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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선규 Dec 17. 2019

미신도 때로는

비보풍수

미신도 때로는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저는 친구들의 가내 행사(家內行事)에 참견할 기회가 주어지면 꼭 감언이설(甘言利說)을 늘어놓습니다. 마구, 덮어놓고, 비행기 1등석에 태웁니다. 행여 그 집 아이가 대학에 진학하기라도 하면 아이가 들어간 학과의 무진장 밝은 전망을 주저리주저리 나열합니다. 집이라도 사서 이사를 가면 그쪽 풍수가 왜 좋은지를 온갖 근거를 들어 견강부회합니다. 명퇴한 친구가 있으면 저도 곧 따라서 결행할 것처럼, 동병상련(同病相憐), 유유상종, 요란을 떱니다. 그렇게 누군가 틈만 보이면 그 틈새를 노리고 들어가 혹세무민합니다. 수십 년을 그렇게 대놓고 유치한 사탕발림, 교언영색(巧言令色)을 일삼으니 친구들이나 그 부인들이 이제는 제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주 섭섭해 합니다. 며칠 전 모인 부부 동반 계모임에서는 한 친구 부인이 죽기 전에 명품 단팥죽 가게 하나 내는 게 소원이라고 말하는 것을 넘겨 받아서 일언이폐지(一言以蔽之), 탁월한 선택이라고 추켜세우고 가게 터, 가게 이름, 특선 메뉴, 레시피까지 다 정해주고 왔습니다. 여기저기 잘 되는 집들의 성공 비결을 이것저것 주워담으며 재미나게 떠들다 보니 소화도 절로 다 되는 것 같았습니다.

뒷걸음에 쥐 잡는 일도 없지는 않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늘어놓은 교언영색(巧言令色) 호언장담(豪言壯談)이 불문곡직(不問曲直) 선견지명(先見之明)이 되는 때도 간혹 있습니다. 최근에도 한 번 적중한 적이 있었습니다. 친구가 시내 땅을 조금 가지고 있는데 몇 년 전 그 위에 가게를 하나 지었습니다. 경기도 안 좋고 목도 안 좋았습니다. 흔히 말하는 ‘죽은 길’에 들어선 건물이었습니다. 도로 하나 사이였지만 길 맞은편과는 땅값 차이가 엄청 났습니다. 그런데 건물을 지을 때 세를 들겠다던 사람이 갑자기 형편이 어려워져서 약속을 못 지키게 되었습니다. 입도선매(立稻先賣)식으로 굳게 맺은 약속이 깨어지자 땅주인 입장에서는 공사비만 축낼 형편이 되고 말았습니다. 마땅한 업종도 찾기 어렵고 무얼 해도 타산이 안 서는 터라 세입자 구하기가 아주 어렵게 되어버렸습니다. 누구라도 사람만 나서면 계약을 해야 될 형편이었습니다. 그때 제가 말했습니다. “그 땅이 왠지 사람 편하게 하더라. 근처에 버스 정류장도 있고 마침 인도도 많이 넓어졌으니(갑자기 그 길이 보행자 우선 도로가 되면서 버스전용도로로 전환되었습니다) 커피집 하나 차리면 대박나지 싶다.” 그곳이 한때 자주 다니던 식당 근처라 눈에 익은 터였습니다. 맞은 편과는 달리 그쪽 길에는 커피집이 없었습니다. 아예 젊은이들이 잘 다니지 않는 길이라 누구도 그런 엄두를 내지 못하는 듯했습니다. 친구 입장이 딱하기도 했지만 제 경우라도 밥 먹고 나오는 길에 커피 한 잔 하면 좋을 것 같기도 해서 호언장담했습니다. 그게 5년 전 일입니다. 결론부터 말하겠습니다. 제 말대로 대박이 났습니다. "말한 대로 이루어지리라", 우연찮게 커피집이 들어와서 꽤 호황을 누리고 있습니다(지금은 본사 직영 가게가 되어 아주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쪽 방면의 가게들이 덩달아 일어나고 있습니다. 풍수로 치면, 그 가게가 들어서 그 길이 비보(裨補)가 되었습니다. 막힌 곳이 뚫리고, 새는 곳이 메꾸어졌습니다. 다른 사회적 변화도 조금 가세되어(근대문화거리 골목길 투어가 유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쪽 길로 사람들의 발길이 쏠리기 시작했습니다.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만큼 완연히 활기를 띠기 시작했습니다. 거의 가건물 일색이던 그쪽으로 신축 건물들이 하나 둘 들어서고 젊은 사람들도 쌍쌍으로 그 쪽길 로 많이 다닙니다(그 전에는 주로 노인들의 통행로였습니다). ‘경로길’로 간주되던 그 한적한 거리에서, 그런 대박이 났습니다. 유명 브랜드도 아닌 지방 브랜드로 말입니다. 이번에 들으니 첫 세입자가 듬뿍 권리금을 얹어서 본사 쪽으로 가게를 넘기는 모양입니다. 친구도 임대료 수입이 많이 느는 눈치였습니다. 옆 자리 남은 땅에도 조만간 가게를 하나 더 지을 계획이라고 했습니다. 그 한 건의 성공으로만 본다면 저는 거의 신안(神眼)을 가진 것이 되겠습니다(죄송합니다. 法眼, 道眼, 神眼의 경지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풍수계에서 말하는 ‘척 보면 때와 법을 아울러 아는 도사의 경지’에 도달한 거지요.


...[전략] 경상남도 창녕군 대지면 면사무소 뒤에는 창녕성씨의 시조 묘가 있다. 평지돌출한 작은 동산에 자리한 시조묘 앞으로 드넓은 들판이 펼쳐지고, 그 사이로 토평천이 감싸 흐른다. 유어농파형(遊魚弄波形)이다. ‘물고기가 물결을 희롱하며 노는 형국’이란 뜻이다.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부인 성혜림의 시조묘다.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창녕군 성산면 방리 마을 앞산에는 성혜림의 조부(성낙문) 묘가 있다(부인과 합장). 해외에서 망명 생활을 하는 김정남의 외가 선영이기도 하다. 한 촉의 난이 산비탈에 꽃을 피우려는데 굶주린 토끼가 이를 뜯어 먹는 방란임토형(芳蘭臨兎形)이다. 비록 난의 줄기와 꽃이 뜯겼다 해도 뿌리가 상하지 않았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제1비서 어머니 고영희의 선영은 제주에 있다. 제주시 봉개동에 가족묘 형태로 자리하는데 뒤로는 한라산을 주산으로, 앞으로는 제주시와 바다가 시원스럽게 내려다보인다. 좌청룡, 우백호도 선연하다. 제주에는 여섯 개의 음택 명혈과 양택 명혈이 있다고 전해진다. 그 가운데 하나가 이곳일까? 아무튼 뭇 신하들이 임금에게 조례를 올리는 군신봉조형(君臣奉朝形)의 길지다. 거슬러 올라가면 고영희의 시조는 제주의 삼성혈(삼성혈)에 자리한다. 역시 제주의 ‘뼈대 있는 집안’이다. 결국 김정은 위원장과 그의 이복형 김정남 모두 남한의 혈통인 셈이다.[후략]
[김두규, ‘국운풍수’(조선일보, 2014. 3. 8)]


“죽은 조상 덕 보려는 못난 후손들이나 음택 풍수에 기댄다”, “진정한 풍수는 비보 풍수다”(최창조)라는 말을 저는 좋아합니다. 그러니까,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이니 유어농파형이니 좌청룡 우백호니 하는 것들은 모두 음택 풍수에서 즐겨 쓰는 말인데 그게 다 미신이라는 것입니다. 꼭 잘 된 후손이 있는 선대 묘들만 골라서 몇몇 특징을 드러내 과장하는데 그것이 ‘공짜를 바라는 심리’에 영합해서 혹세무민을 일삼는다는 겁니다. 듣다 보면 언뜻 듣기에는 그럴 듯한데 조금만 숙고하며 ‘어처구니없는 말’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일례로 우리가 보통 ‘뼈대 있는 집안’이라고 말할 때, 그 ‘뼈대’가 좋은 땅에 조상묘를 써서 육탈(肉脫)이 잘 되어 보기 좋게 남겨진 매장 유골을 가리키는 말이란 것을 위의 인용문을 보고 처음 알았습니다. 물론 풍수계에서 전하는 일종의 ‘민간어원설’입니다. 순서 없이 그럴 듯하게 인과관계를 정하는 ‘배우지 못한 사람들의 구축담론’을 일러 ‘민간어원설’이라 지칭합니다. 한 마디로 풍수 담론은 뒤죽박죽입니다. 잘 된 후손이 있어야 역산(逆算)이 가능한 이상한 나라의 셈법입니다.

북한 김일성의 본관이 전주(全州) 김씨라고 합니다. 전주 모악산에 시조묘를 두고 있지만 경주 김씨에서 분파되어 주로 평안도를 중심으로 세거(世居)하던 성씨라고 합니다. 저의 장인어른이 그쪽 전주 김씨입니다. 그런데 이남으로 피난 와서 호적을 새로 만들 때 경주 김씨로 본관을 바꿉니다. 그래서 제 처는 공식적으로 경주 김씨녀입니다. 김일성과 본관이 같은 성씨라 핍박받을 것이 두려워서였다고 합니다. 저는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장인어른의 그 소심함에 실소를 금치 못했습니다(어릴 때부터 뵙고 지낸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신문에 그 이야기가 났습니다. 전주 모악산의 전주 김씨 시조묘를 누가 이야기하며 전주 김씨의 ‘본관 바꾸기’에 대해서도 언급했습니다. 그것이 한두 사람의 소행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남에 온 전주 김씨들 중에는 그렇게 ‘본관을 간’ 사람이 아주 많았다는 겁니다. 한 개인의 소심함의 결과가 결코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저의 무식과 아둔(啞鈍)에 얼굴이 달아올랐습니다. 폭력의 역사 앞에서 ‘성을 가는’ 그 심정을 너무 과소평가했습니다. 그게 우리 역사였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었습니다.

위의 인용문도 비슷했습니다. 처음에는 과소평가의 대상이었습니다. 김정일의 장남이 창녕 성씨의 핏줄을 타고 났다는 것, 현재 북한 최고 지도자가 제주 고씨의 외손이라는 것을 빌미로, 여기저기의 지세(地勢)를 아전인수 견강부회하면서 음택 풍수의 효험을 과대포장해서 선전하는 글이었습니다. 할 일 없는 사람들의 흥밋거리는 될 수 있지만 자칫 혹세무민의 우를 범할 수도 있는 글이었습니다. 저도 전주 김씨를 처가로 두고, 200간 창녕 성씨 고택의 임자(정확히는 그의 동생)를 친구로 두고, 제주 삼성혈을 시조묘로 두고 있는 입장이라 전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생각에 재미있게 읽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이건 아니지 않은가”가 훨씬 우세한 가운데 인용문을 읽어나갔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풍수의 핵심은 비보에 있다라는 것을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단락에서 반전이 왔습니다. ‘동기 감응’이라는 풍수 단어를 통일의 염원 안으로 슬쩍 밀어 넣는 부분에서 이 글이 ‘미신’이 아니라 ‘비보’가 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랬습니다. 시작이야 어떻든 이 글은 비보의 역할을 다 하고 있었습니다. 풍수 담론이 ‘막힌 곳을 뚫고 새는 곳을 메꾸는’ 비보 담론이 될 수 있는 우리 민족만의 특수 사정을 이 글은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작은 오류는 대의(大義)의 수단이 될 때 이미 오류가 아닌 것입니다. 음택 풍수든 비보 풍수든, 전주 김씨 시조묘 이야기든, 창녕 성씨 시조묘 이야기든, 제주 고씨 가족묘 이야기든, 그 모든 것이 통일을 앞당기는 추진력이 될 때는 ‘미신’이 아닙니다. 그것들이 설혹 ‘작은 오류’로는 미신일지라도 큰 선업(善業)의 대의를 위해 멸사봉공하는 것일 때, 우리는 그것들을 소중히 여겨야 할 것입니다. 통일이 될 때까지는 어느 것 하나도 버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게 유어농파, 물고기 한 마리가 일으키는 작은 잔물결에 그칠지라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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