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 우치다 타츠루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그, 라캉 쉽게 읽기
교양으로서의 철학이 서가의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80년대부터 고속 성장을 이룩한 후에 사람들은 이전과 다른 풍요를 누렸지만 그것으론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에 자신들의 뒤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굽이친 길 혹은 꼬인 길, 지난 세월 꽤 열심히 달린 것 같은데 내 안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공허함만 남기고 노화된 신체는 애꿎은 세월을 탓한다. 주변 사람들 하나 둘 건강에 이상이 생겼다는 소식을 건너 듣는다. 이윽고 닥치는 거대한 물음. 여태 살아온 내 삶은 뭐였지? 책을 읽고 세상이 달라졌다는 친구와 옆 부서의 팀장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 어디 그럼 나도 한번 하는 마음에 온라인 서점에서 철학이라는 키워드를 검색해본다. 수많은 검색 결과는 또다시 혼란을 불러온다. 도대체 뭘 읽어야 할까.
일반인에게 철학이란 꽤나 동떨어진 단어이다. 쇼핑몰 대형 서점 베스트셀러 서가에 한 두 권쯤 꽂혀 있지만 가족과 친구, 가까운 사람들과 관련한 이야기를 나누기는 쉽지 않다. 요즘처럼 부동산과 주식에 열을 올리는 세상에서 갑자기 철학이라는 화두를 던졌다가는 괴짜 취급을 받기 좋다. 하지만 사람은 늘 궁금해한다.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모든 세상에 대해, 그것들이 맞물려 돌아가는 세계에 대해, 그 세계에 존재하는 ‘나’라는 인간에 대해,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전승되어온 철학이라는 개념은 태초에 그 꽃을 피웠던 유럽에서 열매를 맺었다. 생각하는 방식은 곧 생활하는 방식을 바꾼다. 오늘날 우리가 생활하는 방식은 모두 서양, 유럽에서 건너온 것들이다. 보통의 한국 사람은 더 이상 기와집 아래 살지 않으며, 좌식 생활을 하지 않는다. 쌀밥에 김치를 주식으로 먹지 않으며, 영화와 뮤지컬, 오페라를 즐긴다. 거의 대부분 서양에서 비롯된 문화이다. 왜 우리는 오늘날 이렇게 생활하게 되었을까를 역으로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예전 서양 사람들, 철학자들이 삶과 세계를 어떤 방식으로 정의했는지 궁금해진다. 철학은 자신의 그릇을 넓히게 도와준다. 동일한 사건을 두고 해석하는 방식, 특정한 예술과 영화를 보고 느끼는 감동의 크기는 그것의 호오와 다른 방식으로의 차이를 구별한다. 이해관계자에 의해 편집된 뉴스와 기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들의 먹잇감이 될 뿐이다. 쏟아지는 정보를 스스로 걸러내지 못하면 그 정보에 잠식당한다. 그래서 때론 철학은 삶의 무기가 될 수도 있다. 이 책은 철학사의 시계를 현재에 가깝게 돌려 ‘구조주의’라는 개념에 대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을 법한 쉬운 언어로 쓰여있다. 들어가는 말을 읽고 나면 이 책을 펴기까지 꽤나 긴장했을 독자를 배려하는 따뜻한 마음이 느껴진다.
우리는 늘 어떤 시대, 지역, 사회집단에 속해 있다. 속한 집단에서 수용한 것만 보고, 듣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생각보다 자율적일 수 없다. 심지어 그 자율성은 상당히 제한되어 있다. 이 사실을 철학적 토대를 통해 증명해낸 것이 구조주의의 성과라고 한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것, 인간 스스로가 자유롭게 생각하거나 욕망할 수 없다는 사실은 구조주의 철학자들 이전에 마르크스와 프로이트, 그리고 니체에 의해 주장되었다. 그들이 쌓은 토대에서 언어학자인 소쉬르를 시작으로 푸코와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은 각자의 저서와 이론으로 자신들의 철학을 증명했다. 구조주의라는 이론에 대해, 결국 그들이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이 무엇이었는가에 대해 적당한 호기심이 일 정도로 쉽게 그리고 굉장히 압축적으로 풀어냈다. 몇십 년간 그들의 저서와 이론을 연구해온 사람들이 이 책을 본다면 어떻게 느꼈을지도 궁금하다. 하지만 철학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머리가 아픈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나 같은 사람들에게 이 책의 가치는 충분하다. 책을 다 읽은 후에 네 명의 철학자에 대해 더 알고 싶어 그들의 저서를 검색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시작이 반이라는 관용어구처럼 교양으로서의 철학, 기분 좋게 입문할 수 있는 철학 서적을 만나 뿌듯한 휴일을 느껴보길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