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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혜원 Feb 15. 2020

영화 <조커>

우리는 지금 현실 '조커'를 만들고 있다.

*스포일러 주의

 ‘Joke’, 실없이 장난으로 하는 말이나 익살을 뜻하고, 우리말로는 농담이라 한다. 그리고 ‘Joker’는 농담을 하는 사람 혹은 코미디언을 부르는 말이다. 모두 웃음과 관련이 되어있다. 주인공인 아서 플렉의 어머니는 “너는 웃음을 주려고 태어났단다.”라고 말하며 아서를 부르는 애칭으로 해피라고 부른다. 하지만 아서는 다른 이들에게 웃음을 주지 못하고 공감 능력 또한 매우 떨어진다. 대부분 억지로 웃는다. 어떤 때는 웃기지 않는 상황에 웃기도 하고, 때로는 눈에 눈물이 가득하지만 입은 웃고 있기도 하다. 이는 아서가 가진 웃음 발작이라는 정신병 때문이다. 아서는 정신병을 가진 광대로 살며 온갖 불행과 악행을 겪으면서 서서히 자신의 내면 검게 자리 잡고 있던 광기 가득한 조커의 형상을 세상 밖으로 드러내게 된다.


    영화 ‘조커’ 속 아서의 모습은 영화의 배경인 고담시의 모습과 겹쳐진다. 정신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아서처럼 도시는 제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다. 인간의 내면 저편에 드러나지 않는 통제된 자아가 있듯이 겉으로 아름답고 멋져 보이는 도시에도 어두운 이면은 존재한다. 시민들의 시위로 인해 연일 시끄러운 고담시의 미디어는 도시의 문제를 자극적으로 보도하면서 자신이 도시를 구할 수 있다고 말하는 토마스 웨인의 모습을 기계적으로 송출할 뿐이다. 토마스 웨인은 시민들이 왜 시위를 벌이는지, 그들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그리고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한 채 그저 자신이 위험에 빠진 도시를 구할 자신이 있다는 말만 반복한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망상에 빠진 아서와 크게 다르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거리의 시위대는 마치 아서의 무의식 속에 존재하던 조커처럼 미처 통제되지 못한 도시의 어두운 이면이라고 할 수 있다. 제 기능을 잃은 도시가 도시 곳곳에 잠자고 있던 조커들을 깨운 것이다.


    아서는 영화 초반부에는 어설퍼 보였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점점 완벽해지는 춤사위를 보여준다. ‘춤’은 아서가 점점 조커로 변화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치로, 영화 전반에 걸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지하철에서 첫 살인을 저지르고 난 후 갈수록 더 광기 어린 존재가 되어갈 때쯤 그의 춤은 점점 완벽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계단. 영화의 포스터 배경이기도 한 이 계단은 아서가 조커로 변모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또 다른 장치로서 역할을 한다. 영화 초반부 축 처진 어깨를 하고 힘겹게 계단을 오르던 아서가 영화 후반부에는 신나는 음악과 함께 완벽한 춤사위를 뽐내며 신명 나게 계단을 내려오는 장면은 이 영화의 명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아서 플렉일 때는 힘겹게 계단을 오르지만, 조커가 되고 나서는 춤을 추며 계단을 내려온다. 모든 조롱을 견디며 분노를 억눌렀을 때는 계단을 오르는 것이 어깨가 축축 처지며 괴로웠지만, 모든 것을 포기하자 그 계단을 내려가는 것이 편하기 그지없고 신이 절로 나는 것이었다.

조커 '계단씬'

    아서는 말한다.

“Everyone is so rude.”

그가 광대라는 직업을 갖고 있다는 이유로, 그가 정신병자라는 이유로, 그가 시도 때도 없이 웃는다는 이유로 무례하게 구는 세상에 하는 말이다. 영화 속 아서와 바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에서는 강자에 의해 약자가 무시당하고 처참히 짓밟히는 일들이 부지기수로 일어난다. 사람들은 약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에게 진심 어린 배려를 건네지 않는다. 영화 속에서 아서가 상담사와 상담하는 장면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 대다수의 사람은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척’을 할 뿐 그들이 진정으로 가치 있고 소중하고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것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결국 이러한 사회의 냉소적 반응이 아서를 ‘조커’로 만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한국 사회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진정으로 귀를 기울이고 있을까? 필자는 이를 부정하고자 한다. 대다수의 사람이 누군가의 학벌, 누군가의 직업, 누군가의 재력으로 그 사람을 판단하고 자신보다 못하면 무시하거나 홀대하기도 한다. 이 치열한 사회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지독한 짠 내가 날 정도로 아플 때도, 정당하지 못한 불행과 악행을 마주하게 될 때까지도 억지웃음을 지어야 한다. 세상의 기준에 자신을 끼워 맞추려다 이따금 그 기준에 얽매여 자괴감에 빠지기도 하지만 애써 가식적인 웃음이라도 “아하하하” 지어 보일 수밖에 없다. 결국 현재 한국 사회에서는 사회적 약자뿐 아니라 사회의 일원으로서 살아가고 있는 대다수의 사람이 영화 속 아서와 같이 웃는 게 병이 되어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우리는 아마 지금 영화가 아닌 현실 속에서 사회 구조적으로 ‘조커’를 키워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지나치게 세속적이고, 지나치게 상향 평준화된 사회의 기준이 사회 구성원들을 압박하고 이러한 압박이 우리 사회의 ‘조커’를 낳게 되는 것이다. 이는 잔인하고 흉악한 범죄를 저질러 사회를 어지럽히는 반사회적 인격장애자들을 지지하고 그들의 행위를 정당화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정신적 문제를 무조건 사회의 탓으로만 돌리려는 것도 아니다. 그들을 정신병자로 몰고 사회에서 격리하는데 급급한 사후 대책이 아닌, 가장 근본적인 ‘조커’ 예방책을 찾자는 것이다. 각자의 개인적 사정, 가정환경까지는 어찌할 수 없다 하더라도 사회 구조상의 문제점은 사회 구성원이 다 같이 노력하면 충분히 개선될 여지가 있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장 먼저 우리가 우선적으로 여기고 있는 사회적 가치들이 과연 다른 모든 눈에 보이지 않는 잠재적인 요소들까지 뛰어넘을 정도로 가치가 있는 것인지 재고해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한 사람의 가치를 돈, 지위, 명예와 같은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으로 평가하기보다 그 사람의 인품, 사고방식 등의 정신적 가치에 중점을 두고 그 사람의 잠재적 능력에 무한한 가치를 부여할 줄 아는 서로가 되어야 한다.


    “재밌는 조크가 떠올라서요…. 이해 못할 거예요.”

 이 사회는 결국 자신이 하는 말을 진정으로 귀담아듣지 않고 진심으로 도와줄 생각조차 없다는 것을 깨달은 아서의 대사이다. 영화 ‘조커’가 개봉한 이후 홍콩, 칠레를 비롯하여 격렬한 시위가 벌어지고 있는 세계 각국에서 조커 분장을 하고 시위에 참여한 시위대의 모습이 많이 포착되기도 했다. 영화 ‘조커’가 그들의 마음을 대변하기라도 한 것일까? 시위대는 조커에 열광하며 자신들이 바로 조커라고 말했다. 그들은 끊임없이 자신이 속한 사회를 향해 웃음을 주고 호의를 베풀고자 노력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무관심과 냉소적 반응뿐이었기에 지금 이렇게 격렬하게 자신들의 내면에 잠재되어있던 조커의 형상을 꺼내 보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조커 분장을 한 시위대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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