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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원 Jan 24. 2021

고통을 잊게 하는 약, 졸로푸트

카이로스 김서진 - 건물 붕괴 사고의 아픔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삼키다

떡밥 덩어리, 10시 33분의 마법. 

펜트하우스라는 메가 히트작의 그늘에 가려졌지만, 타임 크로싱이라는 신선한 소재를 얼레벌레 한 사랑 이야기로 대충 마무리하지 않고, 잘 만들어진 드라마. 웰메이드라는 이런 평가는 지난 연말 연기대상에서 우수상, 신인상, 최우수상 등 출연진의 손에 들린 트로피로 입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른여덟의 나이로 대규모 건설회사의 최연소 이사 타이틀을 거머쥔 남자, 김서진(신성록 분)

그런 그가 사실은 생존자라면, 그 생존이 지금 그에게 영광을 안겨준 유중 건설과 관련이 있다면. 

그리고 그 사고로 아버지를 잃었다면. 그는 지금의 영광으로 오는 길에 무엇을 잃어버린 것일까.

이택규(조동인 분)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다음 일정으로 향하는 김서진(신성록 분) ©MBC 카이로스

최연소 이사라는 지위만큼 김서진은 바쁜 일정에 시달린다. 워커홀릭처럼 보이지만, 딸 다빈이를 위해, 야광별 스티커를 붙여줄 만큼 자상한 아버지이기도 하다. 열아홉에 아버지를 잃은 사연 덕분에 가족, 특히 아이에게 더 각별한 모습을 보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평범한 가정에서, 심지어 어려서 아버지를 잃은 아들이 최연소 이사로 성장하기란, 냉정하게도 쉽게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그래서일까 그는 첫 회부터 약을 삼켰다. 양복 상의 주머니에서 신중하게 꺼내는 손에 들려있는 통. 약병이다.  

뒷좌석에 앉아있던 그는 양복 주머니에서 약병 하나를 꺼내 든다. 저 통엔 무슨 약이 들었을까 ©MBC 카이로스

첫 술에 배부를 수 없기에, 이 약의 정체는 한참이 지나도록 알려지지 않는다. 

다만 약 병에 쓰인 필요시 1정(prn, pro re nata = as necessarily needed)이라는 단어가 정기적으로 약물을 복용해야 하는 만성질환은 아닐 것이요, 주로 회상 씬에서 특정 기억을 떠올릴 때(그 기억이라는 게 20년 전의 유중 건설 붕괴 사고였다) 혹은 공사 중인 건물에서, 전등이 흔들릴 때 같이 몸과 마음으로 그 기억을 불러오는 지점이라는 데서, 아마도 정신과적 질환이 아닐까 하고 짐작만 해 본다. 


그리고 약 이야기는 한참을 잊힌 채 있다, 각종 비밀을 간직한 그녀, 강현채(남규리 분)의 손에 의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다. 혹시 남편인 김서진(신성록 분) 이 자신의 비밀을 알아챘을까, 그의 옷이며 소지품을 뒤지다 찾아낸 약병 하나. 1화에서 보였던 그 약이다. 

비밀이었는데, 비밀을 간직한 김서진의 아내 강현채(남규리 분)가 약병을 찾아냈다. ©MBC 카이로스

이유는 다르지만, 사실 대부분의 우울, 불안 등의 정신과적 장애 혹은 약물 복용 사실은 회사는 물론 때로는 가족에게도 비밀로 하는 환자들이 많다. 그래서 진단명 비밀 혹은, 약병에 약 이름의 흔적을 보이지 않게 해 달라는 환자들도 실제로 종종 있다. 


이 약의 정체는 설트랄린이었고, 김서진(신성록 분)은 이 약을 상병코드 F431, PTSD,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때문에 먹고 있었다. 그랬다. 시종일관 냉정해 보이던 그, 사고의 기억을 잊어버린 듯했지만, 사실은 잊은 것이 아니라, 마음에 품고, 고통을 이겨내고 있는 생존자였다. 

이 약의 정체는 설트랄린이었다. 그리고 김서진(신성록 분)의 상병은 F431, PTSD다 ©MBC 카이로스

설트랄린은, 한국에 2005년 5월 졸로푸트(한국 화이자 제약)로 처음 소개됐다. 지금은 특허가 만료되어 제네릭 약품들이 출시되어있다. 오리지널 개발사인 화이자의 졸로푸트 2개 용량(50mg, 100mg)을 포함 해, 9개 회사 17개 용량이 등록되어 있다. 약물학적 분류로는 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 SSRI에 속한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치료는 4번째로 허가받은 적응증으로, 원래는 우울증이나 강박증 치료에 더 먼저 쓰였다. 공황장애나 사회불안장애, 월경 전 불쾌 장애의 치료에도 쓰이는 약이다. 


모든 약이 그렇지만, 어떤 질병에 먹느냐에 따라 용량이 달라져야 한다. 졸로푸트 역시도 마찬가지다. 


처음엔 작은 용량인 25mg, 반알부터 시작해, 1주일이 지나면 1알(50mg)로 용량을 올리고, 용량 효과 사이의 상관관계가 확립되진 않았지만, 치료효과를 얻기 위해서 많으면 하루 최대 4알(200mg)까지도 복용할 수 있다. 상황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이 같은 SSRI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서 심리치료를 하지 않고 약물 치료를 선택한다면, 1차 치료약으로서 먼저 고려되어야 하는 약은 맞다. 특히 주의가 필요한 건, 약을 중단할 때인데, 적어도 3주 이상의 기간을 두고 서서히 용량을 줄여가야 하는(tapering) 약물이다. 


그리고 특이할 만한 부작용은 다른 SSRI 혹은, 정신과 약물과 유사하게 자살경향의 증가, 졸음 등이다. 카이로스의 후반부, 운전을 하는 김서진(신성록 분)의 모습이나, 1달 전을 관통한다는 타임 크로싱의 특성상 벌어졌던, 15회의 추락씬 앞에 아찔했던 이유는, 이 약물의 특성 때문이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PTSD 환자는 붕괴사고의 생존자 김서진처럼 극단적인 사고를 겪고 살아난 사람에 국한되는 것만은 아니다.  실제 PTSD 환자 수도 소폭 증가하는 모습을 보이고, 진료비도 이에 비례해서 증가하고 있다. 특히 젊은 연령에 많은 환자들이 분포하고 있어, 학업이나 근로 등 일상생활에 지장을 주기도 쉽다. 


우리나라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현황 - 출처 : 심사평가원 생활 속 질병통계 100선


이를 방증하듯 여러 작품들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다루고 있다. 현재 대학로에서 공연 중인 뮤지컬 <블랙 메리 포핀스> 속 4남매의 모습은 전형적 PTSD 인물들의 특성을 하나씩 짚어 보여주고 있고(알코올 중독, 선택적 함구증 등), 드라마와 웹툰으로 인기를 끌었던 <김비서가 왜 그럴까> 속 이영준(박서준 분)의 역할 역시, 어릴 적 목격한 유괴사건의 기억 때문에 고통받는, 전형적 PTSD 였다. 영화 <장화, 홍련>역시 PTSD에 걸린 언니 수연의 시선에서 전개되는 이야기였다. 


극 전반은 아니더라도 혜나의 죽음에 트라우마를 가져, 계속 혜나의 환영에게 비는 모습을 보였던, 스카이캐슬의 예서, 겨울왕국의 엘사, 낭만 닥터 김사부 시즌 1에서 차 사고로 약혼자가 사망한데 대한 트라우마로 한때는 의사를 포기할 뻔했던 미친 고래  윤서정(서현진 분), 시크릿가든에서 엘리베이터 사고로 트라우마를 갖게 된  김주원(현빈 분) 등 심심치 않게 극 중에 등장하곤 한다. 


PTSD 환자의 70%는 1년 내 치료가 되지만, 30%는 1년 이상 장기 후유 장해로 남는다. 심리 치료가 약물 치료에 우선하고, 약물 치료를 하더라고, 심리 치료가 동반될 때 그 효과가 올라가는 만큼, 극 중반 "나도 거기에 있었다"며 유중 건설 사고의 생존자임을 고백하고, 주변의 도움을 받기 시작한 김서진처럼, 앞으로는 더 이상 고통을 잊기 위해 졸로푸트를 삼키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지 않기를. 

그냥 잠을 잘 못 자서요. 이 순간도 그는 온전히 솔직할 수 없었다. 자신의 PTSD 사실 앞에... ©MBC 카이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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