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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러나고, 배고, 삭히는 동안- 익어가는 마음

더덕주, 청귤주...그렇게 주모가 되어간다 ㅋ

by 레몬트리


친구가 부모님을 모시고 강원도 여행 중이라고 연락이 왔길래

농담으로 "술이나 담그게 더덕이나 좀 사다 줘!"라고 했다.

농담이라 기대도 안 했는데 돌아온 날 밤, 집 앞이라며 제법 큰 더덕을 담은 까만 비닐봉지를 주고 갔다.

술 담그는 걸 본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부모님이 술을 드시는 것도 본 적이 없는

그런 내가 직접 술을 담그겠다니 ㅋㅋㅋ


그다음 날, 필요한 재료들을 사고, 더덕을 닦았다.

찾아보니 구석구석 더덕에 붙은 흙이나 불순물을 깨끗하게 닦아내야만 한다고 한다.

하지만 또 너무 세게 닦다가 표면에 상처가 나고 벗겨지면 진액 같은 게 나와서 술이 뿌옇게 흐려지니 조심해야 한다고 모두가 입을 모아 말하네

칫솔과 빨대세척솔을 가지고 잔뿌리와 주름 사이사이까지 조심스레 닦고 또 닦고,

상처가 날까, 뿌리가 부러질까 노심초사하면서 헹구고 또 헹구다 보니

전복찜 만들 때 전복 닦는 수고는 저리 가라네 ㅎㅎㅎ

그리고 더덕표면의 물기를 건조한 후 술을 담그는 것이 좋다고 해서 그늘진 곳에 자리를 만들어 몇 시간 텀으로 골고루 돌려가며 말리길 꼬박 하루

그리고 술을 담을 병을 열탕소독하기까지


이렇게 번거로운 준비과정을 마치고 나니, 막상 술을 담그는 건 허무하리만치 금방이었다.

소독해 말린 병에 더덕과 담금주용 술을 담고 입구를 랩으로 씌워 밀봉하면 끝


이젠 기다림과 시간이 맛과 향을 만들어낼 차례일 터.

뚜껑까지 잘 밀봉해서 닫고 나니, 반년이나 지나야 마실 더덕주의 향이 벌써 기대된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나 보다.

생각해 보면 예전에 고모네 집, 할머니 집에 가면 뭐 그리 직접 담근 술이 많은지 온갖 항아리와 유리병이란 병은 다 뭔가가 담긴 채 집안 그늘진 곳곳에서 자리를 잡고 얼마나 지났을지 모를, 얼마나 남았을지 모를 숙성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정작 고모나 할머니께서 술을 좋아하셨던 것도 아니었는데, 그 많은 종류의 담가둔 술항아리, 병들은 어째서 해마다 가짓수가 늘어갔던 것일까.

게다가 아까워 정작 드시지도 않고 귀한 손님 올 때만 내어줄 정도로 그 술병들을 그토록 아끼셨을까.

직접 담그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아주 어렴풋이 알 것 같기도 하다.


뚜껑에 하나하나 날짜랑 이름을 붙여주었다 따뜻한 봄날 함께하자!



어쩌면 소중한 이를 떠올리곤 그 마음을 담듯

조심스럽게 씻고 다듬어

가장 깨끗한 유리병에 가장 맑은 술로

그리고 가장 애틋한 나의 마음까지 더해 만들어서겠지

두고두고 보고, 두고두고 함께하며, 두고두고 설레고 싶은

지금의 마음, 시간이 지나며 더욱 진해지고 깊어지길 바라며.


아니,

어쩌면 아끼는 이와 함께 할 먼 훗날의 어느 저녁을 상상하며,

술이 숙성되는 동안 그들의 무탈함과 평안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삼천배의 정성이나 새벽기도하는 간절함으로 술을 담근 것일지도.

그 어느 날 저녁 아끼는 술잔에 꼴꼴 꼴 소리를 내어 따르며,

이 술을 담그던 그때 나는 그런 마음이었노라

속삭이며 달콤하게 취할 그 밤을 기대했겠지.

지금의 마음을 기억하고 추억하며 웃을 수 있는,

아직은 오지 않았지만, 반드시 함께하고 싶은 그날을 염원하고 기다리며.


아니, 아니,

어쩌면 사랑하는 이를 감당해 내느라 힘들고 고된 마음을 어디에도 표할 길 없어

술을 담그기 위해 흙을 털어내고, 닦아내며 한숨도 쏟아내고

술병 속에 소주를 콸콸 부으며 그 소리 틈 사이에 내 울음소리를 숨기고

술병 속에 더덕을 퐁당 담가버리듯 그날의 애환과 서러움도 함께 담가

그리곤 꽁꽁 나오지 못하게 아무도 모르게 삭히고 삭힌 것일지도 모르겠다.

맑은 술이 숙성 뒤 만들어낸 그 영롱한 황금색은 어쩌면 그 삭힌 마음이 우려낸 것인지도.

돌이켜보면 씁쓸하고 못난 마음일지언정 그마저 버리고 싶지 않은 기억을 담아내며.



누구나의 사연은 제 각각이겠지만

담금주의 향과 맛이 남다른 건,



그렇게

흙냄새와 풀냄새, 그림자의 서늘한 공기와 유리사이로 올라오는 알코올향까지

오감으로 만지고 기억하며 담아둔 유리병 속에서

술이 익으며 더덕의 향이, 인삼의 향이, 매실의 향이 더욱 진하게 배듯.

온몸으로 온 신경으로 너를 기억하는

내 눈물과 한숨이 찐하게 배고, 내 간절함이 스며들고, 내 설렘과 애틋함이 우러나와

그야말로 달콤한 독주로 익어서겠지.

지난날의 설움과 설렘,

그리고 그 사이사이 잔뿌리처럼 튀어나오는 모든 감정이 뒤섞여

좁디좁지만 투명하기만 한 내 마음 같은 유리병 속에서

시간으로 가슴으로 삭히며 만들어 내는 눈물의 맛



그래서

그 정성스러운 담금주를 한잔 받아 들이켰을 때

향에 취하고, 맛에 취하고, 감정에 취하는 것 아니었을까.


한참 뒤늦게서야 알게 된 그 마음을 맛보고선,

독주임을 알지만 식도를 타고 향기까지 흘러들어 가는

그때 그 마음에, 지금 이 마음이 젖어

흐려지는 눈빛과 휘청이는 손끝으로

"한잔 더"를 외치며 밤을 지새우는 것 아닐까.



하지만, 사실

어떤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던 까만 밤

터벅터벅 무거운 발걸음을 겨우 끌어가며,

다 익지도 않은 술병 앞에서 한참을 노려보다, 기어코 성급한 마음으로 뚜껑을 열어

참을 수 없는 그리움 또는 견딜 수 없는 아픔

아니면 차마 잊을 수 없는 그 누군가를 향한 마음을

알코올로 소독하듯,

설익은 그 술이라도 가슴에 들이부으며

흐느끼다가 몸부림치다 大자로 뻗은 채 잠이 든 밤도 있었겠지.



그러라고 만든

취하라고 만든

잠시라도 시름을 내려놓으라 만든

그런 술 아니었던가








덧)

어떤 술도 그렇게 뚝딱 하고 만들어지는 것이 없고

모두 시간과 정성을 필요로 하네요

재료가 품고 있던 맛과 향을 다 우려내고, 계절을 보내고, 세월을 보내며

진해지고 깊어지겠지요

더덕주를 준비해 담그며, 또 담근 더덕주를 바라보다 보니, 글이 쓰고 싶어 졌어요 하하핫


덧)

더 큰 일은 더덕주를 담그고는 무슨 자신감이 생겨

이번엔 청귤청이랑 청귤주를 만들어 보겠다고

집에 청귤이 두 박스나 와있는데....

제가 아직 익지도 않은 더덕향에 그날 취했었나 봅니다....

어제 청귤 씻고, 마트 가서 병이랑 설탕 담금주만 사 오는데도 양팔이 떨어져 나갈 것 같......

왜 그랬을까....ㅋㅋㅋㅋㅋㅋ


하지만 몇 달 후엔 잘 익은 담금주 자랑하며 마셔볼게요 ㅋㅋㅋㅋ

금방 취할 거면서 말은 술꾼도시여자 같네요 ㅋㅋㅋㅋㅋ



덧)

예전에 우리 조상들은 술항아리에 좋은 이야기를 해주면 술맛이 좋아진다는 속설이 있을 정도로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하며 술을 담갔다고 합니다. 그러니 드라마나 영화에서 흰머리 지긋한 아저씨들이 술병에 먼지 앉을까 정성스레 닦아주던 모습은 진심이었던 것 같아요

저도 고운 마음으로만 지켜봐 주고 쓰다듬어주면서 그날을 기다려보겠습니다!!


하... 한숨 쉬지 말고 좋은 말만 해주면서 썰어보자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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