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남성인 의사 존 왓슨이 아시아계 여성인 탐정 조안 왓슨으로
(※ 글의 특성상, 드라마 <엘리멘트리>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나는 수많은 장르 중 추리를 가장 좋아한다. 책, 드라마, 영화 모두. 여러 캐릭터를 사랑하지만 가장 최애하는 캐릭터는 셜록 홈즈다. 소설도 흥미롭게 봤지만, 나의 셜록 홈즈 사랑을 더욱 키운 건 영국 드라마 <Sherlock>였다. 물론 시즌 4에서 이 사랑은 꺼져버렸지만, 뭐 아무튼.
넷플릭스를 추천받고 이용권을 끊은 지 얼마 안 된 어느 날, 나는 넷플릭스에서 새로운 셜록 홈즈를 발견했다. '엘리멘트리(Elementary)'라는 제목의 미국 드라마였는데, 셜록 홈즈가 뉴욕에서 활동한다는 설정에서 시작하는 작품이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존 왓슨이 여자였다(!) 게다가 아시아계이기까지. 이 드라마에서의 존 왓슨 설정은 너무나 흥미로웠고, 마약 중독자가 된 셜록 홈즈의 이야기도 매력적이었다. 나는 그렇게 새로운 최애 드라마를 발견했고, 한 달만에 시즌 5까지(한 시즌마다 20회)를 모두 몰아서 봤다!
현대에는 고전을 리메이크한 수많은 작품들이 있다. 나는 단언컨대, 이 드라마가 셜록 홈즈라는 고전을 현대적인 시각으로 가장 잘 바꿔놓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셜록 홈즈가 쓰였던 시기는 여성이 중심 캐릭터에 서기 어려웠던 때였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여성 캐릭터는 중심 역할을 하지 못했고, 셜록 홈즈도 '여혐'적인 사고를 가진 인물로 묘사되었다.(그는 여성이 이성을 흐리게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으며, 존 왓슨이 그를 '여성 혐오자'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래도 희망이 있다면 '아이린 애들러'라는 여성 인물이 셜록 홈즈가 유일하게 특별히 여기는 인물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아이린 애들러는 홈즈를 속이는 데 성공한 인물이었고, 셜록 홈즈가 생각했을 때 자신이 동등하게 바라볼 수 있는 유일한 여자였기 때문에 'a woman'이 아닌 'the woman'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 외 여성들은 그에게 'a woman'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 드라마에서는 셜록 홈즈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사람이자 셜록 홈즈의 조력자인 존 왓슨이 여성으로 등장한다. 이름도 살짝 바뀐 '조안 왓슨'이다. 그는 마약 중독자의 회복 동반자(sober companion, 마약 중독자와 일정기간 함께 지내며 재활을 돕는 직업)로, 셜록 홈즈의 아버지에 의해 고용되어 셜록의 회복 동반자가 된다. 그러나 그와 함께 하는 동안 자신이 셜록과 함께 사건을 추리하는 과정에서 행복을 느낀다는 사실을 깨닫고 회복 동반자가 아닌, 동료로 남게 된다.
여기서 더 좋은 포인트는, 조안 왓슨이 셜록 홈즈와 함께 추리를 한다는 것이다! 원작에서의 존 왓슨은 관찰에만 집중하지만, 조안 왓슨은 그에게서 추리 방법을 전수받고 '탐정'이 된다. 게다가, 천재이자 사회적 능력이 부족한 셜록이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부분(관계, 감정 등)을 생각할 줄 알고, 의사였던 경력을 바탕으로 의학 지식을 통해 사건 해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한다. 또한 자신의 행복을 위해 과감하게 의사, 회복 동반자로서의 경력을 포기하고 자문 탐정이 되는 과정 또한 무척이나 주체적이고 자립적이다.
여기서 하나 덧붙이자면, 이 드라마에서 여성 캐릭터가 얼마나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는지 보여주는 사례가 또 있다. 그러나 이건 극의 전개상 아주 중요한 내용이므로 밝히지 않겠다. 나는 이런 내용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나의 상상력이 얼마나 기존의 개념에 갇혀있었는지를 깨닫는 계기가 될 정도였다. 이걸 쓰면서도 걱정된다. 후에 이 드라마를 볼 단 한 사람의 충격이라도 줄어들게 만들까 봐. 하지만 얘길 안 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진짜 센세이셔널하기 때문에(!) 내가 이 드라마를 사랑하게 된 주요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한국에서는 추리 드라마도 적지만 그런 드라마가 나와도 여성 캐릭터 자체가 문제 해결을 적극적으로 이끌어나가는 편은 아니다. A와 B라는 남성 인물이 문제 해결을 주도적으로 하면, C라는 여성 인물이 돕는 정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탓에 가끔씩은 민폐 캐릭터로 전락하기도 할 정도다. 그러나 드라마 <엘리멘트리>는 다르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시즌 6에서 조안 왓슨의 '여성성'이 갑자기 부각된다는 것이다. 사실 셜록이 인지하지 못하는 부분이지만 조안 왓슨이 깨닫게 해주는 것들이 소위 말하는, '여성은 남성보다 더 섬세하다'라는 생각과 결부되는 것이다. 그러나 셜록이 워낙 사회적 능력이 떨어지는 것으로 묘사되는 만큼 '여성성'을 표현하려고 했다고는 생각이 들지 않는 정도였다.
그런데 갑자기 시즌 6에서는(나는 현재 엘리멘트리 시즌 6의 17화까지 본 상태다. 그 후의 내용이 정말 궁금하지만 한국에서는 현재 볼 수가 없어 그 뒷 내용은 알지 못한다.) 조안 왓슨이 아이를 입양하려 한다. 그의 상담을 맡았던 상담사가 조안 왓슨이 '모성애'를 셜록을 통해 풀고 있다고 생각한 내용을 왓슨이 우연히 알게 되었기 때문. 이 부분이 굉장히 뜬금없이 등장한다.
게다가 이전 시즌에서 조안이 묘사되던 방식과는 결이 달라 더욱 아쉽다. 조안 스스로가 아이를 갖고 싶다고 생각했다기보다는 상담사의 영향을 받은 것이 너무나 명백해 보이기 때문이다. 셜록과 왓슨의 관계에서 새로운 인물을 추가시키고 싶었던 모양인데, 제발 기존의 '여성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흐름으로 가지 않기를 바란다. 만약 그럴 거라면 조안 스스로가 선택하는 모습을 더 부각해주기를.
시즌 6의 아쉬움에도 조안 왓슨의 설정은 여전히 흥미롭다. 여성이라는 점도 인상 깊지만, 그가 '동양인'이라는 것도 매력적이다. 서양권에서 인종 차별을 논할 때, 흔히 '동양인'은 피라미드의 제일 아래에 있다고들 한다.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은 오랜 시간 동안 문제제기가 많이 이뤄지면서 조심스러워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지만, 동양인에 대해서는 '무지'를 바탕으로 심각한 인종차별이 아무렇지 않게 이뤄진다.
내가 스페인을 방문했을 때, 수도 없이 들려왔던 'china'(치나)라는 말과 지나가던 나를 보며 알 수 없는 말들을 마구 내뱉던 남성들을 기억한다. 더불어 미국에서 현재 지내고 있는 친구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미국이 가지고 있는 '인종의 용광로'의 이미지가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생각할 때가 많다. 대중문화에서도 마찬가지다. 할리우드의 동양인 차별은 공공연하게 이뤄지고 있는데, 얼마 전 <신비한 동물들과 그린델왈드의 범죄>에 출연한 한국 배우인 수현이 인터뷰 중에 겪은 인종 차별이 한국에서도 화제가 된 바 있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 남성 인물을 아시아계 여성 인물로 바꿨다는 것은 무척이나 놀랍다. 게다가 이 드라마의 시즌 1이 방영된 시기가 2012년이라는 걸 고려했을 때는 더더욱.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가 나오는 드라마나 영화를 소개해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바로 떠오른 드라마가 <엘리멘트리>였다. 추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그리고 주체적인 여성 인물을 보고 싶다면 이 드라마를 제일 먼저 추천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