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탈의 다른 방향
번뇌가 깊으면 해탈도 깊다. 세상의 양면은 중심을 잡는데 기준이 된다. 한쪽으로 치우쳐진 것들은 비로소 다시 돌아오게 되어있다.
번민과 번뇌는 과거의 일과 미래의 일로 미리 고통받는 것이다. 즉, 보이지 않는 두려움으로 인하여 고통받는 일이다. 불가분의 원칙, 해탈의 경지는 그 두려움마저 앎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두려울 것조차 두려움이 아니라, 그저 사소한 마음의 동요함이라 칭하는 것 또는 있어야 할 일들로 받아들이는 자세다.
삶은 그저 있는 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건의 발생과 만남의 인연은 굴레 안에서 움직이되 그 안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변화와 동요는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삶을 만든다는 의미는 인위적인 것은 아니다. 그저 벌어지는 것이다. 맥박의 움직임처럼 고정적이고 예상가능한 것이 아니라 파도의 움직임처럼 무작위적인 것이다.
예상치 못한 방향이라 하여 당황할 필요도 없으며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다. 즉, 삶은 그저 있는 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삶을 받아 들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아주 미세하고 오묘하게 다르다.
받아들인다는 것은 이해한다는 것이다. 찰나의 변화와 혼돈 속에서 이해하는 것은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하려 노력한다면 자조적인 자세와 느긋한 여유로움으로 한없이 바라보고 있으면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 번뇌의 무게는 결코 무겁지 않다.
해탈은 번뇌의 다른 방향일 뿐이다. 깊은 울림과 깨달음은 깊은 고민과 이해에서 태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