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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원 Sep 20. 2021

봄과 여름, 그 사이 어드메에서

뮤지컬 <스프링 어웨이크닝> 속 멜키어와 친구들의 <눈뜨는 봄>

드디어 만난 스프링 어웨이크닝, 210725 낮공,

작년 11월, 뮤지컬 스프링 어웨이크닝의 오디션 공고는 비단 배우, 배우 지망생 만을 설레게 한 건 아니었다. 세련된 넘버와 이색적인 연출 등, 화려한 캐스팅, 걸출한 신인의 등용문(초연 멜키어와 에른스트가 주원, 강하늘이었고, 고훈정, 이충주, 고은성을 포함한 뮤지컬 배우들이 이 작품의 싱어로 데뷔를 했다)으로 꼭 한번 봐야 할 명작으로 이름이 높았지만, 2009년의 초연, 2011년의 재연 이후 재공연 소식이 들려오지 않아, 모든 뮤덕을 앓게 만들었었기 때문이다. 전설의 그 공연이 내년 3연을 약속하고, 캐스팅을 위한 오디션을 올린다니, 공연은 여름 이건만, 새해부터 내년엔 SA 온다를 몇 번이고 되뇌며, 뮤덕답게, 한참을 설렜다.


<스프링 어웨이크닝, 2021/7/8~2021/10/3, 동국대학교 이해랑 예술극장>

http://ticket.yes24.com/Perf/39217

공연을 볼 생각에 행복했던 계절이 지나, 캐스팅이 공개되고, 스프링 어웨이크닝이 막을 올린지도 어느덧 두 달이 넘어, 공연은 종반부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첫 캐스팅 공개 때부터, 스프링 어웨이크닝 원작 있어요를 외치며, 내 뮤지컬 덕후 라이프를 더 풍성하고 깊게 해주는 트레바리 북뮤지컬 친구들과 함께 책을 읽고 공연 이야기를 할 생각에 설렜다.


그렇게 만나게 된, 스프링 어웨이크닝은 독일의 표현주의 극작가 프랑크 베데킨트의 희곡, 눈뜨는 봄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http://www.yes24.com/Product/Goods/75445068

트레바리에 가기 위해선 필수과정인 독후감 작성하기, 400자 이상을 써야 하는데, 2년 전쯤인가, 트레바리 유형 알아보기에서 공식 씀바귀가 나온 나 답게 1780자의 독후감을 제출했다. 그랬는데도, 아직 못다 한 말이 남았다. 누구 하나 주인공이 아니랄 인물이 없이, 모두 저마다의 사연과 성장담을 가지고 있는 것이 꼭 세상을 살고 있는 나, 보통 사람들 같아서, 꼭 한 번씩 보듬어 주고 싶었더니, 그게 그렇게 되었다.


<주의! 뮤지컬 스프링 어웨이크닝과 관련한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북 토크를 시작하기 전, 나만의 감상

나비의 날개 모양은 알 수 없다. 번데기를 벗어나기 전 까지는 - 독후감 for 210918 북뮤지컬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아이들은 번데기 시절을 거쳐 날갯짓을 할 나비였다. 애벌레의 모습은 못생기고 똑같지만, 누가 어떤 날개를 가질지는 번데기를 탈피할 때까지 모르는 것처럼, 어떻게 자라날지 무엇이 될지 모르는 미완의 존재였다. 그런데, 그 아이들은 무대 위 가득한 박제된 나비처럼 그 무한한 가능성을 거세당하고 말았다. 모리츠와 벤들라는 그 자리에 멈춰서, 영원히 어린아이로 남고 말았고, 나머지 아이들도, 그 아이들이 어떻게 자라났는지, 그 가능성을 펼칠 수 있는지를 보여주지 않았다. 멜키어만이 자살의 충동에서 벗어나, 살아남았다는 결말로 그려졌을 뿐이다.

원작과 가장 달랐던 부분이 이 결말이었는데, 원작인 '눈뜨는 봄'에서는 지나치게 사실적인 모리츠의 마지막 묘사(물로 총을 장전해서, 머리가 없었던 모리츠는 총기 자살을 시도하는 미숙한 자살의 결말의 전형이다)와, 그래서 잃어버린 자신의 머리를 옆구리에 낀 채, 멜키어를 죽음의 세계로 유혹하는 것과는 다르게, 감화원에서 훔쳐 나온 면도칼로, 자살을 시도하려는 멜키어를 막아서는 것은 모리츠의 영혼이다. 야무지게 칼을 뺐어서, 자신의 주머니로 챙겨 넣는 모리츠는, 다시 자살을 생각지 못하도록 멜키어를 생의 세계로 밀어 넣는다. "그러니까 살아"라고. 1890년데 빌헬름 2세 시대의 독일에서 표현주의 문학이 맞던 드라마적 결말에 반발하기 위해, 작가인 프랑크 베데킨트가 일부러 복면 신사의 등장과, 모리츠를 기괴한 모습으로 등장시켰다고 하는데, 이를 뮤지컬화 하며, 극작가가 다시 드라마적 기법으로 돌려놓았다고 하니, 극을 접하는 내가 뮤지컬 쪽이 훨씬 자연스럽다고 생각한 이유가 아마도 이 드라마적 전개 때문인 듯하다.

주인공의 옷을 입은 멜키어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극이지만, 이 극에 주연 혹은 조연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이들이 커온 배경이나 처해있는 위치가 조금씩 달랐을 뿐 그들은 성장하는 과정에 있었고, 그 과정에서 설령 부딪히고 깎이더라도 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존재였으니 말이다. 가장 얄밉게 보이는 한센 조차도 아이는 아이이고(여유로운 서환센과, 자신의 우월함을 보이려 자신감에 차있는 재호 한센), 그 조차도 다른 아이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술병 소품을 이용한다. 술에 의존하는 어쩌면 중독과 같은 상태기도 하다. 이런 아이들은 김나지움에 갇혀서 같은 교육, 특히 다양성을 존중하지 않고, 외우고 또 외우며 세상엔 오직 정답과 오답뿐이라는 가르침을 받는다. 음악에 재능이 있는 게오르그도, 매사에 열심인 오토도, 순수하고 여린 에른스트도, 그들에게 어울리는 교육법은 다 따로 있는데, 모두 같은 교육을 받고, 어른의 욕망 하에 갇혀 제한된 정보만을 받아들인다.

원작보다 대폭 줄어든 어른들은 죄다 우스꽝스러운 이름을 하고 있고, 하나같이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 벤들라의 비극은 사실을 제대로 알려주지 않은 엄마에게 기인했지만, 왜 알려주지 않았냐는 항의에도, 엄마는 불법 낙태를 결정하고, 그 선택은 결국 죽음으로 이어진다. 강압적인 아버지, 은행에 가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교회는 어떻게 나가야 할지를 고민하는 아버지에게, 자연스럽게 가지는 성적 판타지에 대한 것도, 낙제라는 성적 불안에 대한 것도 털어놓을 수 없던 모리츠는 그저 친구의 어머니였을 뿐인 파니 가보어가 공부보다 건강한 게 중요하다는 말에, 그녀는 자신을 도와주리라 생각했지만, 그의 주장은 사실 미국으로의 도피 유학 자금을 부모의 동의 없이 달라는 것 이어서, 멜키어의 어머니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었다. 마르타의 학대에서 여기엔 너와 나뿐이라는 말에서 함께 반응하는 일세의 모습은 일세 역시 유사한 신체적, 성적 학대를 당했고, 이를 피해 도주했더니, 사회로부터 발칙하다는 낙인이 찍힌 채 친구들 의 뒤를 맴도는 채, 배척당하는 존재가 되고 만다. 이 모든 것은 어른들이 만들어 낸 것인데, 모리츠의 죽음은 멜키어의 성에 대한 글로 인한 것으로 돌려버리고, 사회로 부터 청소년 자살(베르테르가 나온 게 이즈음이었을 것이다)의 책임을 뒤집어쓸 수 없다는 것으로 끝까지 무책임하다. 그리고 그 교장선생님은 단 한 번도 모리츠의 이름을 기억한 적이 없다. 마지막 순간 까지도. 아이들은 멜키어의 말처럼, 미래를 위한 동력이자 자산, 일꾼일 뿐, 인격적 존재로서 존중받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성장의 과정에서 고통도, 상처도, 사랑도, 아픔도 겪으며 앞으로 나아가야 할 아이들을 어른의 시각으로 꼭 붙들어 놓은 것이 문제의 원인이지만, 그들도 분명 정도의 깊이만 달랐을 뿐 같은 시간을 지내왔을 테지만, 올챙이 시절을 기억하는 어른은 없다. 자신들은 그런 것쯤 몰라도 고민하지 않고 자라온 것처럼 행동한다. 그리고, 지금이라고 해서 다를까. 아이는, 학생은 이러해야 한다 라고 어쩌면 학생 다움을 여전히 강요하고 있지는 않은지, 입시나 성적에 대한 부담감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아이들, 혹은 정서적 고통을 겪는 또 다른 모리츠는 2021년에도 존재한다는 것까지. 기실 아이들의 성장에 대해 부모와 학교, 사회 모두 책임이 있음에도 여전히 우리는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지, 내 지난날을 돌이켜 본다. 그리고 내가 지금의 세상을 보는 시각 역시도.

그래서 살아남은 멜키어는 온전히 살아남은 것일까. 사실 멜키어와 같이 주변의 친구들을 경험한 아이들은 자살 생존자이고, 자살 생존자인 아이들은 흔히 자살 충동을 겪기도 하기에 보살핌이 필요한 법인데 말이다. 원작과 비해, 다소 작위적이라고 해도, 뮤지컬의 결말, 특히 먼저 세상 밖으로 한 발을 딛고 풍파를 맞았던 일세가 아이들의 자줏빛 여름, 그 성장통을 무사히 겪어내길 노래해주는 것처럼 묘사되는 이 결말이 감동적이었던 만큼, 멜키어가, 일세가, 한센이, 게오르그, 에른스트, 오토, 마르타, 테아, 안나 모두가 잘 살았으면 좋겠다. 저마다의 모습으로. 박제되지 않은 채로 훨훨 날았으면.

그리고 대망의 셋토, 드디어 스프링 어웨이크닝을 만났다. 사실 트레바리 북뮤지컬의 좋은 점은 하나 손으로 꼽기 힘들 만큼 많지만, 최애 포인트는 이렇게 단순 후기가 아닌, 책과 사회상에 기반한 딥톡에 있다. 한 작품에 대해 함께 보고, 함께 읽으며, 이렇게 치열하게 토론하는 모임이라니. 뭐든 찍어먹어 본 그 맛이 맞는지, 확인하고 또 확인해야 하는 내 성정에 안성맞춤인 모임이다. 더 좋은 건 공연을 좋아하는 좋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다는 것이지만.


Book Talk 1. Spring Awakening!!!

스프링 어웨이크닝은 10년 만에 180도 바뀐 채 무대 위로 돌아왔습니다. 혹시 이전 브로드웨이 버전을 보신 적이 있나요? 그와 비교해 맨체스터 버전은 어떤 점이 달라졌고, 그에 따른 여러분의 감상평은 어떤가요? 이전 버전을 영상으로만 접했다면 영상을 통해 느낀 생각, 감정과의 비교도 좋습니다.
스프링 어웨이크닝은 넘버 맛집, 안무 맛집으로도 유명합니다. 여러분의 최애 장면은 무엇인가요? 또 다양한 캐릭터 중에 가장 애정이 가는 캐릭터는 누구이고,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스프링 어웨이크닝의 원작 [눈 뜨는 봄]은 뮤지컬보다 조금 더 잔혹하고 비극적입니다. 원작을 읽으며 인상 깊었던 내용이 있으셨나요? 왜 뮤지컬은 희곡의 잔혹함과 비극을 조금 덜어냈을까요?


2009년엔 막 면허를 땄을 때였고, 2011년엔 팔자에 없는 샐러던트(그때 유행이었다. 샐러리맨+스튜던트, 회사를 다니며 공부하는, 속담으로 주경야독이라던 그걸, 영어 말로 바꾼 그런 신조어였는데, 어느샌가 없어진 거 같다)의 삶을 사느라, 볼 수 없었던 이 극은 10년이 지나서야 돌아왔다. '파격'을 강조했던, 브로드웨이 버전의 패기 대신, '왜'와 '내면'에 천착하는 맨체스터 버전으로. 한마디로 '사춘기'를 분출과 반항의 이미지로 해석했던 브로드웨이 버전에서, 방황과 고뇌로 맨체스터 버전에선 해석이 바뀌었다는 감상이 기억에 남는다.

이 차이가 미국과 영국의 차이에 기반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말, 미국의 직접 표현의 정서와 영국의 분위기를 통해 전달하는 간접 표현의 스타일 역시도, 공연을 오래 봐오지 않은 사람이라면, 같은 극 다른 느낌을 쉽게 잡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싱어의 등장에서 객석에서의 참여 형태로 지금 이곳에 함께 있는 우리가 관객인 동시에 이 순간에 존재하는 사람임을 떠 올리게 한다는 데서 '보도지침'을, 브로드웨이 버전에서 맨체스터 버전으로 바뀐 시대에 따라 극을 '넘겨줘라' 한다는 데서, 영국 셰필드 지방의 고교 이야기를 그렸던 '히스토리 보이즈'를 떠올리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마이크가 무선에서 유선으로 바뀐 것에 대해서, 좋았던 연출이었는데, 왜 그랬을까요 라는 의문이 일자, 곧, 브로드웨이 버전의 협력 연출이었고, 이번 맨체스터 버전의 연출을 맡은 이종석 연출의 미니 인터뷰에 따르면, 10년 전 마이클 메이어의 멜키어는 아무것도 거리낌 없이, 세상과 자신의 굴레를 벗어던지는 것이었다면, 루크의 멜키어는 유선 마이크를 사용하는데, 자신의 속마음은 거침없이 쏟아내지만, 결국 줄에 묶여 통제받을 수밖에 없음을 표현한 것이라는 내용(https://twitter.com/mpncompany/status/1411973013860274178?s=20)을 바로 찾아서 함께 공유하고, 앞서서 이야기했던 분출과 반항이 방황과 내면의 고뇌로 변화된 것 같다는 전반적 감상과 결이 같다는 것을 확인하기도 했다.(이러니 북뮤지컬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랴)


원작과 1차, 2차 창작물이 되는 뮤지컬 작품을 비교하면서, 텍스트의 잔혹함이 덜어진 것은 이것이 무대 예술이라는 것과, 희곡의 뒷장과 앞장의 등장인물만이 같은 별개의 장을 하나로 합쳐, 한 개의 장면(Scene)으로 만들어 내면서 서사의 구조가 재편된 이야기도 했었다. 특히, 락(Rock) 음악을 주로 선택함으로써 원작의 기괴함(모리츠의 자살 장면에서 모리츠가 권총 자살을 하는데, 그래서 그 아이는 머리가 없다. 마치 모리츠가 인상적으로 읽은 우화인 머리 없는 여왕과 한 선상에 놓고 이 아이의 고뇌를 풀어가는 장면이라 의미 있었지만, 실제 무대에서 대사를 그 아이는 머리가 없었어라고 친다고 상상한다면, 그 또한 평화롭지는 않은 결말이지 않은가)과의 거리두기를 실현했다. 물론 이런 생소화 기법은 스프링 어웨이크닝의 최초 창작 시부터 지향해 오던 방식이라는데, 그래서 유튜브나 멜론 뮤직의 브로드웨이 버전 OST를 틀어놓고서는 그 이질감 때문에 책장이 넘어가지 않았다는 말이 묘하게 공감이 됐다. 그렇게 모리츠의 결말이 조금은 유해지고, 복면 신사를 따라간 멜키어가 희/비극 중 어떤 엔딩에 해당하는지 모를 희곡을 대신 해, 자줏빛 여름을 통해 아이들의 희망적 암시를 전달하는 것은 공연장을 나서는 발걸음이 무겁지 않기를 바라서는 아닐까.


Book Talk 2. The Song of Purple Summer

스프링 어웨이크닝은 성(性)에 눈을 뜨는 아이들의 얘기를 다루고 있지만, 극의 메시지가 결코 성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청소년기의 불안, 혼란, 억압, 호기심, 사랑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은 것일 텐데요. 여러분이 스프링 어웨이크닝을 통해 느낀 메시지는 무엇인가요?
모리츠는 화니 가보어의 답장에 실망하고 결국 자살을 택합니다. 여러분이 만약 모리츠의 편지를 받았다면 어떤 답장을 할 것 같나요? 모리츠의 자살을 막으려면 어떤 행동, 어떤 답장이 필요했을까요?
멜키어와 벤들라는 정말 서로 사랑했을까요? 이들이 서로에게 느낀 감정은 무엇이었을까요? 또 비교적 서사가 많이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한센과 에른스트는 어떤 관계이고 서로에게 어떤 감정을 느끼는 것일까요?
모리츠와 벤들라의 위로를 통해 다시 삶을 살아보기로 한 멜키어. 그는 이후 어떤 삶을 살아갔을까요? 다른 아이들이 어떻게 살아갔을지에 대해서도 자유롭게 이야기해 보아요.


설. 두. 당

설렘, 두려움, 당황 - 스프링 어웨이크닝의 쇼케이스 영상에서, 10대를 지나온 지금, 아이들의 감성에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고민했다던 배우들에게 '설렘, 두려움, 당황' 세 가지만 기억하라는 연출노트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 10 대란 설렘, 두려움, 당황 그 감정을 빼곤 이야기하기 어렵지! 라며...


사실 스프링 어웨이크닝은 1890년, 두 세기 전인 19세기에 창작된 희곡 '눈뜨는 봄'이 원작이다. 남자아이들이 등장하는, 현재로 비유하자면 인문과 정의 중학교 과정인 김나지움과 여학생들(여자 아이들이 학교에 다녔는지는 학교 장면이 나오질 않아 알 수 없다. 왜 아이들은 풀밭에서 까르르 놀러 다니는 장면만이 나올까 했는데, 독일에서 고등학교 졸업 자격시험에 6명의 여학생이, 외부 수험생 자격으로 응시했던 최초의 사례가 1894년, 19세기 초에 청강생 자격으로 대학 수업을 일부 주에서 들을 수 있었다니, 여학생들은 학교에 다닐 수가 없었다. 이러니 남학생들에 비해 모자라 보이는 것도 이상할 리 없다.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한국 사람은 쉬 이해하기 어렵지만, 소르본 대학에 진학했던 폴란드의 마리아 스크워도프스키는 여학생의 입학을 허락하지 않는 바르샤바 대학의 학칙 때문에 프랑스로 유학을 떠난 것이었다)의 모습이 마치 스머프마을(1957년 벨기에에서 창작)과 같아서, 10년이 지나도 여전히 지금 아이들 같다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똑똑한 애, 잘난척하는 애, 뭐든 열심히 하는 애, 착한 애가 모여서 마을을 이루고 있는 스머프마을이 지금 아이들도 파란 스머프를 아는 것처럼 늘 통용되는 모습인 것이, 스프링 어웨이크닝 속 아이들이 학교에서 만날 수 있는 보통 모습이라는 점에서 지금까지도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말. 문득 스머프 옷을 입은 멜키어, 한센, 모리츠, 벤들라가 생각나 씩 웃음을 짓게 했다. 교복을 입고, 라틴어를 가르치며 아이들이 받는 교육으로 볼 때, 전체주의 시대(19세기 독일을 배경으로 한다는 걸 생각해볼 때, 타당한 추론이다. 브로드웨이 버전은 아이들의 착장이 너무나 현대적인 교복을 입고 있던 탓에, 현대라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들었다)에서 성(性)과 성적(成績)은 청소년기의 대표적 억압의 예시니까.


어른이 뱉은 작은 거절의 말이, 아이에게는 파도처럼 다가왔다. 그리고 그 아이는 끝내 외면당했단 생각에 극단적 선택을 하고 만다. 방임과 부재로 대표되는 극 혹은 영화 등 작품이 비단 스프링 어웨이크닝 하나는 아닐진대, 이 흔하디 흔한 작품 중 스쿨 오브 락, 죽은 시인의 사회를 떠올리며, 이 어른의 부재 속에서도 엉성하지만, 혹은 이상향으로 존재하는 딱 1명의 어른은 있었는데, 이 작품에선 부모세대의 비중을 의도적으로 낮춘 까닭도 있지만, 그 이상향도 없었다는 점 때문에, 결국 모리츠는 비극을 맞고 마는데, 화니 가보어는 어쩌면 억울할지도 모른다.


유일하게 극 중에서 이름이 있는, 아니 멀쩡한 이름이 있는 어른으로서(골절상, 몽둥이, 파리 같은 선생님들을 제외하고) 그녀의 상냥한 말, 그러나 거절은 친구 엄마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이었을지 모른다. 다만, 돈을 빌려주지 않는다면 죽어버리겠다는 말은 협박으로 들린다는, 그 말은 안 했더라면 어땠을까 라고 생각해보지만, 그건 미래에 사는 제삼자의 시각일 뿐,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역시 남의 집(안) 일이라는 인식이, 가정폭력이 극복되지 못하는 이유가 아닐까. 모리츠가 마르타나 일세처럼 직접적 폭력에 노출된 건 아니었던 듯 하지만, 아니. 너 낙제했지 할 때 맞긴 맞는구나.... 오히려 아들을 좋은 학교에 간 자신의 '액세서리'로 생각했던 아버지 아래 자란 그가, 특히 모리츠처럼 감성적인 아이가 노출된 쪽이 훨씬 큰 정서적 학대가 아니었을지... 오히려 마지막 순간을 놓쳐버린 건 화니가보어의 말은 어쩌면 자살의 트리거가 될 수는 있었겠지만, 일세를 만났던 그 순간이 아니었을지... 일세 또한 나는 차가운 쓰레기 더미 위에 있을 거라고 모진 말을 쏟아 내는데, 벼랑 끝에 몰린 두 아이들이 서로의 사정을 봐줄 여력이 없어서가 아니었을까.


모리츠의 극단적 선택의 원인으로 지목된 멜키어와 벤들라의 관계가 사랑인지, 호기심인지, 썸인지 분분한 의견이 있었고, 한센과 에른스트에 대해서는, 에른스트의 이야기가 책에서는(에른스트는 또 다른 낙제 후보자였다. 책에서는 65명 중 60명이 올라가는데, 에른스트는 모리츠와 함께 꼴찌를 다툰다. 모리츠가 감상적이고 생각이 많은 아이라 공부에 집중을 못한다면-물론 골절상 교장선생님은 지진아. 박약아 등으로 표현하긴 하지만- 에른스트는 그저 착한데 모자란 그런 애다) 다뤄지는 반면, 극 중에서는 한센을 추종하는 역할로 밖에 표현되지 않아서 아쉬웠었다. 이날 토론을 하다 문득, 왜 한센은 My Junk에서 여자의 사진, 특히 데스데모나, 그것도 목이 졸리는 최후의 순간을 가져왔는가, 이 또한 그 시절 남성 중심의 작법이 아닌가 하는 이야기 가운데, 어쩌면 단순히 한센이 양성애자라는 표현을 넘어 데스데모나를 죽이고 전장에 나가는 것 역시, 내가 가질 수 없다면, 파괴해버리겠다 라는 어쩌면 사랑보다는 정복이나 독점욕이 우선하는 그의 정복관, 성 관념이 보인다는 것에서 한센이 선택할 만한 욕망의 대상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떠 올랐다. (한센 역을 맡은 두 배우를 매우 애정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한센은 강하고, 오만하며, 때론 거만하고 속된 말로 재수 없는 역이지 않은가)


멜키어와 같은 아이들을 현대의 청소년 정신의학에서는 '자살 생존자'라는 이름으로 재분류하는데, 주변의 가까운 사람을 자살로 잃은 적 있는 아이들로, 이 아이들 역시 자살의 위험도가 높다. 밀착해서 관리가 필요한 아이들인데, 이미 그는 감화원에 간 상태다.(황휘 멜키어는 감화원으로 보내기로 결정하는 장면에서 엄마... 를 부르며 털썩, 권위적인 아버지는 몰라도 자신을 믿어주리라 믿었던 어머니에게 크게 실망한, 속된 말로 세상 다 잃은 표정을 한다. 어쩌면 무대석 라구역에서 본 날이 휘멜키의 공연이라 그랬는지도) 세심하게 그를 돌봐줄 사람이 없다는 얘기인데, 감화원을 탈출한 죗값을 치러야 하겠지만, 이런 멜키어가 과연, 극적으로 트라우마를 극복한다 해도, 제도나 권력에 타협할 수 있을까, 우울장애를 가지진 않을까, 아니 알코올 중독이 되지 않았을까 등등 극과는 달리 멜키어의 미래를 잘 살아갈 거예요 라고 그릴 수 없는 건 우리가 다들 어른이기 때문이겠지.


Book Talk 3. Totally Fucked

이 작품에는 다양한 어른들이 등장합니다.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가장 최악인 어른은 누구라고 생각하시나요?
작품에서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제대로 된 성교육을 해주지 않습니다. 오늘날은 상황이 나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청소년에게 성은 금기시되고, 음지화 되어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청소년에게 올바른 성문화를 정립하려면 우리 사회의 성교육은 어떻게 나아가야 할까요?
많은 분들이 작품을 보며 '나도 이제 어른(=꼰대, 기성세대) 구나'라고 느끼셨다고 적어주셨는데요. 어떤 지점에서 그렇게 느끼셨나요? 또 작품 바깥에서, 나도 이제 어른이구나 실감하게 된 경험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1890년대 독일이 아니라, 2021년 한국에서 청소년에게 닥친 비극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우열을 가리기 힘들어서 누가누가 잘하나 가 아니라 누가누가 못하나에 가까운, 이 구제불능 어른들을 어찌해야 좋을까. 가정이 구출해내지 못한 아이들을 구원해낼 책임이 있는 교사들이 자신의 안위에만 집중해 온 나머지 아이들이 보내는 구조신호를 놓쳐버린 걸 가장 나쁘다고 해야 할지, 직접적 체벌을 가하는 라틴어 교사가 가장 나쁜 사람이라 해야 할지, 책에서는 죽어버린 모리츠를 놓고 내 자식이 아닙니다 라고 부정하던 아버지라 맘껏 욕할 수 있었는데, 극에서는 모리츠의 장례 씬에 등장해, 크게 무너지는 아버지의 존재에 대해 논란이 많았는데, 문득 아버지는 은행에서, 교회에서 나는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니냐가 우선했던, 아버지라면 그 등장이 면죄부를 얻기 위함은 아니었을까 라고 했다가, 최악에 더불어 괘씸하기까지 하다는 모리츠 아버지 성토회를 만들기도.


성적 고민으로 삶을 져버리는 아이들의 이야기는 매년 수능 즈음이면 꼭 뉴스에 나온다. 1교시가 끝나고 몇 명, 2교시가 끝나고 몇 명, 채점 결과를 받아 들기도 전에 미리 신변을 비관하는 아이들을 유약하다고 비난만 할 수 있을까. 그런가 하면 학교폭력을 견디다 못한 아이들에게 말을 하지 그랬어라고 쉬이 이야기하곤 한다. 그게 쉽지 않을 걸. 잘 알지도 못하면서. 비틀어보면, 우리가 믿음직한 어른이 되지 못해서, 말을 하지 못했을 텐데 말이다.


요즘 어른이 되어 버린 우리지만, 반복적으로 그래도 들어주는 어른 한 사람만 있었으면 했었다. 육아맘 육아 대디가 아니라 2030이, MZ세대가 예능 '금쪽같은 내 새끼'를 많이 시청하는 이유가, 마음을 어루만져주기 때문이라는 평론처럼, 어른이라도 무리하지 않아도 괜찮다 라는 마음의 소리를 들어주는 터치가 MZ세대에게도 필요했기 때문이라는데 공감했다. 하물며 청소년들은 어떨 것인가. 우리가 부모가 아니어도 좋다. 주변에서 만나는 아이들의 눈을 보고, 그들의 머뭇거림이 조금이라도 없는지, 우리가 먼저 (편하게) 들어주는 어른이 되자는 다짐을 끝으로 스프링 어웨이크닝 톺아보기는 막을 내렸다.  


꽤 유명한 독일의 극작가라는데(아버지의 유산으로 하고 싶은 거 다 했던 도련님이지만) 프랑크 베데킨트가 누군지도 몰랐다.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었을 만큼. 애초에 스프링 어웨이크닝의 원작이 아니었다면, 트레바리가 아니었다면, 북뮤지컬이 아니었다면 아마 영원히 몰랐을 작가와 작품인데 말이다.

때문에 독일의 문학 사조나, 표현주의 문학의 특성, 표현기법, 빌헬름 2세 통치와 독일 교육 과정, 공교육의 발전 과정 등을 알게 되다니, 취미는 나를 지적으로 만든다. 다음 달엔 무엇을 읽게 될지, 또 무엇을 보고 얼마나 깊어질지, 그다음이 더 기대되는 내 취미, 트레바리 북뮤지컬이다.

블라블라 카드와 티켓, 박제된 나비가 아니라, 저 나비가 하늘을 훨훨 날았으면 좋겠다. 어떤 번데기가 얼마나 멋진 날개를 갖게 될지 누구도 모르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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