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빈 케이크(6)
하나뿐인 혈육이지만 나는 형을 잘 모른다. 형과 내가 공유한 시간은 일생의 십분지 일도 채 안 된다. 서로를 인생의 한 짝으로 여기고 살을 부비며 함께 한 시간은 고작 1년이었다. 고등학교 들어가서 형과 함께 자취생활을 1년 했다. 그 이전과 그 이후는 거의 남과 다름없이 지냈다. 사실 그 1년 동안도 형은 내게 큰 관심사가 아니었다. 아마 형도 '사건 그 자체'였을 공산이 컸다. 형이 내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형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형과 나는 어떤 존재였는지 전혀 관심이 없었다. 어쩌면 그만큼 내 삶이 팍팍했다는 것인지도 몰랐다. 내겐 오직 나의 하루하루만이 화두였다. 아버지는 우리가 하루하루를 연명할 수 있을 만큼의 지원만 했다. 그것도 한 번씩 오작동해서 하루 이틀 굶는 것은 다반사였다. 나의 미래는 불투명했고 희망보다는 절망이 수시로 내 앞을 가로막았다. 이제 와 드는 생각이지만 형은 이북에 두고 온 큰형 때문에 힘든 성장기를 보냈던 것 같다. 형은 어머니와 아버지의 상처를 위무할 의무가 있었다. 아버지는 모든 면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형에게서 많은 위로를 받았다. 겉으로는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형도 자신의 역할에 대해서 큰 자긍심과 함께 일종의 의무감 같은 것을 가졌던 것 같다. 어린 마음에도 우리 가족을 자기가 대표해야 한다는 의식이 컸던 것 같다. 특히 어머니와의 관계가 남달랐던 것 같다. 이것도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형은 어머니의 아들 연인(son lover)으로 자랐다.
아들 연인으로 자란 이들은 평생을 어머니의 품 안에서 산다. 내가 그렇게 형을 판단하는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다. 하나는 어머니가 세상을 버리고부터 형의 몰락이 가속화되었다. 내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형은 형편없이 무너져 버렸다. 다른 하나는 형의 연애다. 형이 군대에 간 후 우연히 형의 일기장을 볼 수 있었는데 거기에는 참담한 연애 기록이 담겨 있었다. 아들 연인의 가장 분명한 징표가 어디서고 실패하는 연애다. 그에게는 세상의 그 어떤 여인도 어머니를 대신할 수 없다. 사실 어려서는 내가 어머니의 아들 연인인 줄 알고 자랐다. 내 몸 구석구석에 남아있는 어머니의 손길, 그리고 틈만 나면 내 입술 위에 겹치던 어머니의 입술을 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린 시절, 어머니와 내가 함께 누리던 그 일체감을 나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러나 나는 가짜 아들 연인이었다. 나는 주인공이 등장하기 전 잠깐 동안 관객의 지루함을 달래주기 위해서 등장하는 막간의 어릿광대였다. 아니면 어쩌다 생긴 과잉, 육손이 같은 존재였거나. 큰형을 외가에 두고 내려온 후부터 어머니의 ‘하나 남은’ 아들은 처음부터 형이었다.
‘애국가 지휘 사건’도 그런 판단을 뒷받침한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 형이 4학년 때의 일이다(형은 자기 나이보다 2,3년 늦게 학교를 다녔다). 하루는 선생님이 나를 불러 애국가 지휘를 하라고 말씀하셨다. 불행히도 그 때는 내가 애국가가 4분의 4박자라는 것을 모르고 있던 때였다. 엉거주춤 하고 있는데, 선생님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반장이 그것도 못하느냐는 거였다. 거기까지는 그래도 괜찮았다.
“어떻게 자기 형 반도 못 따라 가냐?”
갑자기 아이들 앞에서 형과 내가 비교되는 이상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형이 왜 거기서 나와?”, 요즘 같으면 당장 그런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그런 생각보다는 “나는 왜 이리 못났지?”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다지 큰 모욕감도 들지 않았다. 형이 칭찬받는 한에서는 나는 다 괜찮았다. 공연히 선생님이 역정을 낸다는 생각뿐이었다. 집에 와서 어머니에게 그 말을 전했더니 어머니도 별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냥 ‘사건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표정이었다. 그 사건 이후로 나는 반장에서 부반장으로 강등되었고 교실 안에서 내내 기가 죽어지내야 했다. 그렇지만 내겐 별일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별일로 여기지 않았으므로.
역시 같은 해 일어났던 일인데 교내 백일장에서 ‘필통’이라는 작품으로 가작 입선한 일이 있었다. 오늘 교내 백일장이 열리니 모두 한 편씩 쓰라고 해서 장난삼아 그냥 한 번 써낸 것이 나의 최초 ‘입뽕작’이 되었다. 그 덕분에 글짓기부에 뽑혀서 방과후에 한 시간씩 글짓기 연습을 하고 집에 가야했다. 지도교사가 담임선생님이었는데 이번에는 형과 비교하지 않고 칭찬 비슷한 말도 한 번씩 했다.
“어떻게 이런 단어를 쓰지? 초등학교 2학년이?”
한 번은 ‘학교가 파하고 집으로 갈 때의 일이었다’는 문장을 썼는데 그것을 본 선생님이 그렇게 말했다. 어린 마음에도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서너 달 이어진 방과후 글짓기부 활동은 내겐 지옥과 다름없었다. 무엇이든 써서 내라는데 미칠 지경이었다. 열 살도 안 된 아이에게 매일같이 한 편의 글을 지어내라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과연 어떻게 써서 냈는지 그때 쓴 것들을 다시 한 번 보고 싶다. 어쨌든 지옥 같은 시간들을 보낸 후 시내 초등학교 대항 백일장 대회에 출전하게 되었다(대회장소가 나중의 내 마지막 직장이 된다). 형은 글짓기부도 아니면서 학교 대표로 같이 출전했다. 출전 전날 마지막 연습시간에 선생님이 나를 불러서 말했다.
“넌 자꾸 글이 짧아지니 운문부로 출전해라.”
본디 산문부였는데 출전 당일 운문부로 가라는 거였다. 글이 짧아진 것은 매일 같이 없는 이야기를 지어내다 보니 소재 부족으로 그렇게 된 것이었다. 그동안 운문은 한 번도 써본 적이 없었다. 이건 아니다 싶었지만 달리 항의할 마음도 수단도 내겐 없었다. 그냥 이 지루한 시간만 좀 넘기자는 생각뿐이었다. 대회장에 가서 운문부 교실로 들어간 나는 칠판에 적어놓은 시제들을 보고 실망을 금할 수가 없었다. 고구마, 달밤, 전깃줄. 그런 제목들을 칠판에 적어 놓고는 그 중 하나를 선택해서 시를 지으라고 했다. 우선 그렇게 제목을 정해 주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것들은 이를테면 서정적인 단어들도 아니었다. “뭐지?”, 아마 그런 느낌이었을 것이다. 장난기가 발동했다. 그것들을 다 집어넣어서(달밤에 전깃줄 아래를 걸으며 고구마를 먹었다 식으로) 시 한 편을 얼른 적어내고는 나와 버렸다.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어머니는 교실 앞마당의 모과나무 아래서 두 아들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멋쩍게 웃으며 나오는 나를 보고 어머니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조근놈, 아직 교실 못 찾았니?”
아니라고, 다 쓰고 나왔다고 대답하자 어머니가 쓴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빨리 쓰면 입상 못한다, 상 받으려면 한 시간 다 쓰고 나와야 한다.”
아마 그렇게 어머니가 말했던 것 같다. 그러나 어머니의 표정은 그리 어둡지는 않았다. 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과연 시간을 다 채우고 나온 형은 나중에 동메달과 함께 큼직한 부상을 전체 조회시간에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전달받았다. 4학년이 다른 학교 6학년들을 다 젖히고 동메달을 받았다고 크게 칭찬을 받았다. 그 메달은 형과 내가 고등학교 때 같이 자취를 할 때도 형의 중요한 소지품으로 남아 있었다.
그 뒤로도 내가 어머니의 아들 연인이 아니었다는 것은 여러 방면에서 확인되는 사실이었다. 나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은 그저 육친의 그것이었을 뿐이었다. 어머니의 삶에 하나의 의미가 되는 그 어떤 의지적, 심리적 관계는 오직 형과의 사이에서만 존재했다. 만약 그런 증거도 없이 막연히 내가 어머니로부터 버림받은 자식이었다는 의구심을 지니고 있었다면, 당시든 훗날이든, 신경증 유전자를 지닌 한 나약한 영혼의 지나친 자학이라고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일일이 열거하기도 부담스러울 정도로 수많은 증거가 넘쳤다.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등록금이 없어서 입학을 포기하고 있다가 천재일우의 연을 얻어서 간신히 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던 일(그 이야기는 따로 후술된다)도 사실은 형의 등록금을 마련하다보니 내 몫이 없어진 결과였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내 앞에서는 형 등록금 이야기를 일절 하지 않았다. 참 어이없는 일이기도 했지만 얼마 전까지도 나는 그런 사실적 관계를 발견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어린 마음에 내 등록금이 없으니 형의 등록금도 마찬가지일 거라고만 생각했던 것이다. 내가 버리는 패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나 결과를 놓고 보자면 나는 버려질 운명은 아니었다. 대구에서 마산으로 우리 가족이 내려간 그 해 여름이었다. 형은 대구에 남아서 학업을 계속했고 나는 부모를 따라서 마산으로 내려와서 아버지를 도와 시장에서 과일 노점을 지키고 있었다. 아버지가 노점을 연 위치는 대자(大慈) 유치원이라는 이름을 가진 절에서 운영하는 유치원 담장 아래였다. 대자사(大慈寺)를 소유하고 있는 돈 많은 할아버지가 원장이었는데 하얀 모시 저고리를 입고 나와서 한 번씩 주변을 둘러보곤 했다. 모두 그 할아버지에게는 고개를 숙였다. 그때부터 자리보전을 하고 누워 있던 어머니도 한번 씩은 노점으로 바람을 쐬러 나왔다. 그런 어머니에게 하루는 그 원장 할아버지가 청을 넣었다. 나를 그 유치원의 하우스보이로 달라는 것이었다. 잔심부름이나 하면서 절이나 유치원에서 하는 일을 거들면 숙식은 물론 야간중학교도 보내주겠다는 제안이었다. 그렇게 들어온 여자아이 중의 한 명이 지금은 어엿한 선생님이 되어 있다고 좋은 선례도 들어 꼬드겼다. 하루하루 연명하는 일도 버거운 데 입 하나 덜 수도 있고 더군다나 학교까지 보내준다고 하니. 어머니는 그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예상 밖으로 아버지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오랜만에 들어 보는 아버지의 화난 목소리였다.
“굶어 뒈져도 남의 집 종살이로는 보낼 수 없는 일 아니갔어?”
아버지는 그렇게 역정을 냈다. 사실 상 그날 내 조근놈 시절이 끝났다고 할 수 있었다. 아마, 그 사건 이후로 나도 언젠가는 큰형처럼 반드시 어머니로부터 버림받는 날이 올 것이라는 강박이 내 안에 자리잡았는지도 몰랐다. 내가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도 형처럼 좌절하지 않고 혼자서 꿋꿋이 버틸 수 있었던 것도 그런 버려질 것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꾸준히 하고 있었던 때문이 아니었던가 싶다. 안타깝게도 형에게는 그런 ‘헤어질 결심’이 없었다. 형은 자신도 언젠가 버려질 운명이라는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 같다. 모든 자식은 부모로부터 언젠가 버림받는다는 생각을 진작 알았어야 했는데 형은 그러지 못했다. 인간은 누구나 버림받는다는 것을 좀 더 일찍 배웠어야 했다. 그러나 형은 끝내 어머니를 버리지 못했다. 세상 끝날까지 어머니의 아들 연인으로 남고자 했다. 어머니가 죽고 세계가 무너지자 그는 어떤 삶의 준거도 가지지 못한 채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만약 그런 ‘운명의 플롯’이 가능하다면 형은 운명의 희생자일 뿐 다른 아무 것도 아니다. 어머니나 아버지, 그리고 큰형이 그랬듯이 형 역시 전쟁이 만든 희생양이었다. 그 플롯 안에서는 개인의 무능이나 나태, 실수나 부주의 같은 것은 아예 설 자리가 없다.
* 참조 : 아들 연인(son lover) : 모든 양극적 자질이 아직 분리되기 이전의 상태인 우로보로스(uroboros)를 인간적 형상으로 계승한 그레이트 마더(great mother, 위대한 어머니)는 신화적으로는 양성구유의 속성을 지니는 것으로 묘사된다. 수염이 난 여신, 남근을 가진 여신인 그레이트 마더는 최초의 인간으로 최초의 남성을 ‘낳아서’ 자기 짝으로 삼는다. 이 때 ‘낳아진 최초의 남성’이 바로 아들 연인(son-lover)이다).
* 참조 : 조근놈 : 작은놈. 아래아 발음이 살아있는 제주도에서 막내를 그렇게 부른다. 제주도에서 막내로 태어난 나를 집주인이었던 김녕할머니가 그렇게 불러서 내 아명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