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화, 「물고기의 단잠」
풍선들은 천장에 닿으면서
축하의 말을 늘어뜨린다
축하의 국수를 먹고
국숫발을 건져 올리다가
조금 흘리면 정말 축하하는 것 같다
기분도 이리저리 튀고 물이 든다
그러다가 사라지는 걸까
녹는 걸까
물고기는 축하를 어떻게 하나
물방울처럼 매다나
안부 전화를 오전에 하고
오후의 해가 떨어지고
거짓말처럼 안심한다
골목길에서 지하철에서 나의 하루가
갑자기 쏟아질 때가 있다
주워 담기 전에 밟힐 때가 있다
지붕을 악기 삼아 쏟아지는 우박이
어디선가 사람을 뚫을 것 같다
관통당하는 자의 투명한 기분을 알 것도 같다
풍선 속에 또 하나의 풍선이 있고
봉투 속의 돈을 꼭 두 번씩 세어본다
나의 감정을 정확히 전달하는 일이 기쁘다
아직 살아 있으니 더 살고
더 살고 더 살고
물고기는 잠을 어떻게 자나
물고기의 방식으로 어떻게 눈을 감나
― 이근화 시집 『차가운 잠』 (2012), 문학과지성사
진심으로 축하해 주고 싶다.
축하말이 아니라 어느새 간절해진 내 바람이다. 동창·동기들이 취업했다는 좋은 소식들을 건넬 때 표정 관리를 하기 시작했다. 떨림 없이 광대를 올리고 애써 눈 밑 애교살을 드러내는 내 모습. 이 모습을 자각하는 순간, 내 축하 인사를 상대방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저 불현듯 마음속에 스미는 비루한 감정들을 수습하느라 남몰래 곤혹스럽다. 왠지 모르게 허한 이 감정은 뭐지, 어디에서 오는 건가, 내가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나….
정신이 번뜩 든다. 자기 연민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닌데, 새해처럼 '더 나은 새로운 내가 되자'라고 다짐하는데,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1) 시대가 필요로 하는 인재상은 알겠는데 내가 진정 원하는 삶은 아니다.
2) 그렇다고 내가 진정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뚜렷하게 아는 것도 아니라서 말로 표현을 못하겠다.
3) 새로운 다짐은 예전에도 했다. 매번 새로운 다짐을 했어도 또 다른 새로움을 필요로 하는 나를 바꾸지 못했다면, 내게 필요한 건 자잘한 행동을 바꾸는 새로움이 아니라는 뜻이다.
적어 놓고 보니 축하하며 느끼는 허한 감정은 애초에 불안에서 시작된 것 같다. 내가 원하는 내가 되지 못해서 오는, 내가 누구인지 몰라서 오는, 내가 왜 사는지 정립하지 못해서 오는 그 모든 불안 말이다.
"축하"라고 말해 보니 정말 축하하는 것 같다.
미니콘 폭죽에 달린 끈을 잡아당기듯 혀와 횡격막을 당기고[추˺], 입을 벌리면[카] 내 입에서 색색의 종이 실뭉치가 나오는 건 아닌지. 축하연 자리가 정말 즐거울 때는 [카]와 함께 환호성을 내지르기 바쁘다. 돈을 내는 자리였다면 봉투 속에 돈을 담는 일이 대수일까.
남을 축하해줄 여유가 사라지면서 [카]의 환호성에 가린 [추˺]의 긴장이 느껴진다.
바닥으로 가라앉을 때 차오르는 날숨의 압력. 그 날숨에 얼마나 많은 무게추가 달려 있나, 천장에 닿은 헬륨 풍선은 얼마나 무겁게 차오를 수 있을까.
정수기 생수통 안에서 울컥 올라가는 공기 방울과 동시에 뭉개지는 소리들.
"관통당하는 자의 투명한 기분"을 나는 그렇게 느낀다. 그 느낌만으로 "오후의 해가 떨어지고 / 거짓말처럼 안심"하며, "봉투 속의 돈을 꼭 두 번씩 세어보는 일"이 기쁘게 느껴진다는 의미 맥락을 오롯이 해석해야 한다는 강박이 사라진다. 시의 화자가 안심을 거짓말처럼 느끼고, 겨우 봉투 속의 돈을 세며 감정을 정확히 전달했다며 기뻐하는 상황이 어딘지 아리다. 안심과 기쁨이란 말에 '거짓말처럼' 진실과 거짓이 뒤섞인 것 같아서다.
"국숫발을 건져 올리다가 / 조금 흘리면 정말 축하하는 것 같다"는 말도 무리에서 갓 소외될 때 겪을 떨림에서 우러나온 것 같다. "축하의 국수를 먹"어야 할 자리에서 "그러다가 사라지는 걸까 / 녹는 걸까"라고 되묻는 경험이 아리다.
흘려 버린 국숫발은 풍선줄처럼 "축하의 말을 늘어 뜨"리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축하의 자리에 섞이지 못하고 쏟아져 나온 내 기분과도 같다.
모두 끝나면 사라지고, 녹고, 공허해진다.
시지프스가 꾸는 물고기의 단잠
열심히 산 것 같은데, 학교든 직장이든 주어진 할 일은 참 열심히 했는데. 매달려온 과제가 끝나면 허무해질 때가 있다. 끼니를 때우듯 사는 느낌이 들어 어떤 일을 해도 무덤덤해진다. 하지만 나는 왜 오늘도 밥을 먹고 있나. "바람이 분다! … 살아야겠다!(폴 발레리)"가 아니라 '배가 고프다! … 살아야겠다'다. "아직 살아 있으니 더 살고 / 더 살고 더 살고", 산 정상까지 반복해서 돌을 의미 없이 굴리는 형벌을 받은 시지프스가 여기 있다.
인간의 삶에 방향과 목적, 한 마디로 '가치'가 없다는 일은 얼마나 큰 고통인가.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자신 있게 말 못 하겠고, 무엇이 되겠다는 꿈도 못 찾은 상태에서 어떻게 내 삶의 주인이 되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수 있을까, 막막하다. 고민하던 차에 눈에 띄었던 것은 카뮈의 통찰이었다.
자기 생에 어떤 목표를 그리는 대로, 그는 이루어야 할 목적의 요구에 따르고, 그리하여 스스로 자유의 노예가 되었다. 그 결과 나는 가족의 아버지(혹은 기술자, 민족의 지도자, 또는 우체국 수습직원)로밖에는 행동할 수 없게 되리라. …
보다 분명하게 말하자면, 나의 미래에 대하여 희망을 가짐으로써, 나 자신만의 진리가 존재하고 창조하는 방식에 깊은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그 끝으로 내 삶에 질서를 부여하고 그리하여 삶에 의미가 있음을 시인하고 입증함으로써 나는 스스로 울타리를 만들고 그 속에다가 내 삶을 가두게 되는 것이다.
― 알베르 카뮈, 『시지프스 신화』, 〈부조리의 추론〉에서
왜 삶의 의미를 장래에 가치 있는 어떤 사람이 '되는' 것에서만 찾고, 왜 될 것이라 믿어야만 했나.
초등학생 시절부터 '장래희망' '꿈'이라며 진로 목표만을 말할 때, 의도치 않게 그것을 삶의 의미의 전부로 생각했던 것 같다. 이러한 상태에서 자신에 대한 탐구를 그친다면, 정말 카뮈의 말대로 현재의 자신을 옥죄는 이유를 만든 것에 지나지 않겠다. '가치 있는'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인지, 그저 남들에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서 택한 것인지 구분하기 얼마나 어려운가. 또한 불분명한 미래와 자신의 마음을 두고 하나의 분명한 희망을 결론짓는다면 순간순간 생겨나는 다른 삶의 기회와 과정을 지나칠 수 있지 않을까.
〈물고기의 단잠〉을 읽어도, 카뮈의 논의를 살펴도 미래의 불안함을 떨칠 해법은 찾을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해진 사실이 있다. 삶의 목표와 의미를 급하게 세우는 것보다 '계속 이렇게 살아도 될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 스스로 물을 때 나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마주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이 심리적인 위안에 그치지 않으려면 조급하지 않되 또 지치지 않고 나 자신을 실험해야 할 것 같다. 허무하게도 결론은 "더 살고 더 살고" 살아가면서 찾아갈 수밖에. 삶의 의미를 찾는 과정이 삶의 의미인가?
나는 물고기의 단잠을 잔다.
나 자신과 삶의 의미에 대한 진리를 찾지 못한 채,
불안함에 이런저런 가설을 세운다.
눈을 감아도 눈동자는 무지갯빛으로 터지는 무수한 꿈을 집요하게 보고 있다.
* 최근에 이근화 시인의 산문집 『고독할 권리』(현대문학)이 새로 나왔습니다.
이전 산문집 『쓰면서 이야기하는 사람』에서 산문도 시처럼 쓰시는 솜씨가 부러웠는데,
새로운 산문집은 또 어떨까 궁금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