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문화의 원류, 그리스 로마 신화의 영리한 재해석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한창 브로드웨이에서 올려지고 있는 핫한 작품이 첫 라이선스 공연 장소로 대한민국 서울을 택하다니, 하데스 타운의 오디션 공고, 8월에 올라옵니다 라는 개막 뉴스에도 생경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대개 브로드웨이 작품은 웨스트엔드 이후에 호주나 일본을 돌다가, 수년은 지나서 한국어 번역이 되고, 한국 공연이라는 느낌으로 만나보는 것이 익숙했으니 말이다. 2020년의 토니어워즈가 2021년에야 열렸고, 코로나 이전 2019 토니어워즈의 전부분을 휩쓴 작품이 이 하데스 타운이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8월 개막 예정인 대작의 캐스팅을 5월 중에 시원하게 풀어버리는 자신감까지, 물론 공개된 캐스팅의 면면이 너무나 훌륭했기에 이게 바로 가진 자의 자신감이다 같은 느낌도 없지 않아 들었지만 말이다.
<하데스 타운, 2021/9/7~2022/2/27, 엘지아트센터>
http://ticket.yes24.com/perf/39338
이 기회가 아니면 언제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어볼 수 있으랴를 고심한 끝에, 번외 모임으로 그리스 로마 신화 읽기를 진행하고 있지만, 수많은 그리스 로마 신화 중(토마스 불핀치의 역서, 이윤기의 역서, 구스타프 슈바브의 역서 등등 판본이 다양하다. 신화에는 주인이 없기 때문일까) 트레바리 북뮤지컬의 10월 모임은 하데스의 도둑장가, 그리고 오르페우스의 사랑 두 가지 이야기를 담은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1권과 함께 했다.
http://www.yes24.com/Product/Goods/140210
트레바리 모임에 출석하기 위해, 독후감을 제출해야만 하는데, 언제나 그렇듯 왜 독후감을 내는 것은 늘 마감날 독후감 쓰는데 4시간이면 충분한 거 아시죠라는 문자를 받아야만 시작되는 것 인지... 마감 초치기 인생사를 다시 한번 곱씹어 보며, 생각을 모으기 전 나만의 하데스 타운 - 그리스 로마 신화 감상을 옮겨본다.
<주의! 뮤지컬 하데스 타운과 관련한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북 토크를 시작하기 전, 나만의 감상
하데스 타운으로 몸을 바꾼 그리스 로마 신화 -독후감 for 211016 북뮤지컬
신화는 몸 바꾸기의 도사라고 했다. 그리고 신화는 그 자체로 시간을 두고 오래도록 사랑받는 작품인 동시에, 2차 창작의 근원이 되기도 한다. 이토록 몸을 바꾸어 가며, 사랑받을 수 있는 배경에는 보편성과 특정한 시대정신을 대표하는 특수성이 있다. 공시성과 통시성이란 말로 표현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리스 신화의 한 꼭지를 가지고 온, 뮤지컬 '하데스 타운'은 사랑이라는 인류 보편의 정서와 대공황이라는 시기를 이입했으나, 신화에 비하면 현대에 가까운 탓에, 자본과 노동이라는 현대 자본주의의 요소 덕분에 사회 문제를 풍자하는 극이라는 느낌을 주기도 했다. 이렇게 한 작품 안에서도 몸을 바꾸는 신화의 매력을 책을 읽으면서야 알았다.
그리스 신화는 알게 모르게 접했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안다고 생각했을 뿐, 제대로 읽어보지 못함은 서양 문화의 원천이라고 할 만큼 방대한 분량 때문이었으리라. 이번에도 책을 집어 들며, 가뜩이나 어려운데 비슷하기까지 하여 헷갈리는 이름들 덕에 야심 차게 표시를 해 가며 읽기 시작했지만, 어느샌가 책에서 이름과 그 뜻이 가득한 페이지를 만나며, 자연스레 이 신들이 다음에도 또 나오겠거니 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미궁의 문을 들어서는 데 있어 내 손에 쥐어든 실뭉치는 어쩌면 내가 즐기고 좋아하는 '뮤지컬'일 지도 모르겠다. 뮤지컬이라는 실타래를 손에 쥐고, 그리스 로마 신화가 가진 그 함의를 풀어보리라.
처음 캐스팅이 공개됐을 때, 일반적으로 누군가가 주역이구나 라는 느낌이 드는(적어도 3명 정도로 보통 압축된다. 뚜렷한 남자 주연과 여자 주연 격 2명 혹은 2명의 남자 주연과 1명의 여자배우로) 다른 극 들과는 달리, 각각의 배역을 맡은 배우들의 중량감 덕분에, 대체 누가 메인인가를 고민하게 했었는데, 극을 보고 또 신화를 읽고 나니 각각의 신들이 대표하는 내용이 다르고, 일종의 옴니버스 식으로 이어진 이야기 덕분에, 헤르메스의 관점에서, 또 에우리디케-오르페우스, 하데스-페르세포네 누구의 시각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이야기라는 데서, 다시 한번 신화의 범용성을 느꼈다.
하데스 타운의 이야기로 들어가 로드 투 헬로 시작한 이야기는 로드 투 헬의 리프라이즈로 끝을 맺는다. 신화가 반복되는 것처럼, 페르세포네의 6개월이 풍요와 수확을 말하는 것처럼(계절의 신들은 분명 어머니 데메테르의 곁에 있어왔는데, 계절이 어쩐지 페르세포네로 인해 더 풍요로워진 느낌은 왜일까) 인간은 끊임없이 그 결말을 알면서도 이번만은 다를 거라 생각하며, 사랑 노래를 또 부르고야 만다. 철학적이고 상징적인 이 뮤지컬의 속에서 신이 아닌 보통사람인 나는 무엇을 느껴야 했을까. 사랑이라는 감정에 국한하지 않더라도, 매번 실수를 반복하면서도 다를 거라 기대하고 살아가고, 또 망각하고 기억하는 삶, 그리스에 흐른다는 강 '라이프'와도 같은 인생이 아닐까.
페르세포네와 하데스의 관계를 중년 부부의 권태로움으로 표현한 후기나 기사들을 보았다. 오르페우스와 에우르디케에게서 느껴지는 설익음과 푸릇함, 그래서 무모함은 아니겠지만, 단순히 둘의 관계를 권태로움이나 하데스의 아버지인 시간의 신 크로노스에게로 넘어간 세월만은 아니니라. 길고 긴 신화 중 두 꼭지를 인용하며, 제목을 하데스 타운으로 붙인 이유는 재물을 뜻한다는 플루토스로 지하자원의 주인이라는 별칭에 어울리게 광산의 주인으로 그를 그리고, 대개의 갱도는 깊은 땅속에 묻힘으로 아흐레를 내려가야 하는 지하로 표현함으로써, 또 광산을 가진 자는 부유한 자이지만, 그들의 부는 광부로 대표되는 위험을 무릅쓰는 노동자로 인해 축적된다는 점 까지, 현대를 축약해 놓는 데에 있다고 봤다. 어쩌면 뮤지컬을 보면서도, 그것이 현대의 나에게 주는 의미가 클 때 울림을 크게 느끼는 개인의 성향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에우리디케를 데려간 지하의 신에 대한 오르페우스의 원망과 슬픔이, 개인을 잃어버린 노동자에게 전해주는 메시지로 변했을 때 라던가, 뮤즈 아홉 자매 중 서사시와 현악의 신인 칼리오페를 엄마로 뒀기에, 이야기의 흐름을 자연히 푸는 것은 물론, 설득의 힘마저 있는 오르페우스의 노래가 지하의 벽을 열어젖히는 장면은 감화되어 행동하는 사람들, 어쩌면 광산에서 시작된 노동운동을 상징하는 듯하기도 했다. 모자를 벗고, 자신의 머리를 드러냄으로, 머리를 잃지 않으려 고개를 숙였던 그들이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인지하는 것은 어떻고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이라이 여신들의 뜻대로, 결국 돌아보고야 마는 오르페우스의 어리석음은, 어쩌면 베를 짜서 나누어주었는데, 그 이상을 탐했던 오르페우스에 대한 징벌을 그렸는지도 모르겠다. 독사에게 물려 어찌할 수 없이 끌려갔다는 것 대신 배가 고파 자신이 하데스 타운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는 것이 조금은 다르다라고는 하지만, 신화의 큰 틀을 해칠 수는 없었던 탓에 에우리디케는 거역할 수 없는 운명, 죽음을 타고난 아이인 것이다. 그리고 이 오르페우스의 난관은 인간 오르페우스라고 지칭하며(분명 신의 아들인데 말이다) 인간의 욕망과 의심, 그로 인한 어리석은 결과를 모두 풍자하는 것 같았다. 운명론자는 아닌 탓에, 이 결론이 조금은 무력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러면 어떠한가, 이 작품은 이 작품의 매력이 있는데 말이다. 얼마 전 보았던 연극 일리아드에선 헤르메스가 장난기 많은 전령으로 그려졌는데, 그래서 인간들의 운명을 장난 삼아 바꾸기도 하는. 이번 하데스 타운의 헤르메스는 전령의 이름으로, 지하와 지상을 홀로 자유로이 왔다 갔다 하는 것처럼 밖에서 이들의 운명을 그저 한발 물러서 서술해 주지 않는가(최재림 헤르메스로만 보아서 그런 듯 하지만, 곧 강홍석 배우의 헤르메스도 보고 싶다). 어쩌면 또 같을지도 모른다는 걸 알면서도 만에 하나에 기대 똑같은 삶 속으로 들어가는 한낱 인간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오늘이 오롯이 의미 없지는 않으리라. 그렇게 믿고, 한발 한발 걸어서 지하 광산 어드메를 걷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모이라이 여신들의 유혹에 때로는 속고 피해 가면서 말이다.
동시에 브라스밴드의 트롬본 소리로 시작해 끝을 맺고, 노래를 흥얼거리고, 멜론 뮤직을 플레이하는 걸 보면, 노래는, 음악은 그리고 예술은 힘이 세다. 세월의 무게를 잊게 만들 만큼.
그리고 드디어 셋째 주 토요일, 들떠서 얼른 안국 아지트를 찾았다. 사실 트레바리 북뮤지컬의 좋은 점은 어느 하나를 꼭 집어 말하기 힘들 만큼 많지만, 최애 포인트는 이렇게 단순 후기가 아닌, 책과 사회상에 기반한 딥톡에 있다. 한 작품에 대해 함께 보고, 함께 읽으며, 이렇게 치열하게 토론하는 모임이라니. 뭐든 찍어먹어 본 그 맛이 맞는지, 확인하고 또 확인해야 하는 내 성정에 안성맞춤인 모임이다. 더 좋은 건 공연을 좋아하는 좋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다는 것이지만.
더욱이 이번 하데스 타운은 나 역시도 그랬지만, 공연을 보고 온 멤버들의 호평이 끊임없이 이어졌던 공연이라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을지 엄청나게 기대가 됐다.
뮤지컬 '하데스 타운'은 지하세계의 왕 ‘하데스’는 베이스로, 천상의 목소리 ‘오르페우스’는 카운터테너로 설정하는 등 배우 음역대, 음악 장르, 무대 미술까지 극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로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는데요. 극을 보시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요소를 말씀해 주세요.
뮤지컬 ‘하데스 타운’은 신화에 빗대어 동시대를 이야기하는 극입니다. 이 때문인지 독후감에서 기후변화, 신자유주의 등 다양한 키워드를 보았는데요. 이 극을 보면서 여러분이 읽어낸 현 사회에 대한 은유는 무엇이었나요?
뮤지컬 ‘하데스 타운’의 오리지널 캐스트로서 ‘하데스’를 연기한 배우 ‘패트릭 페이지’는 ‘Why we build the wall’을 부를 때마다 미국, 캐나다, 영국 관객이 떠올린 ‘벽’은 각기 다른 것 같다는 인터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북뮤지컬 멤버분들이 떠올린 ‘벽’과 ‘적’은 무엇인가요?
10월의 독후감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아주 느지막하게야 후기를 올린다(미리미리 쓰자 제발, 극의 감상이 휘발되는 거만큼 빠르진 않지만, 그래도 독서토론 내용도 짧은 메모만으로 상기하기엔 한계가 있다). 대신 그 덕분에 다시 하데스 타운을 상기하는 묘미도 있다. 다행스럽게도 하데스 타운은 두 달 정도 공연이 남았고, 그리워지면 또 보러 갈 수 있으니까 말이다. 어제 지난 1년간의 북뮤지컬, 그리고 뮤지컬 이야기를 떠 올리는 정산을 했는데, 벽이 열리는 연출, Road To Hell과 Wait for Me로 대표되는 넘버들, 올해의 뮤지컬이라고 하기에, 모자람이 없었던 극, 하데스 타운 예찬론이 끝도 없이 펼쳐질 만큼, 훌륭했던 극이라고 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신화를 그대로 해석하거나 그려내지 않고, 신화를 보다 근대적인 곳으로 당겨왔는데, 단지 자본주의라고만 생각했던 광산이 화석연료를 파내는, 즉 산업화와 함께 시작된 지구온난화의 주범으로 지목된다는 데서, 하데스의 다른 이름인 재물의 신 '플루토스'와, 하데스로서 페르세포네를 빨리 데리러 와서, 기후 이상, 한파가 시작되는 이상기후 현상이 함께 엮이는 부분에서, 휴 하고 무릎을 치게 됐다. 나는 고작 광산에서 노동자-자본가의 계급대립밖에는 읽어내지 못했는데 말이다. 그런가 하면, 에우리디케가 난 에우리디케예요 하는데, 여기서는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는 대답에서,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읽어내기도 하시는 걸 보면, 북뮤지컬을 함께하는 멤버들의 생각의 깊이는 어디까지인지 입을 다물지 못할 때가 많다.
'벽'은 이 작품이 미국에서 출발했기에 트럼프가 만들어 낸, 멕시코-미국 간 장벽(2018년 겨울 미국 여행에서 보았던 미국/멕시코 간 장벽의 모습이 떠올랐다. 미국에 물건을 사러 오고, 여권을 내고 긴 터널을 지나 돌아가던 멕시코 사람들과 거대한 장벽에 자리한 무장한 군인들)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했다. 이런 벽을 벽안의 사람들도 하여금 자유를 보장해주는 것이라고 말하는 하데스의 모습에서, 트럼프 하 미국인들의 모습, 그 벽을 쌓아 올리는 것에 찬성하든 그러지 않았든 그들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했다. 기득권의 사회 체제 유지 논리에 의해 지배층과 피지배층으로 이분화된 세상이 그려지도 했다. 이런 벽 들은 결국 한국으로 확장하면 젠더와 자본의 소유를 둘러싸고 우리와 바깥을 나누며, 적과 나(피아)를 나누는 시스템이 되기도 하며, 운명의 여신인 모이라이는 미디어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등, 2021년의 한국에도 적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연출과 은유의 세심함에 매우 놀랐던 극이었다.
뮤지컬 ‘하데스 타운’은 신화를 기반으로 한 만큼, 의상이나 일부 넘버 제목 등에 ‘그리스 로마 신화’의 표상이 곳곳에 숨어있습니다. 여러분이 극에서 발견한 ‘그리스 로마 신화’의 코드를 말씀해 주세요.
뮤지컬 ‘하데스 타운’과 책 속 ‘오르페우스-에우리디케’·’ 하데스-페르세포네’ 신화에는 관계나 인물 설정 등 차이가 있습니다. 달라져서 좋았던 점이나 아쉬웠던 점을 말씀해 주세요.
뮤지컬 ‘하데스 타운’처럼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이야기를 다룬 다른 작품을 보신 적이 있나요? 신화, 뮤지컬과는 어떻게 달랐는지 말씀해 주세요.
리라(수금)를 연주하는 오르페우스에서 모티브를 가져왔기에 젊은 싱어송라이터는 오래된 기타를 가지고 다니며, 동전을 내고 지옥 가는 기차를 타는 것은, 죽은 사람 눈 위에 동전을 올려놓던 관습에서 기인했다는데, 이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강을 건네주는 뱃사공 카론에게 바치는 뱃삯으로 동양의 노자돈과도 일치하는 맥락이라는 데서, 그리고 그 동전 모양의 기차표를 건네는 에우르디케와, 뱀에게 뒤꿈치를 물려 세상을 떠났던 에우리디케를 상징하듯, 작은 새 대 독사라는 가사가 아니어도, 에우리디케의 목에는 뱀 모양 목걸이가 걸려있고, 헤르메스는 제우스의 전령의 신이라 옷소매에 달린 날개라던가, 곡식의 신 데메테르의 딸이었던 페르세포네가 꽃을 따다 헤르메스에게 납치되었던 것처럼, 모피를 물들인 초록색과, 볼 때마다 떠오르는 수많은 상징 등, 그리고 카네이션 꽃을 주는 이유 또한 카네이션의 꽃말이 사랑에 대한 믿음 그리고 노동운 동이라는데서, 하데스에 대적하는 노동운동, 그리고, 에우리디케를 사랑한 오르페우스가 믿음을 유지하지 못해, 의심 때문에 돌아보고야 하는 비극적 결말까지 말이다.
신화를 볼 때면, 원문 또한 그렇겠지만, 이날 읽었던 신화학자 이윤기 선생의 해석 또한 다분히 남성 중심적이다. 일부 표현은 더욱 그렇다. 사실 이 글이 2021년에 쓰였다면, 조금은 더 다듬어지거나 윤색되었을 수도 있겠으나, 이미 카론의 배를 타고, 하데스의 곁으로 간 선생에게 이를 탓할 수는 없다. 그렇게 시대가 변함에 따라 벌꿀을 치는 남자에게 쫓겨 도망치다 뱀에게 뒤꿈치를 물려 비명횡사한 불운의 아이콘 에우리디케가 가난과 역경을 견디지 못해, 자신의 손으로 계약서를 쓰고 하데스의 광산으로 들어가는 자주성의 표현이라던가, 하데스의 Why We build the wall에서 신념과 아집의 대비라던가 하는 부분들 말이다.
그런가 하면 뮤즈 여신의 아들인 오르페우스는 왜 인간인가를 떠올리며, 어쩌면 신중의 신이 누구냐 라는 물음에 그는 인간이니라 라고 답할 수 있는 것처럼, 개별 인간이 아니라 결말을 알면서도 다시 불렀던 그 노래처럼, 계속되어 쌓여온 인간의 역사는 켜켜이 쌓여 인류가 이룩한 문화가 된다는 것을 암시하는 윤회와 인류 문화에 대한 엿봄까지 하데스 타운이라는 잘 만든 뮤지컬 한 편이 은유하고 있는 것은 얼마나 많단 말인가.
지하세계 대신 바닷속 용궁에 다녀오는 귀토 설화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서술자가 있고, 반복되는 삶을 통해 윤회를 보여주는 플롯에서는 장자몽설화, 구미호 이야기, 금기를 깨는 인간을 다루었던 국립 창극단의 '오르페오전' 까지, 이들 연인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들은 얼마나 많았는지.
일리아드의 저자 ‘호메로스’는 서구 문명의 아버지로 불립니다. 그래서인지 북뮤지컬 멤버들이 사랑하는 작품 다수에서도 아킬레우스와 헥토르가 언급되곤 합니다.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고 나니 ‘아, 그리스 신화를 인용한 거구나’라고 생각나는 예술 작품(회화, 조각, 소설, 연극, 뮤지컬 등 전부 통틀어서)이 있으신가요?
독후감에서‘ 이미 어렴풋이 아는 이야기가 많았다’는 소감을 종종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미 아는 이야기였지만 이야기 속에 숨겨져 있던 의미나 피상적으로 알았던 인물의 백 스토리 등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고 나서 새롭게 알게 된 것들을 말씀해 주세요.
많은 멤버분들이 서문 ‘아리아드네의 실타래’를 언급해 주셨습니다. 신화라는 미궁에서 빗장을 풀고, 여러분이 만난 ‘아리아드네’는 누구였나요?
이 덕분에 하데스 타운이 다룬 이야기는 이윤기 역의 그리스 로마 신화에는 1권에 등장하는 열두 편 중 두 꼭지에 불과하지만, 이를 계기로 5권까지의 전편을 읽기로 했다. 어쩌면 더 많은 이야기가 나올 수 있던 것이 저자의 세상을 등짐으로 인해, 신화 이야기가 여기서 끝을 맺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셰익스피어와 그리스 로마 신화를 안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 예술작품에 가까이 갈 수 있는 일인지를 알게 되어서 인지도 모르겠다. 일리아드를 다뤘던 연극 언 일리아드에서 시작해, 여러 작품을 볼 때마다 아, 그로신! 을 외치고 있는 요즘(트레이스 유의 나르키소스, 오이디푸스, 아가사의 미궁, 헤드윅과 플라톤의 향연, 아킬레스, 최근 본 작품들 곳곳에 녹아 있었다) 레퍼런스의 확장이라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서문이 떠오른다. 그리고 이 작품을 알고 나면, 얼마나 많은 작품이 새롭게 꼽힐지 기대가 된다.
어느덧 100번째를 넘어 매일 되풀이하고 있는 하데스 타운의 이야기는 이제 달려갈 길이 지나온 길 보다 적게 남았다. 익숙한 듯 매일이 달라지는 기분에, n차 관람을 하게 되는데, 모이라이 여신들이 제시하는 길 하나하나도, 그 뒤에 나왔던 오르페우스가 끼어드는 다른 신화의 이야기들도 더 많이 알게 되니 더 많이 보이는 요즘이다. 지옥 가는 길이 정말 지옥 같아서가 아니라 한번 빠져들면 쉬이 빠져나올 수 없다는 개미지옥의 비유 인지도 모르겠는 요즘, 함께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을 수 있는 북뮤지컬의 동지들이 있어 행복하고, 하데스 타운을 한 번은 본 누군가가 지금 나의 이 글을 읽는 다면,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고 한번 더 봐주었으면, 작품을 더 깊이 즐길 수 있을 것이라고, 예술을 더 행복하게 즐기는 방법에 대해 감히 추천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