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하연 Feb 08. 2019

여유에 관하여

계획형 인간

한 해의 시작에서 꼭 필요한 한 가지는 다이어리다. 다이어리는 너무나도 개인적인 공간이어서 부끄러운 일들을 고백할 수도 있고, 말도 안 되는 상상과 어쩌면 좀 말이 되는 상상을 늘어놓을 수도 있다. 또 정성스러운 헛소리를 리얼하게 써도 웬만하면 공개될 일이 없다. 종종 감상에 젖곤 하는 수험생에게 딱 맞는 대나무숲이다.

 

사실 그보다 수험생이 다이어리가 필요한 이유는 월간, 주간, 일간 플래너가 있기 때문이다. 일의 우선순위를 따져 배열하는 것이 쉽고, 열심히 살아낸 하루를 증명해 보일 수도 있다. 그렇다. 나는 계획을 세우고 이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기쁨을 느껴왔다. 실제로 다시 펼쳐보는 일은 거의 없겠으나, 빽빽이 적힌 일련의 계획과 이를 해결했던 나의 지난날이 앞으로도 이렇게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위로나 용기 따위를 주는 것이다.

 

이런 내게 휴식이나 여유란, 계획의 일부와도 같다. 특히 수험 생활 중에 휴식은 계획만큼이나 효율이 필요하다. 남들보다 뭐든 조금 늦은 내가 남들만큼의 휴식을 가져도 되는 걸까? 어떻게 쉬어야 잘 쉬는 걸까? 여유는 이렇듯 협상의 연속이고 노력이다. 그러니 내가 선택한 여유에는 수식어가 붙는다. ‘재충전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여유’, ‘노력에 대한 보상으로서의 여유’. 빡빡한 수험생의 하루 플랜 속에 여유를 집어넣으려면 스스로를 설득하기 위한 그럴싸한 설명이 필요한 것이다.

 

계획하지 말고, 노력하지 말고

이제까지 일상과 휴식을 잘 통제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여유를 미루어 가며 친 시험은 더 나은 결과를 낳지 못했고, 쉴까 말까를 고민하며 시간만 버렸다는 것을 확인했다. 휴식에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었는데. 스스로를 괴롭히며 미뤄온 휴식이 되려 나를 갉아먹고 있었을지 모른다.

 

노력은 배신할 수도 있고, 노력이 결실에 대해 갖는 책임이 없다는 것도 인정한다. 여전히 노력을 대신할 뾰족한 수는 없지만, 그래도 잠시 멈추어 보는 건 괜찮지 않을까?

 

쉬어본 사람이 잘 쉰다니까, 잘 쉬는 법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쉬어보는 것이 필요하다. 잘 쉬는 방법부터 고민하지 말고, 휴식을 불안해하지 말고, 내게 행복을 주는 일이 무엇인지부터 가만히 고민해보기로 한다.

 

소확행 하나, 공간이 주는 여유

계획형 인간인 나도 계획과 노력 없이 즐기는 여유가 있으니, 그것은 산책이다. 바람이 선선하고, 햇살이 따뜻한 날에는 휴식의 효율도 잊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사는 와우산로 3길은 여유와 낭만을 즐기기에 아주 탁월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와우산로 3길은 개성 있는 카페와 예술가들의 작업실이 많고, 한편으로 고급 미용실과 오랜 이발관이 공존하는, 그러나 이 모습이 어색하지 않은 곳이다. 이 공간에 꼭 어울리는 청년들이 늘 거리에 많고, 골목들은 많은 이들의 음성으로 채워진다.

 

잠시 독서실을 벗어나 골목을 따라 걸으며 좋아하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신다. 운이 좋으면 잠깐 사장님과 수다를 떨 수도 있다. 또, 기분이 영 아닐 땐 잠깐 꽃집에 들러 꽃을 사는 필요 없는 소비도 한다. 잘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이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 삶의 의욕을 다시 느끼게 한다.

 

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이 느껴지다니, 소확행 목록을 만들어볼까 보다. 그렇지만 여전히 나는 휴식이 주는 행복보다 노력을 약간 더 믿는다. 노력이 변화를 가져다줄 거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앞으로도 다이어리는 내 인생을 함께 할 것이다. 그러나 더 이상 휴식이 주는 죄책감에 지배당하지는 않겠다. ‘여유에 수식어를 붙이지 말아야지’, ‘휴식을 고민하지 말아야지’. 그래도 아직은 연습이 필요하다.


2019. 01. 15

매거진의 이전글 1차 합격자 명단에 없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