Genuine, die Tragödie eines seltsamen Hauses (1920)〉의 게누이네부터 〈알라우네 Alaune (1928)〉의 알라우네까지, 심지어 악녀들은 도무지 세상의 합리적인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이기에, 인간의 욕망을 넘어서 인공적인 탄생물로 취급받기까지 했다. 그리고 1920년대를 닫는 시점에서 그 종착역은 〈판도라의 상자 Die Büchse der Pandora (1929)〉의 룰루였다.
남성들이 공고하게 구축해 놓은 세계는 이제 막 각성한 신여성들에게는 적대적이다. 그러나 신여성은 이 적대적인 세계의 통제에도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면서 시시각각 부딪히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분투한다. 남성 세계의 작은 부분인 1920년대 독일 영화들 역시 신여성을 항상 문제를 일으키는 악녀로 다뤘다. (종종 신여성이, 원숙한 여성이 아닌 아직 덜 자란 소녀일 경우 세상 모르는 철부지로 다루기도 했다.) 그러나 오히려 신여성은 불합리한 세계에서 벌어지는 각종 범죄 사건과 자신에게까지 뻗어오는 위협을 해결하기 위해 법을 넘나들며 싸우는 누아르 세계 속 영웅들의 모습과 닮았다. 그렇다면 사회와 타협하지 않는 신여성을 악녀로만 치부하던 바이마르 영화에서 어떤 틈을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악녀의 옆에는 언제나 사건이 있고 그 옆에는 어떤 식으로든 사건을 해결하려는 자가 있으니까. 이 글은 영화 〈판도라의 상자〉에서 여성 영웅의 가능성을 찾아보고 상상해보려는 시도이다.
우연한 틈: 요동치는 남성 욕망 사이로 악녀를 위한 구원자 찾기
〈판도라의 상자〉는 룰루를 둘러싼 남자들로 가득하다. 수많은 남성이 한 여성을 갈구하는 상황에서, 결국 한 남자가 그녀를 소유하는 순간 사고는 터질 수밖에 없다. 룰루와 쇤의 결혼식 당일, 방아쇠가 당겨진다. 총성 끝에 밝혀진 피해자는 쇤 박사다. 그러나 가해자는 불분명하다. 영화에서 룰루가 쇤을 죽였는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쇤은 룰루가 총을 강제로 쥐게 하며 자살하기를 강요한다. 거부하는 룰루와 쇤은 격렬한 격투를 벌인다. 결정적인 순간 카메라는 쇤의 뒷모습 너머로 겁에 질린 룰루의 표정을 클로즈업한다. 이후 총신에서 뿜어지는 한 줄기 연기와 함께 쇤은 죽는다.
사건이 터지고 법정이 열린다. 쇤의 죽음이 살인인지 사고사인지, 동시에 룰루가 살인을 저질렀는지 정당방위인지 무죄인지 밝혀야 한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살아있는 자는 감옥에 갇혀 죽을 위기니까. 법정 장면과 함께 다음 막이 시작된다. 새롭게 등장한 변호사에게 기대를 걸텐가? “법정에 계신 분들은 저 여인을 보십시오. 저는 이 여인이 살인을 저지를 만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오직 비극적 상황의 제물일 뿐입니다. 고인의 아들이 그녀를 변호하지 않았습니까? 이 불행은 살인이 아닙니다.” 실로 맞는 말이다. 카메라는 총이 발포한 순간을 비추지 않는다. 카메라가 연기가 피어오르는 총을 비출 때까지 총의 행방은 알 수 없다. 고의적인 살인인지 우발적인 사고인지는 물론, 룰루가 직접 쇤을 쐈는지조차 불분명하다. 쇤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게다가 뒤늦게 현장에 도착한 아들을 향해 매우 유창하게 유언을 남긴 후 눈을 감기에 쇤이 총상으로 죽었는지조차 모호하다. 변호사는 “판사님은 그녀에게 무죄를 선고해야 합니다. 그녀는 결백합니다.”라고 마무리하며 변론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정에서 검사는 어떤 뚜렷한 증거도 없이, 룰루가 남자를 타락시킨 판도라이며 쇤의 죽음을 맞이하게 한 악을 가져왔다며 그녀를 유죄로 만드는 데 성공한다. 변호사는 어떠한 변론도 없다.
누아르 세계에서 누군가는 악녀의 문제를 해결해야 할 사명을 띤다. 악녀는 그저 나쁜 여자일 뿐 아니라, 모든 남자를 유혹하는 치명적인 매력의 소유자, 팜므파탈이기 때문이다. 유혹당한 자는 팜므파탈에게 봉사할 의무가 있다. 오히려 자신이 그녀로 인해 위기에 빠지게 되겠지만, 이는 나중 문제다. 변호사는 실패했으니 다른 해결사를 찾아야 한다. 〈판도라의 상자〉에서 이 역할을 맡을 남자는 누굴까? 알바? 그는 젊고 말쑥하며 룰루를 애타게 욕망하지만 아버지의 죽음 때문에 실의에 빠진 상태다. 그렇다면 로드리고? 쉬골히와 함께 나타나 무언가 속닥거리지만 상황을 주도하진 않는다. 쉬골히? 늙어빠진 뚜쟁이는 표면적으로는 룰루의 아버지 역할을 하기에 팜므파탈의 조력자의 자리에 오를 순 있지만, 주연을 넘볼 수 없다. 이곳 법정에서 쉬골히와 대화하며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자는 따로 있다. 게슈비츠 백작 부인이다.
뒤바뀐 미래: 누아르 세계에서 여성 영웅의 가능성 상상하기
법정 사건 이후 게슈비츠 백작 부인은 막을 하나 건너 런던 뒷골목의 어두운 밤공기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다. 영화에서 게슈비츠는 전적으로 분량이 축소되긴 했지만, 적어도 7막의 주인공은 게슈비츠 백작 부인이라 할 만하다. 프랭크 베데킨트의 원작에서 게슈비츠 백작 부인은 감옥에 들어가 룰루와 자신을 바꿔치기할 계획을 성공시킨 이후 다시 등장했을 때, 곧장 룰루로부터 로드리고와 결합하라고 강요받는다. 그에 반해 영화에서 게슈비츠 백작 부인의 런던 여정은 더욱 구체적으로 묘사된다. (게다가 희곡에서와 달리 게슈비츠 백작 부인은 어떤 남자들에게도 움츠러들지 않는다!)
게슈비츠 백작 부인은 런던 뒷골목 카지노 선박의 어두운 구석구석을 둘러보고 룰루를 찾아다닌다. 안내하는 수행원은 있지만, 고정된 조력자가 아닌 빈번히 교체되는 일시적인 길잡이다. 어떤 연대도 없이 홀로 나아가는 그녀의 모습은 누아르 세계에서 밤거리를 걷는 고독한 영웅을 상상하게 한다. 이윽고 게슈비츠가 룰루와 만났을 때, 밝은 환영과 포옹을 받는다. 룰루는 시선으로도 육체적인 접촉으로도 줄곧 백작 부인과 거리를 뒀던 이전 모습과는 사뭇 달라졌다. 게슈비츠는 룰루의 위기를 관조한다. 룰루와 그녀를 이집트 거부에게 팔아 넘기려는 카스티-피아니의 싸움에 마음 아파하고, 룰루의 안위에 무관심한 채 도박에만 빠진 알바를 지켜본다. 백작 부인은 관찰자 위치에 머무르지만 이미 알고 있다. 그녀가 룰루에게 가장 필요한 권력, 돈을 가지고 있음을. 게슈비츠 백작 부인이 룰루에게 돈을 넘겨주면서 행동에 나선 순간, 모든 상황이 빠르게 돌아간다. 로드리고는 두 여인의 대화를 듣고 갑작스럽게 룰루에게 돈을 요구하며 경찰에게 넘기겠다는 협박을 한다. 알바는 계속해서 돈을 잃은 끝에 카드 사기를 저지르다가 들통난다. 그 순간 갑자기 경찰이 들이닥친다. 진퇴양난의 상황이 벌어진다.
게슈비츠 백작 부인이 맞이하는 결말은 무엇을 생각하게 할까? 이 장면은 룰루의 극적인 탈출장면에 가려 거의 이야기되지 않지만 여성의 입장에서 본다면 매우 의미심장하다. 백작 부인은 룰루에게 떠밀려 이를 악물고 로드리고에게 접근하지만 이내 환하게 로드리고와 건배한다. 그리고 그 자신이 직접 로드리고를 이끌며 방으로 데리고 간다. 방 안에는 이미 앉아있던 누군가가 급하게 커튼 너머 구석으로 모습을 감춘다. 로드리고가 강제로 게슈비츠에게 키스하는 순간 장면이 전환된다. 경찰의 급습과 룰루의 탈출, 그리고 형사가 닫힌 방문 앞에서 총을 들고 대기하는 장면이 이어진 후 게슈비츠 백작 부인이 다시 등장한다. 카메라는 모자와 재킷이 벗겨진 채로 미친 듯이 문을 열려고 하는 게슈비츠 백작 부인의 모습을 비춘다. 이내 문이 열리며 경악한 표정의 백작 부인을 경찰들이 몰려 체포한다. 방 안에는 로드리고의 시체가 있다. 어떻게 된 걸까? 방 안에 숨은 누군가가 대신해서 로드리고를 처리한 걸까? 아니면 피해자가 된, 혹은 피해자가 될 위기에 놓인 게슈비츠 백작 부인 스스로가 정의를 집행한 걸까?
〈판도라의 상자〉 원작자인 프랑크 베데킨트가 게슈비츠 백작 부인을 “작품의 또 다른 주인공”으로 언급했던 사실이 무색하게, 영화에서 게슈비츠 백작 부인의 비중은 축소되고 그녀의 마지막 역시 변형되었다. (희곡에서 게슈비츠 백작 부인은 룰루의 곁을 끝까지 지키다 살인마 잭에게 함께 살해당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영화에서의 변형들, 특히 나아가 게슈비츠 백작 부인이 맞이한 뒤바뀐 결말은 그녀의 미래를 죽음으로 닫아 놓기보다 지속적인 삶으로 열어 놓는다. 팜므파탈 룰루와 갈라져 자신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게슈비츠가 원작에서 그녀가 바랬던 대로 독일로 돌아가 대학에 적을 올리고, 여성해방을 위해 투쟁하고, 법학을 공부하면서 살아가길 상상한다.1
1 프랑크 베데킨트, 지령, 판도라의 상자, 이재진 옮김, (서울: 성균관대학교출판부, 1999), 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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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형사와 그 변주들 : 페미니즘 장르영화 비평연습』 (서울: 허스토리, 2021) 수록했던 글. 동명의 비평 워크샵에 참여하면서 썼던 결과물로 1920년대 영화에서 여성 탐정의 가능성을 찾고자 했다. 원래는 브리기테 헬름의 영화로 쓰고 싶었는데, 멤버들이 다 함께 즐길 수 있는 영화라는 조건이 있어서 급하게 변경해서 글을 썼지만 몰래 흠모했던 선생님께 평가도 받고 멤버들과 영화 얘기도 잔뜩 하면서 즐거웠던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메인 테마 아래 글을 써서 많은 부분이 함축되었지만, 간만에 영화를 다시 보니 게슈비츠의 신여성적 면모와 사랑에 더 집중해서 글을 쓰고 싶다. ◖⚆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