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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성 Dec 10. 2023

낡은 장애 서사극 - 뮤지컬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

2023년에 1950년 원작을 가져올 거였다면 더 고민했어야


장애를 다룬 서사극의 경향성     

지금까지 장애나 장애인을 다룬 작품을 많이 보진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장애나 장애인을 다룸에 있어서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무척이나 많기 때문에 작품 수 자체가 많지 않다. 또한 솔직히 말하자면 필자의 관심이 거기까지 미치지 못하기도 했다. 필자가 봤던 장애나 장애인을 다룬 작품은 두 작품이었는데, 두 작품 모두 좋은 기억으로 남지는 않았다. 기승전결이 제대로 짜여 있지 않은 상태에서 장애인의 불행만이 강조된 극이었기 때문이었다.


장애인을 다룸에 있어서 예술계는 장애인의 불행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여왔다. 위에서 말했던 대로 기승전결이 매끄럽지 않은 상태에서 불행만 덜렁 주어지는 형식이다. 그 불행 안에서 장애는 불행을 극대화하는 장치로 쓰인다. 장애는 장애인을 불행 앞에 ‘무기력하게’ 만든다.


그러나 2023년의 지금에서 장애에 대한 사회의 시선은 빠르게 바뀌고 있다. 사회가 얼마나 준비되어 있는지에 따라 장애가 장애가 아니게 될 수도 있고, 그 사실을 비장애인들 또한 서서히 깨달아가고 있다. 따라서 장애=불행으로 치환되어 왔던 과거를 벗어나 장애인의 삶에도 다양한 색채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 또한 깨달아가고 있다.


예술계는 이런 사회적 시선의 변화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이를 공연의 내외적으로 담아내고 있다. 그러나 뮤지컬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는 이런 시대적 흐름에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시선의 변화를 전혀 따라가지 못한 작품이다.          



장애를 긍정하는 것에 대한 부정적 시선          

이 극의 구도는 명확하다. 까를로스와 후아나는 장애를 긍정하고, 이그나시오는 장애를 부정한다. 까를로스와 후아나는 장애인이지만 비장애인들과 같은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들의 삶을 동경하지 않지만, 이그나시오는 비장애인들과 다른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며 그들의 삶을 동경한다.


이 작품의 첫 번째 문제는 장애를 긍정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시선을 씌운다는 것이다. 까를로스와 후아나로 대표되는 장애를 긍정하고 그들만의 세상에서 안정적으로 살아가는 이들을 ‘진실을 외면하는 이들’로 그린다. 이는 염세주의고 비관주의적인 이그나시오의 관점이면서 극 자체가 학생들을 바라보는 관점이기도 하다.



특히 이 작품에서는 도냐 페피따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는 까를로스와 후아나를 비롯한 학생들에게 철의 정신을 가르치며 장애를 긍정하도록 이끈다. 하지만 이렇게 이끄는 것이 마치 종교 집단의 교주가 광신도들을 가르치는 것처럼 묘사된다. 전형적인 가스라이팅의 모습이다. 도냐 페피따는 매우 강압적이고 카리스마 있다.  그가 후아나에게 지시를 내리고, “우리는 ‘장님’이 아니다”, “우리는 비장애인들과 다르지 않다”는 등의 내용을 읊는 학생들의 모습은 기도문을 읊는 교인들 같다. 관객들은 이런 모습을 보면서 도냐 페피따와 장애를 긍정하는 학생들에게 부정적 감정을 품게 된다. 물론 부정적 감정에는 여러 감정이 포함된다. 걱정, 슬픔, 안타까움... 그러나 장애를 긍정하는 것에 대해 관객들이 이러한 감정을 품는 것이 과연 옳은가? 장애를 긍정하는 것을 부정적인 시선을 씌우는 것에서부터 이 작품은 단단히 잘못했다.          



단 하나의 소망, 앞을 보는 것?          

장애를 부정하는 이그나시오는 앞을 보는 것을 갈망한다. 이그나시오의 이런 바람은 물결처럼 퍼져 다른 학생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학생들이 원하는 단 하나의 소망으로 앞을 보는 것을 설정한 것은 시각장애인을 무척이나 납작하게 본 결과다. 시각장애인이라고 해서 모든 바람이 제거되고 시각을 향한 바람만이 남는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도 다양한 마음이 있다. 시각장애인을 이렇게만 바라본 것은 철저히 비장애인의 시선에서 바라본 것이다.


또한 이 작품이 이러한 관점, 즉, 빛을 원하고 앞을 보는 것에 대한 갈망에 방점을 찍고 있고, 이가 주제로 이해된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이 작품의 가장 인상적인 장면인 결말은 장애를 긍정하던 최후의 2인이었던 학생, 까를로스가 빛을 좇는 장면이다. 까를로스는 이그나시오를 죽이면서까지 장애를 긍정하는 자신의 관점을 관철시키려 했지만, 끝내 이그나시오의 생각에 물들고 만다. 그는 앞을 보기를 원한다. 결국 이 작품은 비장애인을 꿈꾸는 장애인을 그리며 이야기의 마무리를 짓고, 관객들은 이를 주제로 이해하게 된다.          



이 작품이 말하고자 했던 것          

결국 중요한 것은 작품의 주제다. 위에서 말했듯 1차적으로 바라봤을 때 ‘시각장애인의 빛에 대한 갈망’이자 ‘비장애인을 꿈꾸는 장애인’을 말하고자 했다면 그것은 시대의 흐름에 따르지 못한 것이다. 2차적으로 바라봤을 때 만약 이 작품이 비유와 상징으로 이루어진 작품이라면 그 또한 옳지 못하다. 시각장애인을 체제에 순응하고 진실을 무시하려는 자로 그린 것이기 때문에.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이 작품은 스페인에서 고전으로 꼽히는 명작이라고. 하지만 작품은 시대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 출간되었을 당시에는 최고의 작품으로 꼽혔다가도 시간이 흐르면서 부정적인 부분이 드러나고 비판받는 지점이 생겨난다. 특히 소수자나 약자를 다룬 작품의 경우에 그러하다.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등을 다룬 작품의 경우에는 시선이 빠르게 변화하기 때문에 작품의 평가 또한 달라질 수 있다.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는 명백히 그런 작품 중 하나다.

그럼 그런 작품은 현대에 올려서는 안 되는가? 그렇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각색이라는 방법이 존재하는 것이다. 각색을 통해 현대에 소수자를 바라보는 시선을 반영할 수 있다. 그러나 2023년에 한국에 올라온 뮤지컬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는 이를 전혀 반영하지 못했다.          


장애라는 소재를 다룰 때 작품이 갖춰야 할 것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소수자를 다룰 때는 조심할 필요가 있다. 제일 먼저 신경 써야 할 것은 당사자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사자가 불편해하지 않는 것, 그것이 언제나 우선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서 최근 화두가 된 것은 연기라는 행위를 통해 ‘장애를 ‘따라 하는’ 행위가 옳은가’다. 비장애인이 장애인을 연기하는 경우 특정 장애를 가진 장애인이 ‘일반적으로’ 보이는 신체적 특징이나 행위를 따라 하는 경우가 생기고, 이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는 이들이 늘었다.


이 질문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존재할 수 있겠지만 필자는 장애인이 직접 연기하는 경우가 당연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연기한 정은혜 배우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여러 여건으로 인해 상황이 여의치 않은 경우에는 작품이 장애와 장애인에 대해 통찰을 전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만이 비장애인이 장애인 연기를 해서 만들어지는 불편함을 감수하는 이유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작품이 과연 그러했는가를 생각했을 때 내 답변은 아니오다. 이 작품에서도 몇몇 배우들이 시각 장애인들이 ‘일반적으로’ 보이는 신체적 특징을 따라 하고는 했다. 그러나 위에서 설명했던 것처럼 그렇게 따라 해놓고서는 결국 전달한 주제는 비장애인의 삶을 꿈꾸는 장애인이었다.      


여성 캐릭터를 다루는 방식     


이 작품이 낡았다는 것은 주요한 소재인 장애를 다룰 때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여성 캐릭터를 다룰 때도 드러나는데, 주요 인물 중 하나인 후아나와 엘리사가 그러하다. 후아나의 경우에는 까를로스의 애인으로, 이그나시오를 변화시킬 수 있는 선한 영향력을 믿는 인물이었지만 오히려 까를로스에게 흔들리는 인물이다. 엘리사는 이그나시오의 룸메이트가 되는 미겔린의 애인으로, 미겔린이 이그나시오의 생각에 흔들리면서 가장 괴로워한다.



위의 설명에서 잘 드러나지만 후아나를 설명하는 가장 쉬운 방식은 ‘까를로스의 애인’이라는 것이고, 엘리사 또한 ‘미겔린의 애인’이라는 것이다. 여성 캐릭터의 주요한 캐릭터 설명이 남성 캐릭터의 애인으로 표현된다는 것인 여성 캐릭터가 주체적으로 그려지지 못한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준다.


특히 후아나의 경우에는 까를로스와 이그나시오 사이에서 마치 전리품처럼 오고 간다. 학생들 사이에서 생각의 우위를 점한 사람이 후아나를 ‘가지는’ 식이다. 게다가 그 방식이 ‘키스’로 드러나는데, 여성의 성적 자기 결정권은 이 작품에서 그다지 존중받지 못한다. 후아나는 이그나시오에게 원치 않는 키스를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반항하지 않는다. 그리고는 카를로스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엘리사는 후아나를 비난한다. 강제로 키스당한 사실이 명백하지만 죄책감을 느끼고 비난을 감당해야 하는 여성 캐릭터라니. 시대에 뒤떨어져도 너무 뒤떨어진다.


엘리사는 장애를 긍정하는 자신의 생각이 뚜렷하니 상황이 나은 것 같지만 이그나시오와 키스한 후아나를 비난하고 이 사실을 까를로스에게 가서 전달하는 역할을 맡는다. 전형적인 ‘여적여’(‘여자의 적은 여자’의 줄임말)를 보여주는 캐릭터다. 결국 후아나와 엘리사 모두 시대에 뒤떨어지는 인물인 건 마찬가지다.       

   

시대에 뒤떨어진 서사극          

결론은 뮤지컬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가 시대에 뒤떨어진 서사극이라는 것이다. 장애인을 다룸에 있어서도, 여성을 다룸에 있어서도 현대적 시선을 전혀 따라가지 못했다.  이 공연에는 분명히 대본 외에 매력적인 요소들이 존재한다. 배우들의 열연이 대표적인데, 위에서 말했듯 까를로스 역이 장애를 긍정하고 자신의 삶에 만족하다 이그나시오의 생각에 물들어 빛을 갈망하게 되는 장면은 단언컨대 이 공연의 클라이맥스다. 그 장면에서 배우들이 부르는 노래 또한 치열하고 열정적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뮤지컬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의 창작진이 1950년의 원작을 꺼내오면서까지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이었든 간에, 지금의 2023년에는 맞지 않았다. 현대에 맞는 작품을 하고 싶었다면 창작진들은 조금 더 치열하게 작품을 고민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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