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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을 가장 비싼 상품으로 만든 '노이즈 캔슬링'

소음을 지우는 기술, 현대인의 필수 생존 키트가 되다

by JUNSE

Sound Essay No.52

'침묵'을 가장 비싼 상품으로 만든 '노이즈 캔슬링'

소음을 지우는 기술, 현대인의 필수 생존 키트가 되다

hero_image_01.jpg 출처 : www.dyson.com.au

출근길 지하철, 덜컹거리는 열차 소음과 안내 방송, 옆 사람의 통화 소리가 뒤섞인 혼란스러운 공간. 당신은 주머니에서 작은 하얀색 기기를 꺼내 귀에 꽂습니다. 그리고 길게 버튼을 누르는 순간, 세상의 볼륨이 순식간에 ‘0’으로 줄어듭니다. 시끄러웠던 지하철은 순식간에 고요한 나만의 서재로 변하고, 귀를 찌르던 소음은 아득한 배경음으로 물러납니다.


우리에겐 이제 너무나 익숙한 풍경, 바로 ‘액티브 노이즈 캔슬링(Active Noise Cancellation, 이하 ANC)’ 기술이 선사하는 마법 같은 순간입니다.


과거의 오디오 기기들은 언제나 "어떻게 하면 더 잘 들리게 할 것인가(Hi-Fi)"를 고민했습니다. 더 선명한 고음, 더 웅장한 저음을 재생하는 것이 기술의 목표였죠. 하지만 21세기의 오디오 시장은 정반대의 가치를 팔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어떻게 하면 안 들리게 할 것인가"입니다.


애플의 에어팟 프로, 소니의 WH-1000XM 시리즈, 보스의 콰이어트컴포트(QC) 시리즈. 이 베스트셀러들이 우리에게 파는 것은 단순히 음악을 재생하는 기계가 아닙니다. 그들은 ‘침묵’과 ‘몰입’, 그리고 소란스러운 세상 속에서 ‘온전한 나만의 공간’을 확보할 수 있는 권력을 팝니다. 이 글은 소음을 지우는 기술이 어떻게 현대인의 필수품이 되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도시 생활과 청취 문화를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 탐구합니다.



1 + (-1) = 0 : 소리로 소음을 지우는 마법의 수학


노이즈 캔슬링의 원리는 언뜻 보면 마법 같지만, 사실은 아주 정교한 물리학과 수학의 결과물입니다. 그 핵심은 ‘상쇄 간섭(Destructive Interference)’이라는 파동의 성질에 있습니다.


소리는 공기의 진동, 즉 ‘파동(Wave)’입니다. 파도가 치는 것을 상상해 보세요. 파도가 높게 솟아올랐다가 낮게 꺼지는 흐름이 있죠. 만약 솟아오르는 파도(1)에 정확히 반대 모양으로 꺼지는 파도(-1)를 동시에 부딪치게 하면 어떻게 될까요? 두 파도는 서로를 상쇄시켜 수면은 잔잔한 ‘0’의 상태가 됩니다.



licensed-image?q=tbn:ANd9GcRmf9s3WohhPNOgzGrG1gHqrOhRnMWKGzfZ6VCO6Ubg254Z7-SNo7Psb8ujl48VGvyFKq8RTh6fSpBSTPN39Mc0EcEipnKF6DtSeapitKXBd0d9xlc 출처 : Shutterstock

ANC 헤드폰에는 외부 소음을 듣는 마이크가 달려 있습니다. 이 마이크가 지하철의 웅웅 거리는 저주파 소음(Noise)을 감지하면, 내부의 프로세서가 그 소리의 파동을 분석하여 정확히 반대되는 형태의 ‘안티 노이즈(Anti-noise)’를 찰나의 순간에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스피커를 통해 이 안티 노이즈를 재생하죠. 결과적으로 귀 고막 앞에서는 외부 소음과 안티 노이즈가 충돌하여 사라지고, 우리는 ‘고요함’만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ANC 기술의 원리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HowStuffWorks 등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원래 이 기술은 시끄러운 엔진 소음에 시달리는 비행기 조종사들을 위해 개발되었습니다. 극한의 환경에서 청력을 보호하고 통신을 명확히 하기 위한 ‘생존 기술’이었던 셈이죠. 그리고 수십 년이 지나, 이 기술은 복잡한 도시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또 다른 ‘생존 기술’로 진화했습니다.



침묵은 21세기의 가장 값비싼 사치품


왜 우리는 수십만 원을 호가하는 이 비싼 헤드폰을 기꺼이 구매할까요? 그것은 현대 사회에서 ‘침묵’과 ‘프라이버시’가 가장 희소하고 비싼 자원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소음 공해와 강제된 연결 : 도시는 잠들지 않습니다. 공사장 소음, 자동차 경적, 카페의 배경음악, 타인의 대화 소리. 우리는 원하지 않는 소리 정보에 24시간 노출되어 있습니다. 이는 뇌에 지속적인 스트레스를 주고, 코르티솔 수치를 높입니다.


'Mute' 버튼의 욕망 : 우리는 스마트폰 화면은 언제든 끌 수 있지만, 귀는 닫을 수 없습니다. 노이즈 캔슬링 헤드폰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인간에게 현실 세계의 볼륨을 조절할 수 있는 ‘Mute 버튼’을 쥐여주었습니다.



이제 카페는 커피를 마시는 곳이 아니라,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을 꽂고 일하거나 공부하는 ‘공유 오피스’가 되었습니다. 비행기 일등석을 타지 않아도, 헤드폰 하나만 있으면 이코노미석의 소음을 지우고 나만의 평온한 라운지를 만들 수 있습니다. 브랜드들은 이 점을 파고듭니다. 소니의 광고 카피가 "음악을 듣는다"가 아니라 "세상과 거리를 두다" 혹은 "몰입의 즐거움"을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오디오 기기가 아니라, ‘정신적인 안식처’를 팔고 있는 것입니다.



하얀 콩나물, 현대인의 '방해 금지' 팻말


노이즈 캔슬링 기술의 대중화는 도시의 풍경과 사회적 상호작용의 방식까지 바꾸어 놓았습니다.


과거에 헤드폰은 음악 애호가들의 전유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귀에 꽂힌 하얀색 에어팟은 현대인의 유니폼과도 같습니다. 이것은 타인에게 보내는 명확한 시각적 신호입니다. "나에게 말을 걸지 마시오(Do Not Disturb)."



사회적 단절 vs 개인적 자유: 우리는 물리적으로는 함께 지하철을 타고 거리를 걷고 있지만, 청각적으로는 각자 완벽하게 고립된 ‘소리의 버블’ 속에 존재합니다. 이것은 타인의 방해를 받지 않겠다는 방어막인 동시에, 우연한 대화나 마주침을 차단하는 벽이기도 합니다. 어떤 사회학자들은 이것을 ‘공공장소의 사유화’ 혹은 ‘원자화된 사회’의 상징으로 보기도 합니다.


투명 모드(Transparency Mode)의 역설: 재미있는 점은, 기술이 이 단절을 해결하기 위해 ‘투명 모드(주변 소리 듣기)’라는 기능을 다시 넣었다는 것입니다. 이어폰을 빼지 않고도 마이크를 통해 주변 소리를 듣고 대화할 수 있게 만든 것이죠. 이는 우리가 이어폰을 단순히 음악 감상 도구가 아니라,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을 제어하는 '청각적 증강현실(Audio AR) 장치'로 사용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이제 듣고 싶을 때만 듣고, 듣기 싫으면 끄는 선택권을 가집니다.



소음을 지우고, 본질을 듣다


노이즈 캔슬링은 분명 혁신적인 기술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소음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는 피난처를 제공하고, 낮은 볼륨으로도 음악의 섬세한 결을 느낄 수 있게 해 주어 청력을 보호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기술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또한 묵직합니다. 우리는 점점 더 침묵을 돈으로 사야 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자연스러운 정적이나 고요함은 사라지고, 오직 배터리가 충전된 기계를 통해서만 고요함을 얻을 수 있는 역설.


사운드 디자이너로서, 혹은 기획자로서 우리는 이 현상을 통해 무엇을 읽어야 할까요? 사람들은 이제 단순히 '자극적인 소리'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통제하고 싶어 하는 욕구, 그리고 복잡한 세상 속에서 온전히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간절히 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쩌면 미래의 사운드 디자인은, 무엇을 더 들려줄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지워줌으로써 사용자에게 더 나은 경험을 선물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뺄셈의 미학'으로 나아가야 할지도 모릅니다. 노이즈 캔슬링이 만든 그 인공적인 고요함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내가 진짜 듣고 싶었던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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