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알못이 시 감상을 써 나가는 이유
입시 : 입에 물려버린 시, 이제는 다른 걸 풀고 싶다
국문학과생이라고 다 시를 좋아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읽어야만 하는' 시에 무뎌진 사람이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 다른 사람 이야기가 아니라 내 얘기다. 입시 공부의 일환으로 읽어야 했던 시는 이해는 잘 되나 마음으로 와 닿지는 않았다. 고전시가에 보이는 이별의 정한은 그런 사랑 안 해본 사람에게는 질척임이고, 자연예찬은 공감하기엔 생활환경이 너무나 다르지 않나. 그렇다고 전공 공부 때문에 보았던 그 반대 극단의 현대시들은 시인과 일부들만 즐길 수 있는 난해한 코드 같아서 거부감이 들었다. 내가 보았던 시의 세계가 얼마나 좁은가, 고백한다. 그래요, 저 시알못입니다.
그러나 시알못이라도 지금은 시를 찾아 읽기를 즐기고 있다. 군 복무 시절 김기택 시집 《껌》을 읽고서야 알았다. 시 장르 자체가 너무나도 어렵거나 따분한 장르인 것이 아니라, 제도 교육권이 내미는 시 중에서 내게 맞는 시를 만나지 못했을 뿐이라는 것을. 시는 작은 지면(紙面)에 불과하지만, 잘 만난 시는 내 마음을 붙일 토양을 내어준다. 말할 수는 없지만 평소 느끼고 있던 감각과 정서를 언어와 사유의 영역으로 끄집어내 주니 말이다.
이젠 스스로 찾아간 시의 공간에서 지긋이 내 마음의 실마리를 찾는다.
시를 읽으며 궁극적으로 풀어야 할 것은 시에 담긴 전형적인 상징도, 고급 독자만 알만한 난해한 코드도 아닌, 결국 시에 엉킨 '나'라는 실타래란 생각에서다. 일상을, 그래서 타인과 세계를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
재갈이 되어 물린 시, 고인 가슴의 가래처럼 뱉는다
이상하다, 시 인용에 감상이 덧붙인 글은 평론가의 블로그나 입시 해설이 아니라면 기대하기 힘들다. 특정 시를 검색하면 필사한 시만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무리 시가 어려운 장르라지만 필사를 하며 사색을 하기 마련일 텐데, 그 감상을 쉽사리 들려주지 않는다. 짧은 느낌조차 말하지 않는 이유는, 시에 대해 말하려고 하면 누군가 ―그러니까 알아서― 입에 재갈을 물린 건 아닐까.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가지, 말하지 말걸.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 이래 해석의 주권이 독자에게 있다는 담론이 널리 퍼졌지만, 내게는 해당이 없다. 수용 미학을 적용하는 것도 잘 훈련된 독서 공동체의 이야기다. 미숙한 독자는 시를 읽으며 단편적인 교훈과 주제를 찾는데 그친다는 걸 스스로도 안다. 너무나도 많은 해석의 자유가 오히려 평론의 필요성을 깨닫게 해 줄 뿐이었다.
생각해보라, 난해하고 실험적인 시에 평론가들이 '감각의 동지' '취향의 공동체'의 운운하며 '우리'를 호명할 때 과연 단박에 '우리'에 속한 독자였는가. 독자들이 평론가에게 시집에 대한 소개를 받는 이면에, 그 느낌의 공동체에 가입하기 위해서는 평론가의 소개장이 필요했던 것은 아니었는지.
그러나 난해한 시까지 척척 읽어내지 못한다고 해서 비고급 독자가 공개 게시판에 감상을 적지 못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 해석의 질을 따지기엔 시 감상을 나누는 사람들의 양이 절대적으로 줄지 않았는가. 평론되지 못한 좋은 시들도 많다.
평론가의 무기가 공들인 공부라면, 비고급 독자의 용기는 무모한 무지다.
무정부주의적인 해석의 자유를 누리겠다는 것이 아니라, 잘 모르기 때문에 일단 애쓴 답안을 내겠다는 것이다. 시인의 성향과 외부 텍스트를 끌어와 시에 딱 맞는 해석을 하지는 못하더라도, 자신의 삶의 한 장면을 떠올려 감상하기에 보편으로 다가가는 다양성에 기여할 수 있지 않을까.
기침을 하자
젊은 詩人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 김수영, 「눈」 (1956) 부분
무지하기 때문에 용기 있게 김수영의 「눈」을 단장취의(斷章取義) 해본다.
순결한 해설이 가득한 눈밭을 바라보며
내 몸에서 나온 더러운 감상을 덧붙이겠다고,
재갈이었던 시를 마음껏 뱉어 내자고 말한다.
젊은 시알못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