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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질 아블로, 옷을 짓지 않고 '사다리'를 지은 건축가

건축학도 버질 아블로(Virgil Abloh)가 남긴 '오픈 소스' 유산

by JUNSE

관점 프리즘 No.08

옷을 짓지 않고 '사다리'를 지은 건축가

건축학도 버질 아블로(Virgil Abloh)가 남긴 '오픈 소스' 유산

출처 : www.npr.org

2021년, 버질 아블로가 세상을 떠났을 때 패션계와 전 세계의 유스 컬처(Youth Culture)는 거대한 충격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그 슬픔의 결은 조금 달랐습니다. 사람들은 단순히 '옷 잘 만드는 천재 디자이너'를 잃은 것이 아니라, 굳게 닫혀있던 럭셔리의 높은 성문을 열어주던 '리더'이자, 길을 헤매는 창작자들에게 지도를 건네주던 친근한 '형'을 잃은 듯 슬퍼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오프화이트(Off-White)의 설립자이자 루이 비통의 남성복 수석 디자이너로 기억하지만, 저는 그를 '시스템을 해킹한 건축가'로 정의하고 싶습니다. 실제로 그는 패션 스쿨이 아닌 위스콘신 대학교에서 토목공학을, 일리노이 공과대학교에서 건축학 석사를 전공한 '진짜 건축학도'였습니다.


그의 모든 행보는 옷을 만드는 '패션 디자인'이라기보다, 사회적 구조와 인식을 설계하고 새로운 공간을 짓는 '건축(Architecture)'에 가까웠습니다. 이 글은 버질 아블로의 뿌리인 '모더니즘 건축'과 IT 업계의 '오픈 소스(Open Source)' 철학을 프리즘 삼아, 그가 어떻게 패션이라는 매체를 이용해 세상을 바꾸는 거대한 '구조물'을 지었는지에 대한 저의 생각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유행하는 옷을 남긴 것이 아니라, 다음 세대를 위한 '설계도'와 '사다리'를 남겼습니다.



미스 반 데어 로에의 제자 : '투명함'으로 구조를 드러내다

출처 : www.thecollector.com


버질 아블로는 자신의 영웅으로 현대 건축의 거장 미스 반 데어 로에(Mies van der Rohe)를 꼽곤 했습니다. 미스 반 데어 로에의 건축은 'Less is More'로 대표되며, 철골과 유리를 사용하여 건물의 뼈대(구조)를 숨기지 않고 투명하게 드러내는 것이 특징입니다. (시카고의 크라운 홀이나 판스워스 하우스를 떠올려 보십시오.)

버질 아블로의 디자인 언어인 '해체주의'는 바로 이 모더니즘 건축의 '구조 드러내기'를 패션에 그대로 이식한 것입니다.


투명한 가방과 속이 보이는 신발: 그가 오프화이트와 루이 비통에서 선보인 투명한 PVC 가방이나, 내부의 스펀지가 훤히 드러나도록 혀(Tongue) 부분을 잘라낸 나이키 운동화는, 건물의 내부가 훤히 보이는 유리 커튼월(Curtain Wall) 건축과 같습니다. 그는 "이것은 신비로운 명품 가방이다"라는 환상을 심어주는 대신, "이 가방은 가죽과 실, 플라스틱으로 이루어진 구조물이다"라는 본질을 직관적으로 보여줍니다.


케이블 타이와 인더스트리얼 벨트: 옷에 달린 주황색 케이블 타이(Zip-tie)나 공업용 벨트는 마치 공사장의 비계(Scaffolding)나 안전띠처럼 보입니다. 보통의 디자이너라면 숨겼을 이 '공업적 부속품'들을 그는 디자인의 핵심 요소로 격상시켰습니다. 이는 "이 옷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Work in Progress)", "이것은 숭배해야 할 예술품이 아니라 산업적 생산물이다"라는 메시지를 던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는 패션이 감추려 했던 '제작의 과정' 자체를 디자인으로 승화시킨 건축가였습니다.


헬베티카와 큰따옴표(" "): 그가 제품 위에 "SCARF", "WALLET"이라고 헬베티카 서체로 적어 넣은 것은, 건축 도면 위에 '거실', '주방'이라고 표기하는 행위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는 사물에 이름표(Metadata)를 붙임으로써, 그 사물을 바라보는 우리의 인식을 환기시킵니다. 이것은 옷이 아니라 '정보'가 되는 순간입니다.



패션계의 '깃허브(GitHub)' : 오픈 소스로 짓는 문화

출처 : https://free---game.com/


제가 버질 아블로에게서 발견한 가장 놀라운 점은, 그가 자신의 디자인 방법론을 '오픈 소스(Open Source)'처럼 세상에 공유했다는 점입니다.


전통적인 럭셔리 하우스들은 자신들의 공법과 영감의 원천, 마케팅 전략을 1급 기밀처럼 다룹니다. 그들은 폐쇄적인 서버와 같습니다. 하지만 버질 아블로는 정반대였습니다. 그는 "Free Game(무료 정보/지침)"이라는 웹사이트를 만들어 자신의 브랜드 설립 과정, 로고 만드는 법, 마케팅 전략, 심지어 포토샵 파일까지 누구나 볼 수 있게 공개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디자인을 '원본'으로 고수하기보다, 누구나 가져다 쓰고 변형할 수 있는 '소스 코드(Source Code)'나 '템플릿'처럼 취급했습니다.


나이키 'The Ten' 프로젝트의 철학: 나이키와 협업한 전설적인 'The Ten' 프로젝트에서 그는 신발을 완성된 형태로만 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소비자들이 직접 칼로 오리고, 글씨를 쓰고, 끈을 바꾸는 등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의도적으로 남겨두었습니다. 그는 심지어 "너만의 신발을 만드는 법"에 대한 튜토리얼을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완성된 소프트웨어를 줄 테니 쓰라"는 태도가 아니라, "내가 코드를 짰으니, 너희가 이걸 포크(Fork, 복제 후 수정)해서 너만의 버전을 만들어봐"라는 깃허브(GitHub)식 사고방식입니다. 그는 자신이 천재적인 독점자가 되기보다, 수많은 '투어리스트(Tourist, 외부인)'들이 패션이라는 견고한 성벽 안으로 들어와 놀 수 있는 '플랫폼'을 짓기를 원했습니다.



트로이의 목마 : 하이엔드에 침투한 스트리트 정신

출처 : www.dezeen.com 'Virgil Abloh makes debut for Louis Vuitton on rainbow runway in Paris'


건축학도였던 그는 '구조'를 이해하고 있었기에, 그 구조를 '해킹'하는 법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루이 비통이라는 거대한 하우스는 정복해야 할 목표가 아니라, 자신의 철학(스트리트 정신, 흑인 문화, 유스 컬처)을 주류 사회 깊숙이 침투시키기 위한 '트로이의 목마'였습니다.


그는 콧대 높은 파리 패션 위크 런웨이에, 완벽한 비율의 모델 대신 스케이트보더와 래퍼, 화가, 그리고 자신의 친구들을 세웠습니다. 고급 가죽 대신 데님과 면 티셔츠, 헐렁한 후드티를 올렸습니다. 이는 기존 럭셔리 시스템의 문법을 내부에서부터 무너뜨리고 재조립하는, 매우 정교하게 설계된 '구조적 변혁'이었습니다.


그는 루이 비통의 첫 번째 쇼에서, 무지개색 런웨이를 깔았습니다. 그리고 쇼의 마지막, 자신의 멘토였던 칸예 웨스트와 뜨겁게 포옹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장면은 단순히 한 디자이너의 성공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동안 패션계의 변방에 머물러야 했던 흑인 문화와 스트리트 문화가, 마침내 가장 높은 곳에 깃발을 꽂았음을 선언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그는 전 세계의 흑인 소년들에게, 그리고 비주류 창작자들에게 말하고 싶었을 겁니다. "봐, 나도 했어. 내가 이 시스템 안에 '사다리'를 놓았으니, 너희도 이제 올라올 수 있어."



17세의 나를 위한 설계도


버질 아블로는 생전 인터뷰에서 "내가 하는 모든 일은 17세의 나를 위한 것이다"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 17세의 소년은 돈도 없고 인맥도 없지만, 아이디어와 열정으로 가득 찬, 세상 모든 '아웃사이더'들을 대변합니다.


그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것은 특정 시즌의 유행하는 옷이 아닙니다. 그는 "누구나 창작자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의 설계도를 남겼습니다. 그는 자신의 작업물을 통해 "이건 대단한 예술이 아니야. 단지 3%만 바꾸면 돼. 너도 할 수 있어"라고 끊임없이 속삭였습니다.


저는 그를 보며 생각합니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역할이 자신만의 완벽한 성을 견고하게 쌓아 올리는 것일 수도 있지만, 버질 아블로는 그 성벽을 허물고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다리를 놓고, 사다리를 만드는 새로운 길을 선택했다고 말입니다. 그는 고독한 예술가가 되기보다 모두를 연결하는 '관계의 건축가'가 되기를 자처했습니다.


그는 디자이너였지만 옷을 짓기보다 문화를 지었고, 스타였지만 혼자 빛나기보다 모두를 위한 조명이 되기를 자처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기억해야 할 버질 아블로라는 건축가의 진짜 유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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