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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혜원 Feb 18. 2021

모순

양귀자 장편소설

*모든 독자가 순수한 '첫 독자'이길 바란다는 작가님의 당부에 따라 책을 이미 읽으신 분들만 제 리뷰를 읽는 것을 추천합니다 :)


행복과 불행, 삶과 죽음, 정신과 육체, 풍요와 빈곤.


    단 한 번뿐인 이 삶, 한 사람을 놓고 두 개의 상반되는 삶을 추적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나지만 둘이고, 둘이지만 하나인 인생 궤적을 보여주기 위해서 일란성쌍생아보다 더 적합한 장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소설이 중반에 이르렀을 때, 나는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우리들 모두, 인간의 이름의 일란성쌍생아들이 아니었던가 하는 자각. 생김새와 성격은 다르지만, 한 번만 뒤집으면, 얼마든지 내가 너이고 네가 나일 수 있는 우리.


    새삼스런 강조일 수도 있겠지만, 인간이란 누구나 각자 해석한 만큼의 생을 살아낸다. 해석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는 사전적 정의에 만족하지 말고 그 반대어도 함께 들여다볼 일이다. 행복의 이면에 불행이 있고, 불행의 이면에 행복이 있다. 마찬가지다. 풍요의 뒷면을 들추면 반드시 빈곤이 있고, 빈곤의 뒷면에는 우리가 찾지 못한 풍요가 숨어있다. 하나의 표제어에 덧붙여지는 반대어는 쌍둥이로 태어난 형제의 이름에 다름 아닌 것이다.


    소설의 제목을 정하면서 많이 망설였다. '모순'이라는 추상적 개념어를 가장 구체적인 현실을 다루는 소설의 제목으로 삼기에는 좀 무겁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곧 생각을 바꾸었다. 우리들 삶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모든 것이 모순 투성이었다. 이론상의 진실과 마음속 진실은 언제나 한 방향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다. '모순'은 무엇을 따라도 모순의 벽과 맞닥뜨려지는 인간과 삶에 관한 진술이었다. 세상의 일들이란 모순으로 짜여있으면 그 모순을 이해할 때 조금 더 삶의 본질 가까이로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 이상 구체성을 띤 제목은 없을 터였다.


-작가 노트 中-


 내 인생의 볼륨이 이토록이나 빈약하다는 사실에 대해 나는 어쩔 수 없이 절망한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요즘 들어 가장 많이 우울해하는 것은 내 인생에 양감이 없다는 것이다. 내 삶의 부피는 너무 얇다. 겨자씨 한 알 심을 만한 깊이도 없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일까.


주인공 안진진이 자신의 빈약한 인생에 대해서 고민하기 시작한 건 그녀의 나이 스물다섯이었다.

'이십 대란 나이는 무언가에게 사로잡히기 위해서 존재하는 시간대다. 그것이 사랑이든, 일이든 하나씩은 필히 사로잡힐 수 있어야 인생의 부피가 급격히 늘어나는 것이다.'


스물 다섯 해를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무엇에 빠져 행복을 느껴본 경험이 없는 안진진, 삶이란 것을 놓고 진지하게 대차대조표를 작성해본 적도 없이 무작정 손가락 사이로 인생을 흘려보내고 있는 안진진, 궁핍한 생활의 아주 작은 개선만을 위해 거리에서 분주히 푼돈을 버는 것으로 빛나는 젊음을 다 보내고 있는 안진진.


그녀는 자신의 빈약한 삶을 방치하게 된 이유이자 변명으로 부모님의 삶을 들추어내며 결혼을 기점으로 일란성쌍둥이인 어머니와 이모의 삶이 각각 불행과 행복으로 나뉘었다고 비교한다. 그리고는 자기 자신을 안타깝게도 불행을 짊어진 쪽으로 편입되어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표현한다.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어머니와 이모가 서로 정반대 되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에서 이 소설의 제목이 '모순'인 첫 번째 이유를 발견할 수 있다.


술을 마시고 난폭한 행위를 일삼는 아버지, 삶의 고단함으로 할퀴어진 어머니. 이에 반해 경제력 있고 가정적인 이모부와 결혼해 남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이모. 일란성쌍둥이인 어머니와 이모의 운명은 그렇게 결혼이 갈라 내었다.


아마 그래서 안진진은 자신의 삶의 부피를 늘릴 방법으로 결혼을 생각한 게 아닐까. 결혼 단 한 번만으로 같은 얼굴을 한 두 사람의 인생이 행복과 불행이라는 정반대의 길을 걷게 되는 모순을 마주하게 됐으니.


    안진진이 나영규와 김장우라는 두 남자 사이에서 저울질하는 신중한 모습, 그리고 결국 둘 중 나영규를 택하는 장면은 사랑과 연애, 그리고 결혼에 대해 많은 생각이 들게 했다.

 

내 모습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는 편한 사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커서 나를 감추게 만드는 사람 중 누구와의 사랑이 진짜일까?

경제적으로 안정된 사람, 경제적으로는 불안하지만 내 마음을 풍요롭게 해주는 사람 중 누구와 결혼해야 할까?


안진진은 첫 번째 질문에는 김장우, 두 번째 질문에는 나영규로 답했다.

 '사랑은 그 혹은 그녀에게 보다 나은 '나'를 보여주고 싶다는 욕망의 발현으로 시작된다. '있는 그대로의 나'보다 '이랬으면 좋았을 나'로 스스로를 향상하는 노력과 함께 사랑은 시작된다. 솔직함보다 더 사랑에 위험한 극약은 없다. 죽는 날까지 사랑이 지속된다면 죽는 날까지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절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주지 못하며 살게 될 것이다. 사랑은 나를 미화시키고 나를 왜곡시킨다. 사랑은 거짓말의 유혹을 극대화시키는 감정이다.'


그녀는 나영규 앞에서는 솔직했다. 나영규는 안진진이 처한 현실을 가감 없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김장우한테는 달랐다. 지금 그가 품고 있는 자신에 대한 사랑의 부피가 감소될 어떤 말도 절대 하고 싶지 않아 했다. 사랑의 유지와 아무 상관이 없다 하더라도, 보다 나은 자신을 보여주고 싶어 했다.


그녀는 두 사람 모두에게 사랑을 느꼈지만, 솔직함과 거짓말이라는 상반된 단어가 사랑이라는 감정에서 동시에 나오고 있는 모순적인 상황에 대한 자기 나름의 답을 찾았다. 사랑에 위험한 극약이라는 이유로 사랑의 감정으로부터 솔직함을 솎아냈다.


난 안진진이 정의한 거짓말의 사랑에 일부 동의한다. 정말 마음에 드는 사람이 나타나면 잘 보이고 싶어 긴장하다 보니 평소 하지 않는 말과 행동으로 보는 이까지 어색하게 만들기 일쑤다. 상대방이 너무 마음에 들고 좋은데 솔직하게 말은 못 하겠고, 나의 결점은 한 개도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는 마음은 누구나 한 번쯤 느껴봤을 거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거짓말까진 아니더라도 원래의 내 모습을 감추는 건 꽤 불편하지만 가슴 뛰는 사랑임이 분명한 듯하다.


하지만, 내가 모든 걸 털어놓을 수 있고 솔직해질 수 있어 함께할 때 편안한 감정을 주는 사람과의 사랑도 사랑이 아닐까. 


돌이켜보면 나는 혼자 있을 때, 가족과 함께 할 때, 친한 친구와 함께 할 때 가장 편하고 행복하다. 혼자만의 시간 속에서 스스로를 다독이기도 하고 채찍질하기도 하면서 나를 더 알아가는 시간, 가족과 따뜻한 밥을 함께 먹는 시간, 친구들과 장난치고 수다를 떠는 시간.


이 모든 시간의 바탕에는 '사랑'이 있다. 가족이나 친구, 혹은 혼자 있는 시간처럼 가장 솔직해질 수 있는 건 '나 자신과 내 가족, 친구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어느 사랑이든 사랑의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누군가를 사랑하기 이전에 나 자신을 가장 먼저 사랑해야 다른 사람과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말이 있듯이, 남녀 간의 사랑도 나를 사랑하듯 솔직하고 편안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게 맞지 않을까 생각한다.


'인간에게는 행복만큼 불행도 필수적인 것이다. 할 수 있다면 늘 같은 분량의 행복과 불행을 누려야 사는 것처럼 사는 것이라고 이모는 죽음으로 내게 가르쳐주었다.'


이모의 죽음은 안진진에게 또 하나의 모순을 가르쳐준다. 삶과 죽음은 결국 한통속이라는 모순. 결국 살아봐야 죽을 수도 있다는 이 모순은 이해할 수 없지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남부러울 것 없이, 행복의 요소는 모두 다 가진 것처럼 보였던 이모가 자살한 뒤, 안진진은 진짜 사랑이라 여겼던 김장우의 손을 놓는다. 그리고 나영규의 손을 잡는다. 어머니를 내세워 자신의 삶을 줄곧 빈약하다, 불행하다와 같은 단어로 이야기해왔던 그녀는 자신의 삶에 없던 '행복'을 택했다.


그리고 그녀는 이 선택을 통해 책의 초반부에 자신이 말했던 '인생은 탐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라는 말을 수정한다. '인생은 살아가면서 탐구하는 것이다. 실수는 되풀이된다. 그것이 인생이다.'라고.


이 깨달음이 그녀 삶의 부피가 두꺼워졌음을 말해주고 있다. 스물다섯의 안진진에게 닥친 부모님, 이모, 동생, 남자에 관한 일련의 사건들이 그녀의 삶을 두껍게 만든 것이다.


나는 여기서 깨어있는 삶의 중요성을 다시금 느꼈다. 현실에 치여 먹고사는 데만 급급하던 그녀가 흘러간 유행가의 제목처럼 바보 같았던 자신의 삶을 청산하고 "내 인생에 나의 온 생애를 다 걸어야 해!"라고 외친 순간부터 자신의 삶을 반추하고 모든 순간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선명하게 정의하고 분석하기 시작한다.


있는 그대로의 삶을 그저 받아들이기만 하던 지리멸렬했던 과거의 삶에서 깨어난 안진진은 삶의 순간순간 그녀가 마주한 수많은 모순들로부터 자신만의 정의를 만들어내고 선택을 내리면서 제 손으로 제 삶의 부피를 키워냈다.


자신만의 사랑을 정의하고 한 남자를 사랑이라 믿었지만 결국 다른 남자와 결혼하기로 결심한 것 또한 그녀가 만든 모순적인 선택이었다.


삶의 어떤 교훈도 자신이 직접 경험하지 못하면 마음으로 들을 수 없다는 것, 그래서 우리는 모든 사람이 뜨거운 줄 알면서도 뜨거운 불 앞으로 다가가는 모순을 범하는 소의 귀를 가졌다는 그녀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죽을지도 모르면서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불구덩이를 갈구하는 우리의 모습 자체가 모순이지만, 이게 결국 인생이라는 걸. 인생은 모순 덩어리지만, 그 모순이 우리를 발전시킨다는 걸.


그러니 우린 모두 각자 나만의 해석으로 나만의 삶을 살 된다. 굳이 남들과 똑같이 살지 않겠다 자기 자신을 학대하며 발버둥 칠 필요도 없이 각자 자신이 갈구하는 불구덩이를 찾아 뛰어드는 모순으로 얽힌 삶. 상반된 것이 하나가 되어 헷갈리게 할 때 내가 숙고하는 과정, 그리고 그 선택이 곧 내 삶의 부피가 되고, 내 삶의 깊이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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