힙스터가 되고 싶어도 힙스터는 생각하지마
힙스터에 대한 고찰
힙스터는 누구인가.
불과 2-3년 만에 빠르게 퍼진 이 힙스터라는 개념은, 지금 젊은 우리 세개가 그 어떤 힙-함에 대해 힙하다는 말 외에는 다르게 정의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창렬을 창렬이라, 혜자를 혜자라 하지 않으면 뭐라 칭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것게 되어 버린 것처럼
힙스터 역시 우리 문화에서 다르게 치환될 수 없는 개념이 되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힙스터'와 '힙-함'이 주는 이 미묘한 정서는 아직 무엇이라 규정하고, 자본주의의 언어로 풀어내기엔 애매한 개념인 듯 하다. 비슷한 시기에 힙스터 말고도 소확행이 있었다. 오래 전 하루키가 만들어내고, 각 기업의 PR 및 마케팅 담당자들에 의해 재생산 된 이 개념은 마케팅 문구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보다가 이제는 식상해져버린 참이다. 하지만, 힙한 감성을 내뿜고자 하는 광고는 있어도, 힙스터의 제품이라며 팔리는 재화는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어째서 힙스터는 자본주의의 과배양지인 한국에서조차 이미 널리 쓰이나, 아직 돈의 언어로는 기능하지 않고 있을까?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힙스터, 이들이 누구인가에 대해 그 누구도 정확하게 정의한 적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힙스터 본인들이 마치 소확행을 즐기는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해시태그를 달며 그것을 자처하지도 않는다. 본인을 힙스터라고 칭하면 정말 부끄러워 지기 때문인데, 이는 재화를 팔때도 마찬가지인 것으로 보인다. 힙스터의 물건이라고 직접 칭하는 순간, 힙함과는 작별을 고하게 되는 것이다.
외려 '힙스터'라는 개념이 쓰이는 맥락은 힙스터가 아닌 사람들이 힙스터들을 보며, '힙하다-'며 감탄을 할 때 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힙스터는 non힙스터들의 동경의 대상이기만 한 것일까?
서구권 힙스터 밈과 딘드밀리충
과거 서구권에서 힙스터들이 등장했을 때, 그들은 춥지도 않은데 콜드플레이 때문에 비니를 쓴다며 놀림을 받곤 했다. 스케이트 보드를 타고 PB 사이다를 마시는 다양한 meme들이 만들어지고, 결국 노래의 장르가 힙한 '분위기'로 규정되는 PB R&B라는 신장르가 탄생하기에 이르렀다.
2019년 현재 한국의 힙스터들 역시 같은 고난을 겪고 있는 듯하다. 다른 수많은 공포스러운 것들을 무력화하듯 힙스터들을 무력화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그들을 비웃어버리는 것이다. 페북 네임드가 연성해낸 딘드밀리라는 칼날에 힙스터, 그들만의 '감성'은 '허세'로 쉽게 전락하고 만다. 남들과는 다른척하지만, 미디어에서 만들어낸 쇼미 더 머니 스타를 복제한 바보들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동서양을 막론하고 힙스터들은 비웃음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한국의 힙스터들을 딘드밀리 충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그들과 직접 대면한다면? 이러한 힙스터 비웃기는 어쩌면 학창시절 잘나가는 무리를 보며 내가 같이 '안' 노는 거라고 비웃어버리는 것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딘드밀리라는 말의 창조자 역시 자신을 힙스터의 어느 갈래 중 하나라고 설명한다.)
앞서 힙스터는 아직 자본주의의 언어로 풀어지지 않았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힙스터와 자본주의가 대척점에 서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2019년 현재 쿨한 것 힙한 것은 브랜드화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브랜드들은 현금의 가치로 치환되어 있다. 비싼 돈 주고 ACW 자켓을 샀다면? 인스타에 자랑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다. 힙스터는 돈을 벌어다 주진 않지만, 돈 주고 사기는 해야하는 모양이다.
힙스터는 어디서 왔는가
그렇다면 힙스터는 진정 신인류인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언젠가 one of a kind였으며, 누군가의 bae였고 거슬러가 그들은 싸이투멤이었다. 공중파에서 빛나는 중인 충재씨도 그 시절 힙스터 오빠였던 것이다. 과거 인디밴드의 음악을 미니홈피 BGM으로 설정하던 이들이 지금은 사운드 클라우드를 듣는 화면을 캡쳐해서 인스타 스토리에 올리고 있다. 과거 방명록에서 인맥을 과시하고 간지를 내뿜던 이들은, ASK fm에서 자신의 hater들이 남기는 찌질한 익명 공격을 박제하고 있다.
힙스터는 어디에 있는가
앞서 아직 힙스터의 개념은 기업들의 마케팅에 널리 활용되지 않는 것 처럼 보인다고 했지만, 페이스북 페이지 기반의 카페, 전시 등을 광고하는 SNS 마케팅에서는 종종 등장하기도 한다.
요즘 뭘 좀 안다는 사람들은 다 가는 ㅇㅇㅇ 골목에 위치한 힙~한 감성의 카페!
존예 포토존과 함께라면 인생샷! 문제 없다고~ 같이 가고 싶은 친구 @태그 ㄱㄱ
하지만, 이런 종류의 마케팅에서 사용되는 한 두 줄의 워딩에 큰 무게를 두지는 않겠다. 페이스북은 이미 힙과는 멀어진 매체로 보이는 데다가 이러한 "힙스터들의 성지"에는 힙스터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힙스터는 어디에 있을까.
힙스터는 당연히 힙한 장소에 있다. 하지만 이 힙스터의 성지들은 너무나 빠르게 변하고, 비밀스럽기 때문에 어디에 가면 힙스터를 만날 수 있다고 하기 어렵다. 하지만 힙스터가 어디에 없는지는 말하기 어렵지 않다. 힙스터는 상경계 대학에는 없다. 이 말을 들으면 열심히 대차대조표를 작성하던 상경계 학생이 분노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신은 힙스터가 아니다!
힙스터는 과거 감성충이었다. 서포터즈를 하고, 고학번과의 팀플에서 아등바등 생존하며 소확행을 즐기는 당신은 힙스터가 아니다.
힙스터는 강남 클럽에도 없다. 버닝썬에서 EDM에 몸을 맡기는 무리 중에 힙스터는 없다. EDM은 이미 너무 대중화 되어 버린 음악이다. 청담에도 몽키뮤지엄에도 그들은 없다. 당신이 돈이 많아서 돔페리뇽을 마시던 구찌 스웨터를 입었건 미안하지만 당신의 취향은 힙스터의 것과는 결이 조금 다르다. 여기까지 읽었으며, 을지로에서 신도시에서 음악에 취하는 당신 혹시 힙스터가 아니라 트찔이는 아닌지?
힙스터는 집단적 정체성이다. 다른 수많은 신분과 이름들처럼 그가 속해 있는 집단 속에서 힙스터는 규정된다. 당신이 아무리 힙하게 굴려고 노력해도 당신의 친구 무리가 힙스터들이 아니라면, 당신의 인스타그램 팔로워들은 당신의 진정성을 의심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당신의 모든 친구들이 팔로워가 4000명이 넘을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당신과 당신의 예술가 지인들이 재미있고 비밀스러운 인생을 살고 있으며, 서로를 매우 아끼는 것이다. 이러한 끈끈한 유대는 인스타그램 댓글의 술좀 작작 쳐먹어 등의 걱정어린 놀림으로 확인된다는 점에서 다시한 번 힙스터의 유래가 싸이피플에서 멀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힙스터의 주요한 정체성은 애쓰면 안된다는 것이다. 인스타 팔로워가 많으면 좋겠지만, 이를 위해 해쉬태그를 몇개 씩 다는 것은 힙하지 않다. 인생이 우울해보이되 그것을 주체적으로 살아가고 이겨내려고 애써도 안된다. 그저 까만 화면을 인스타에 올리고 걱정어린 댓글에 위로 받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코끼리는 생각하지마. 힙스터가 되고 싶다면 힙스터는 생각하지마.
하지만 이글을 읽고 난 뒤의 머리에서는 힙스터가 떠나지 않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