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배를 갈라 나를 낳았다. 그래도 좋았던 것이다, 나를 위해서라면. 나는 30대가 되었지만 아직 '그래도' 좋을 만큼 바라는 게 없다. 정말로 내 배를 갈라 다 꺼내가도 좋을 만큼 간절한 일이 없다. 여러분의 아이라고 다를까?
부모는 모두 간절히 바랐던 일이 있다. 지금 내 속을 썩이는 이 녀석을 낳는 것, 이 녀석이 제발 아프지만 않게 크는 것, 요녀석을 위해 간절했던 경험이 수없이 많다. 그렇게 애지중지 키운 놈인데, 어쩐지 이 녀석은 그리 바라는 게 없다.
공부도 건성. 운동도 건성. 그렇다고 게임을 미친 것처럼 하냐 물으면 또 그건 아니다. 그냥 게임을 더 좋아할 뿐 그렇다고 프로게이머가 될 만큼 게임에 열정적인 것은 아니란 말이다. 부모의 눈으로 보자면, 아이가 간절하지 않은 게 영 탐탁치가 않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알아 두어야 할 것이 있다. 간절함이 없는 사람은, 너무도 연약하다. 무언가 간절히 바라는 사람은, 그것을 위해 어떤 난관도 헤쳐나갈 힘이 있다. 결국 원하는 바를 얻지 못하더라도, 간절한 사람은 한 번의 실패가 영원한 실패가 아님을 안다.
하지만 간절하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모르니까 한 번의 실패가 전부라고 생각한다. 전부라고 생각하니까 두려워진다. 두렵기 때문에 아무것도 하기가 싫다. 무서운 것이다. 간절함이 없다고 해서, 바라는 게 하나도 없겠는가?
단순한 바람과 간절한 바람에는 차이가 있다. 단순한 바람은 그것이 이뤄지길 바랄 뿐, 그것을 위한 자신의 노력이 반드시 수반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간절한 바람은 그것이 물리적이건 정신적이건 바람을 이루기 위해 자신이 해야 할 모든 일들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이 차이가 사람을 강하게 만든다.
그러니 아이에게 간절함이 없다고 야단을 치는 목소리는, 안 그래도 연약한 아이를 더 위축되고 또 짜증나게 만들 뿐이다. 사실 필자도 묻고 싶다. 간절함이라는 게, 여러분이 다그치면 아이가 가질 수 있는 종류의 마음가짐인가?
그리고 더 솔직히 말하자면, 자식들에게 그런 말을 하는 부모는 '정말로 간절하게' 아이가 '간절한 마음'을 갖길 바라지는 않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 간절한 사람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하지만 여러분은 단순히 말 몇 마디로 아이가 그런 마음을 갖길 바라고 있지 않은가? 여러분부터가 간절하지 않은데, 아이가 그런 마음을 가질 수는 없다. 그렇다면, 아이가 간절한 마음을 가지게 해주기 위해서는 부모가 어떻게 해야 할까?
정답은, '호들갑'을 떠는 일이다. 아이의 사소한 장점과 강점에 호들갑을 떨며 칭찬하고, 아이의 사소한 변화에 호들갑스럽게 반응하는 것. 그것이 부모가 해줄 일이다.
이 요란스러움이 어떻게 정답이 될 수 있는지는 간단하다. '간절함'이란, 단순했던 '바람'을 점점 더 '구체화'하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누구도 한 번에 간절해지지 않는다. 바라고 바라던 일이 되어야 간절해진다.
간절하지 않은 아이는, 아직 바라는 것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무언가를 바라더라도 그 바람을 구체화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바람을 구체화하였더라도 아직 그에 해당하는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이다.
부모는 아이가 무언가를 바라도록 '호들갑'스럽게 칭찬하고, 그 바람을 구체화할 수 있도록 '호들갑'스럽게 찾아 보고 연구하고, 그 바람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도록 '호들갑'스럽게 조력해야 한다.
그리 간절하지 않았던 아이도, 부모의 호들갑을 보면 부담스러워진다. 그 부담스러움은 점점 더 간절함으로 변해간다. 부모가 바랐던 일이, 아이가 바라는 일이 되어 버린다. '나'보다 더 '나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을 보며, 아이는 간절해진다.
아이가 간절하지 않다고 불평할 것 없다. 당연하게도 아이는 자신의 배를 갈라도 좋을 만큼 바라는 일이 없다. 그런 간절함이란 보통, 부모가 아이에게 주어야 하는 것이지 아이가 노력해서 얻는 것이 아님을 이해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