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소설, 영화, 드라마, 그림, 조각, 음악 등 수많은 예술의 장르를 일상처럼 접하고 있다. 이런 예술을 큰 범주로서 창조와 표출의 영역으로 나눠서 바라보고자 한다. 전통적인 의미에서 예술은 창조와 표출이라는 카테고리로 나누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산업혁명 이후 안정화된 자본사회는 예술의 영역 조차 역할의 분담을 견고히 했고 지금의 현대사회에서는 그것이 가능해졌다.
표출의 예술이란 자기표현의 연장선상에 있는 영역이다. 누군가 만들어놓은 프레임을 내가 어떻게 바라보고 그것을 표출해낼 것인가? 배우나 악기 연주자를 생각하면 쉽다. 그들은 직접 시나리오를 짜거나 작곡을 하지 않는다. 다만 감독과 작가, 작곡가들이 만들어놓은 영역에서 자신이 작품을 표현해내고자 한다. 물론 광의의 개념으로 보면 그들 또한 창조의 예술을 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배우를 예로 들어보자. 배우는 상위의 몇몇을 제외하면 배고픈 직업이다. 과거에 배우로서의 미덕은 천의 얼굴이었다. 여러 작품을 이해하고 다양한 캐릭터를 소화시킴으로써 배우의 가치가 입증되었다. 하지만 현재는 그야말로 과잉공급 시장이다. 그래서 더 이상 배우에게 천의 얼굴을 강요하지 않는다. 다만 확실한 캐릭터 하나만 있다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 황정민 영화, 송강호 영화, 마동석 영화라고 한다면 머릿속에 어떤 캐릭터로 나올지 그려지듯 말이다. 그러므로 창조와 표출의 괴리는 더욱 커졌다. 하지만 대중은 표출의 영역을 사랑한다. 작가보다는 연기자를 작곡가보다는 가수를 하늘의 별처럼 우상 하고 좋아한다. 자본주의적 역할 분담은 예술가를 타락시켰다. 그들을 비난할 생각은 없다. 다만 작품을 표현해내기에 앞서 진정 그 작품의 시대적 배경과 담겨있는 철학을 이해하고 자신을 표출해내는 것이 지금 사회에 필요한 표출의 예술가가 가질 미덕이 아닐까
창조의 예술이란 무언가를 창작하는 영역이다. 작가나, 화가, 작곡가가 이에 속한다.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예술가에 보다 가까운 존재들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자본이 없으면 사실상 살아남기 힘들다. 생계를 유지해야 하고 투자를 유치해야 하므로 창조의 영역은 대중의 흥미를 끌 자극적인 영역으로 더럽혀졌다. 그런 시나리오를 쓴다면 그것은 문학으로 취급해야 할까? 만약 문학에 직관이 더해지고 은유가 사라져 버린다면 그것은 문학으로서 가치가 상실된 것이다. 문학으로서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다양한 해석의 여지와 생각하게 하는 시사점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흡사 철학과도 같고 작가의 이러한 철학을 간접 경험으로서 대중들에게 체험하게 한다면 그들은 열광한다. 니체는 "음악이 없다면 삶은 한낱 실수일 뿐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음악을 사랑했고 그 당시의 많은 철학가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바그너나 리스트와 같은 위대한 음악가가 많이 탄생하던 19세기는 그야말로 예술의 전성시대였다. 상업 예술이 판치는 현대 사회에서 몇몇 진짜 예술은 작품성만큼 대중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많은 창조적 예술가들이 타락하지 않도록 예술을 통찰 있게 바라볼 사람들이 더욱 많아졌으면 좋겠다. 대중예술이라는 단어가 부정적인 의미로 다가오지 않도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