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이 '언어'라고 생각하는 전 세계적인 최면에서 풀려날 절호의 찬스
음악은 언어가 아닙니다. 만약 음악이 '언어'라면,
'나는 지금 급똥이 마려워 화장실을 가고 싶은데
휴지가 없어 아주 위급하며, 애처로운 상황이야'
라는 문장을 정확하게 내가 전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불가능하죠. 왜냐면 음악에서는 이렇게 정확한 상황적 묘사나 정보의 전달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음악을 '언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요?
대략적 '공감'의 언어?
사람들이 말하는 언어의 기능을 지닌 '음악'은 그저 감정의 '대략적 공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는 나의 상황을 압축하여 설명하기에 자세한 정보의 전달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언어가 가지는 정보전달의 수준과는 거리가 멀고, 게다가 언어가 가지는 다양한 '형태적' 요소들을 음악에서는 만들 수 없습니다. 또는 음악 안에 있는 '가사'를 통해 정보나 상황을 전달받고 감상자들은 공감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과연 음악 자체가 언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여기에서 사람들이 생각하는 음악과 실제의 음악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들 말하는 '만국 공통어'로써의 음악의 역할은 의심의 여지가 '다분'합니다. 아무런 설명 없이 어떤 음악을 듣고 위 문장과 같은 정확한 상황을 전달할 수 있을까요? 아마 음악을 평생 해오신 분들에게 음악으로 위의 문장을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지 여쭤보면 '어이없어' 하실 것입니다. 음악은 정보나 상황을 전달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심리학자인 '폴 에크만(1934~)'이 인간의 보편적 감정 6가지(분노, 경멸, 두려움, 기쁨, 외로움, 놀람)를 1990년대에 다시 11가지 정도로 확장하여 제시하였지만, 말 그대로 '보편적'이기에 이는 엄밀히 말하면 인간의 다양하고 세심한 감정을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물론 에크만의 연구는 대중에게 알려져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심도 있는 연구로 현재까지도 많은 분야에서 인용, 발전되고 있습니다) 또한 예술의 기능 중 이러한 다양하고 섬세한 인간의 감정을 대변하던 시절은 이미 몇백 년 전에 호시절이 지났으며, 현대에 들어서는 인간이 인간을 더욱 깊이 이해하게 되면서 이 또한 착각이었다는 것이 하나씩 확인되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에 깊숙이 하기로 하고 이 글에서는 '음악은 언어'라고 착각하고 있는 이유에 대해서 간단히 훑어보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그럼 감정이 아닌 음악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말 그대로 음악은 '소리'들의 집합체입니다. 이 각각의 소리들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다가 작곡가의 의도에 의해 채택된 개별적인 소리들이 걸러진 뒤 '시간'이라는 통로 안에서 시간차를 두고 다양한 높이와 방식으로 울림으로써 우리에게 인지됩니다.
작곡가가 자신이 채택한 소리에 아무리 슬픔의 의미를 부여한다고 하더라도 그 소리가 슬픔 자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듣는 우리들이 그러한 의미를 부여하였고 그렇게 사용하였기에 우리는 그렇게 듣는 것일 뿐입니다.
마치 우리가 사물에 '이름'을 부여하여 그렇게 부르기로 약속한 것처럼, 어떠한 소리들은 우리들이 특정 상황에 계속해서 사용하면서 그렇게 약속된 것입니다. 이는 소리에는 원래 아무런 의미가 담겨 있지 않다는 말과 같습니다.
언어는 약속인데 그렇다면 이것 자체가 언어의 조건에 해당하지 않냐고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이 부분이 우리가 가장 오해하고 있는 지점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바로 '대략적 공감'이라고 생각했던 만질 수도 없고 눈으로 볼 수도 없는 음악의 모호한 특성을 우리는 각자의 경험을 통해 성급하게 내 감정을 끼워 맞추거나 일반화시켜 해석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는 내가 느끼는 감정이 거짓이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음악을 듣고 각자의 해석을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누구에게나 보편적이지 않고 각각 해석이 다른 언어라면 그것은 모두의 약속을 전제로 하는 '언어'로써의 자격을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에크만이 제시한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에 대해서는 표현할 수 있다고 하지만, 인간이 무한에 가까운 상황에서 느끼는 다양하고 세심한 감정과 감각을 표현하기에 턱없이 부족할 수밖에 없는 '보편성'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음악은 '어떻게' 만국 공통의 약속이 되었을까요?
여기서부터는 '익숙함'에 대한 문제와 연결이 됩니다.
TV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들은 모두 서양 고전음악을 기본으로 하여 만들어진 '조성 음악'입니다. 간혹 한국의 국악이 흘러나오지만 이내 서양의 멜로디나 조성 음악을 따라 하는 국악기 연주가 등장하곤 합니다. 이처럼 조성 음악의 홍수에서 우리는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던 언제나 조성 음악을 들을 수밖에 없고 이를 통해 우리는 자연스럽게 또다시 조성 음악에 노출되게 됩니다.
원래는 제가 아주 좋아하던 Keane의 'Everybody's Changing'은 개그콘서트 '패션 7080' 코너의 김준형 님의 등장 씬에 사용되면서 듣기만 해도 웃긴 음악이 되어버렸고, Beethoven의 교향곡 No.5 1악장(일명 '운명교향곡')의 선율은 모든 예능 코너의 단골 효과음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러한 예는 요즘 방송에서 무수히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예를 든 이유는 우리가 '유행' 또는 '취향'에 대해 미치는 영향이 결국 미디어에 얼마나 많이 노출되는가에 대한 문제와 비례한다는 것과 이렇게 만들어진 이미지는 의식적으로 지각하지 않는 이상 우리의 머릿속에 남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음악을 들으면서 우리 안에서 생기는 '감정'을 음악과 동일시 여기면서, 우리는 대략적인 감정의 공감만으로 음악을 '만국 공통의 언어'로 만들어 버렸고, 우리가 자주 듣고 있는 만국 공통의 언어라 착각하는 조성 음악이 ‘아닌’ 음악들을 철저히 외면하게 되었습니다.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자주 듣게 되는 음악이 친숙해지는 것은 어찌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주 듣지 않는 음악들은 조성 음악과 동등한 경험을 제공해주지 않기에, 사람들은 어렵다, 난해하다, 지루하다, 미개하다 등의 핑계로 스스로에게 멀리할 수 있는 명분으로 더욱더 멀리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많이 듣는 조성 음악 안에서도 이러한 '노출의 차별성'은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서양의 고전음악들은 곡의 길이가 긴 것들은 1시간 이상인 것도 있고 보통 10분 내외의 길이가 평균적이지만, 그렇게 때문에 자주 들을 수 있는 기회는 줄어들고 시간이 금인 현대 시대에는 들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더욱 줄어들게 됩니다. 이와 같은 이유로 근대에 들어오면서 곡의 길이는 더욱 짧아지고 곡의 구성이나 악기의 편성도 간단하게 바뀌면서 듣기 쉬운 (=소비하기 쉬운) 음악들 위주로 미디어의 엄호를 받게 됩니다. 간단한 예로 인디음악과 대형 기획사 소속 가수의 음악은 어쩔 수 없는 노출의 차별성을 가지며, 인지도 면에서 많은 차이를 가지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많은 사람들이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다는 말 자체가 어느 정도는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노출되어 거부감 없는 상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말은 대중적인 장르일수록 자본에 더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입니다.
2010년을 전후해서 대중음악에서는 후크송(Hooksong)이라는 일종의 유행이 생겼습니다. 2000년대 중반 '미디엄 템포 발라드'의 과도한 감정 소비에 반기를 들고 최대한 단순하고 자극적인 곡을 대중들은 선호하게 됩니다. 일종의 반작용이지요. 그래서 곡들은 더욱 단순해지고 귀에 쏙쏙 들어오는 후렴구들만 반복하는 형태로 대부분의 곡들이 만들어지고 유행하게 됩니다. 그 당시에는 의미 없이 반복하는 가사를 가진 곡들이 대단히 많이 나와서, 음악계에서도 우려를 표하는 인터뷰를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시간이 가면 갈수록 사람들은 음악의 내용보다는 더 이상 생각하기를 꺼리며 간편한 것, 간단한 것, 어렵지 않은 것, 나아가서는 더욱 자극적인 것들을 찾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례는 조금 극단적이긴 하지만,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는 우리들의 안일한 면을 부각해 각성하게 만든 유용한(?)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금 부풀린 점이 있지만, 간단함, 편리함, 명료함 만 쫓은 인간들의 나태함과 안일함이 지속될 경우 음악 또한 자본에 잠식되어 우리를 본능에만 충실한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상태로 몰고 가지 않을까 걱정이 앞섭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그 뒤로 후크송의 'ㅎ'도 들어보지 못했다는 것!
물론 이렇게 나쁜 사례 말고도 고정관념 혹은 선입견에 대해 경종을 울린 사례들 또한 많이 있습니다.
격투 씬의 거친 상황에서 미장센과는 극명하게 대비되는 음악 연출로 세계의 여러 감독들에게 오마주 되고 있는 한국의 감독 이야기입니다. 바로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의 격투씬입니다. 기존에는 격투씬이라고 하면 템포가 빠르고 역동적인 음악을 사용하거나 긴장감을 극대화시키는 음악을 사용하는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영화의 감독인 '이명세' 감독님은 고정관념에 찬물을 얻는 결정을 하게 됩니다. 바로 Beegees의 'Holyday'를 삽입시키면서 기존의 방식을 전도시키게 됩니다. 그 당시 누구나 아는 서정적인 멜로디를 거친 격투씬과 결합함으로써 한국 영화사를 뛰어넘어 세계 영화사에 이름을 남길 명장면을 탄생시키게 됩니다.
물론 이 사례는 기존의 생각을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관객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반전을 가져다준 것뿐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끊임없이 고민하고 기존의 고정관념이나 선입견에 매몰되지 않으려는 끊임없는 노력과 사고의 결과물이기에 구독자분들에게 선보여 함께 이야기 나누고 싶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는 예술이라는 활동은 기존의 개념과 체재에 대한 질문이며, 도전입니다. 조금 거창하게 들릴진 모르겠지만, 이를 통해 동시대의 사람들이 하는 보편적인 생각의 방향에 대해서 질문하고, 자신의 행동이나 생각이 자신이 가진 가치와 부합하는지 끊임없이 자문하고, 이를 토대로 나(인간) 다운 결정을 내리며 삶을 개척해나가는 것이야말로 예술이 우리에게 필요한 가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생각을 고도화하는 힘을 기른다고 할까요? 또한 이러한 가치들은 각 예술 분야에서 각각의 오브제들이 가지는 '관계'의 규정을 통해서 세상에 펼쳐놓는다고 이전의 글을 통해서 이미 기술한 바 있습니다. 이 부분은 넘어가도록 하죠. 그럼 조금 무거운 분위기를 뒤로하고 이쯤 되면 가지게 되는 질문으로 글을 이어나가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음악을 들으면서 느끼는 감정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우리의 이전 경험을 통해 발현했던 감정들이 음악을 통해서 다시 '재현'되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과 같이 여기서의 감정은 작곡가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순전히 개인의 경험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이는 공감이라기보다는 본인의 선험적인 감정을 '회상'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에 대한 공감이 아닌 감상자 본인의 감정을 되새기는 것입니다. 감상자들이 느끼는 어떠한 감정들은 순전히 감상자 본인의 감정을 재료로 하며, 이 감정들은 이미 본인이 느꼈고 경험했던 것에 기반하기에 내가 보는 세상의 범위가 되는 셈입니다. 물론 영화나 드라마와 같은 시각적인 정보가 동반되는 상황에서는 서사나 상황에 대한 맥락이 음악에 포함된 가사처럼 관객에게 다양한 감정을 유발할 수도 있습니다. 이는 음악 자체로써 유발되는 감정이라고 볼 수는 없기 때문에 열외로 하겠습니다.
이를 통해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음악을 감상하며 느끼는 감정은 결과적으로 타인에 대한 공감이라기보다는 자신에 대한 성찰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음악을 듣기 위해 집중하는 시간은 결국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 자신을 경험하는 시간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관계에서 공감은 제일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관계는 타인과 맺는 것이지만, 그 출발점은 결국 나 자신입니다. 나의 감정, 나의 경험을 인정하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 본다면, 그 어떠한 새로운 생각도, 새로운 음악도 맞이할 수 있는 여유와 용기가 생기지 않을까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러한 구절로 마무리 지을까 합니다.
모든 것은 나로부터 출발해서 나로 귀결된다.
결국 음악은 음악일 뿐이다.
다음 글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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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음당空音堂, 진지하지만 격 없는 예술 공론장
공음당空音堂, 빌 '공', 소리 '당', 집 '당', 소리가 없는 집, 소리가 없는 곳에는 어떠한 소리든 채워질 수 있기에, 비어있는 공간은 그 무엇으로도 변화할 수 있다는, 만든 이의 '소리와 운영'에 대한 생각을 담은 네이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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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정 세원
평생 '음악공부'에 매진하다 독일에서의 우연한 직장 생활을 통해 '알'에서 나와 '세상'과 마주친 순간 '호기심'이 폭발하여, 콘텐츠 기획 및 사운드 컨설턴트의 길을 함께 걷고 있는 현대음악 작곡가.
제품/공간 사운드 디자이너
e모빌리티 사운드 디자이너
현대음악 작곡가
음악예술 콘텐츠 기획자
현) 음악예술 공론장 '공음당空音堂' 운영 중
Interactive Art Group 'FGTC' 운영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