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든 호수와 시민의 불복종
코로나 2차 백신을 투여받고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이따금씩 뻐근한 어깨와 바짝 오르는 열 덕분에 식은땀을 줄줄 흘러내렸다. 해결하지 못한 과제가 있고 일정이 촉박하기에 자꾸 신경을 쓰다 보니 미간이 잔뜩 찌그러져 있었다. 스트레스다. 오늘만큼은 일을 생각지 말자. 그러니 어려운 책을 들자. 그렇게 마음과 정신을 이완시키고자 읽다만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월든>과 <시민의 불복종> 책을 읽었다.
숲 생활의 산물이자 무소유의 가치, 그리고 자연과 동화되어 겪었던 소로우의 경험은 경이로웠다. 현시대에 머물러 있는 내가 동의하기엔 너무나 먼 대상이자 주제였지만 그의 사상과 철학은 해묵은 활자에도 살아 녹아 흔들거렸다. 왜 고전에 훌륭하고 빠져드는지 알 수 있을 만큼.
사색은 하고 사는가? 현재에 만족하는가? 궁핍과 굶주림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는가? 자기 위안이 아닌 실질적 만족과 정체성 발견을 위한 노력은 하고 있는가? 끝없이 물음표를 던지게 만드는 소로우의 글들은 어제는 지루했으나 오늘만큼은 아니었을 것이다. 코로나 백신 투여로 인해 정신이 몽롱해졌을 수도 있겠다만 잠이 오지 않았던 것만큼 이것은 진실이었을 것이다.
그가 사랑했던 새벽 공기와 숲 냄새, 그리고 반짝이든 월든 호수와 그 안에 깃든 생명체. 소로우는 다시 깨어나고 그 깨어난 상태에서 계속 머물러 있는 법을 배웠다. 세계의 명문 대학인 하버드대를 나와 일상을 박차고 숲에 들어가 기거하는 생활이라니. 실패한 인생일 수도 남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을 수도 있었을 텐데. 버리지 않는 새벽을 한없이 기대함으로써 그리고 찬양하고 음미함으로써 그는 그렇게 깨어있고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루의 본질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최고의 예술이고 사소한 부분까지도 숭고하고 소중한 시간에 음미해볼 가치가 있도록 내 인생을 만들어볼 의무가 있다. 불복종과 거부로 시선을 돌렸던 국가와 제도와 정책, 그리고 불안정할 수밖에 없는 한계가 명확한 질서 안에서도 소로우는 현재에 집중했으며 숭고하고 소중한 시간을 자신에게 집중했다.
고전은 아침처럼 풍만했고 우아했다. 기껏해야 보잘것없이 현세에 머물러 지폐를 세고 셈을 하기 위해 손가락을 세던 나 자신이 초라해질 만큼. 그는 이미 그 경지를 뛰어넘은 상태. 와이프가 즐겨보는 <갯마을 차차차>의 홍반장이 왜 손에 <월든> 책을 들고 있었는지 이제는 좀 깨달은 것 같다. 홍반장의 상황에 대한 과도한 해석이자 주인공의 매력을 돋우기 위해 연출에 불과했겠지만 그 드라마 작가는 <월든>의 뜻을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책은 라면 끓여먹을 때나 받침대로 사용하던 내가. 어느새 헨리 데이비르 소로우의 <월든>을 읽고 있다. 책을 읽고 있던 나 자신이 너무도 이질감이 느껴졌던 것 사실이다. 바짝 손등에 닭살이 돋을 만큼. 4년을 넘어 지속된 내 작은 습관이 나를 성장시키는 것 같다. 새로운 세상이 보이고 한없이 달랐던 존재와 형상들이 어느덧 무형의 연결고리에 걸려 흐름이 되어 움직이는 느낌. 아직 이 느낌이 정확히 어떤 형태와 질감과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나와 완벽하게 달라진 것 같다.
코로나 백신 덕분에 책을 좀 읽었다. 바쁜 부서로 발령이 난 다음 정신없이 거치고 나니 어느새 10월. 날은 아직도 여름처럼 위장하고 있지만 엄연한 가을. 낙엽과 비가 떨어지는 소리도 들을 수 없는 만큼 바삐 보낸 날들 가운데. 주먹만 한 휴식과 우주만 한 의미를 부여한 책을 읽을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그 책이 <월든>과 <시민의 불복종>이어서 더 좋았다.
소로우는 결과적으로 강했다.
그리고 세상을 이겼다.
그 반증은 무지한 내가 그의 책을 읽었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