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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학선 Jun 12. 2022

[김학선 박사의 핫플]영주 부석사

부석사 전경(영주시 발간 부석사 리플릿 인용)

평일 아침에 찾아간 부석사 주차장은 넓고 한가로웠다. 부석사로 가는 길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의 명성과 달리 좁고 소담스러웠다. 주변 상가와 음식점 사이로 좁은 길을 찾아 가면 매표소가 보인다. 중간중간에 영주 특산물을 파는 노점상 판매대도 질서 있게 놓여 있지만 아침이라 그런지 거의 영업 전이었다. 왼쪽 길에는 용도를 알 수 없는 돌조각들이 띄엄띄엄 널려 있는데 "이것이 무엇들이지?" 하는 의문을 가지고 가다 보니 '태백산 부석사"라고 쓰여 있는 일주문에 들어왔다.  

필자는 왠지 모르게 전국의 주요 유명 사찰은 많이 다녀왔다고 생각했는데 '영주의 부석사와 구례의 화엄사'를 가보지 못한 것이 마음이 걸렸는지 늘 꼭 숙제하지 않고 학교에 등교한 학생처럼 "언제 간 꼭 가 봐야지!"하는 생각을 하다가 이번 단양여행을 계획하면서 인근 영주 부석사 탐방 계획을 포함시켰다


부석사는 한국 화엄종의 근본도량으로 신라 문무왕 16년(676년) 의상대사가 왕명을 받들어 창건한 화엄종의 수 사찰이다.

의상대사는 당나라에 유학하고 있을 때 당 고종의 신라 침략 소식을 듣고 이를 왕에게 알리고 그가 깨달은 화엄의 도리로 국론을 통일하여 내외의 시련을 극복하게 하고자 귀국하여 이 부석사를 창건하였으며 화엄사상의 발원지가 되었다.  

필자도 꼭 가보고 싶은 부석사라 그런지 다른 사찰과 비슷하게 생긴 일주문이라도 또 다른 감회를 느꼈다.

무심코 "태백산 부석사에 들어왔군"하면서 주변 풍광과 함께 형형색색 길게 걸어놓은 둥근 연등도 반가웠다.

유명 사찰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당간지주가 보였다. 보물 제255호라고 하는 당간지주는 1300여 년에는 아마도 멋진 화엄종의 종찰을 알리는 높은 깃대와 커다란 깃발을 꽂고 그 위용을 만천하에 알리는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이 당간지주는 몽골이나 중국에도 명절이나 축하일에 행사장 중앙에  높은 깃대에 행사를 상징하는 깃발을 꽂고 행사를 진행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우리 신라시대도 이러한 전통을 주변 국가들과 서로 주고받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해본다.

천왕문에 도착하면서 이제 본격적으로 복장도 점검하고 마음도 새롭게 가지고 사천왕들의 검문을 잘 통과해야 하는 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릴 적에 엄마 손에 이끌려 절에 갈 때면 천왕문을 지날 때 너무 무서워서 덜덜 떨었던 기억도 있다.

부석사 무량수전까지 가려면 아직도 여러 문을 지나야 하는데 회전문을 지나자마자 멀리 범종루가 보이는 데 가는 길 양쪽에 비슷하게 생긴 두 개의 3층 석탑이 놓여 있다. 위에 보이는 동탑의 높이는 3.6m,  옆에 놓인 서탑은 3.77m로 쌍둥이 탑으로 신라시대 하대에 조성되었는데 부석사 동쪽으로 200m 정도 떨어진 이름 모를 절터에서 1966년 현 위치로 옮겨왔다고 한다.

범종루는 2층 구조로 1층은 안양루로 가는 통로로 역할을 하고 2층에는 목어, 법고가 놓여 있다. 이름은 범종루인데 범종은 없다. 범종은 옆에 따로 지은 종각에 있다.

이제부터 부석사의 진면목(필자의 주관적 생각)이라고 할 수 있는 안양루를 만난다. 안양루를 거쳐야 바로  무량수전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팔작지붕의 2층 누각 건물로서 석축에 위해 지어졌다.

안양루 중앙 돌계단 옆에 보이는 석축: 부석사를 창건할 당시 비탈을 깎고 평지를 고르면서 만든 것으로 돌의 자연 생김새를 그대로 이용해서  짜맞추어 쌓은 것을 볼 수 있다.

모 방송국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으로 부석사을 처음 봤을 때 바로 안양루에서 무량수전으로 가는 좁은 통로를 보고 신선한 충격을 받은 적 있었다.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들어갈 수 없는 무량수전! 겸허의 자세로 허리를 굽혀야만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옛날에도 이렇게 겸허를 가르치는 선조들의 지혜가 놀랐기만 했다.

필자가 그토록 가고 싶었던 이유 중에 가장 큰 하나이기도 하다.

정면에 보이는 무량수전! 안양루에서 바로 올라오면 국보 제17호 석등을 만난다. 높이 2.97m, 신라시대의 전형적인 팔각 석등으로 상하 비례의 교묘함이나 조각의 정교함에서 신라시대 석등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걸작이다(영주시 발간 부석사 리플릿 인용).


팔각기둥 위에 있는 윗 받침돌에는 부드러운 연꽃잎 8개를 새겼다. 8각의 화사석은 불빛이 나오도록 4개의 창을 만들었고 창이 없는 나머지 4개면에는 세련된 모습의 보살상을 새겼다. 지붕돌 역시 8각이며 모서리 끝이 살짝 들려 있는 모습이다. 바닥돌 위에 있는 아래 받침돌에는 큼직한 8개의 연꽃잎을 표현하였다(부석사 안내문 인용).

이제 부석사의 본전인 '무량수전'을 만났다. 공민왕이 직접 썼다는 '무량수전'이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보였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목조건물 중 하나로 손꼽히는 무량수전! 국보 제18호로 지정(1962년)되었다.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서서...

필자가 젊을 때 읽었던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서서(최순우 저)"라는 책자를 읽으며 감명을 받았던 기둥에 내 몸을 조심스럽게 기대어 본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기둥 표면이 거칠고 갈라졌어도 그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의 열주들 못지않게 당당하고 위풍 있는 배흘림 기둥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속삭여 본다. "오랜 세월 동안 고생이 많았습니다. 아직도 정정합니다. 오늘 이렇게 건강한 모습을 보여주신 배흘림 기둥! 감사드려요".

무량수전은 안에도 특이하다. 일반적인 사찰의 대웅전은 부처님이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데 무량수전의 부처님은 서쪽에서 동쪽을 바로 보고 계신다. 이는 서방 정토 극락세계를 주재하는 아미타 부처를 향해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설이 있다(영주시 발간 부석사 리플릿 인용).


단층 팔작지붕 건물로 실내도 팔자 형태의 커튼을 친을 천정 아래 다른 사찰처럼 좌우에 보살님 없이 홀로 앉아 계셨다.

바로 진흙으로 만든 소조 여래좌상(국보 제45호)이다. 나무로 앉아있는 모습의 골격에 진흙을 붙여가면서 부처의 모습을 표현한 불상이다. 부처에서 품어져 나오는 진리의 빛을 표현한 광배는 불상 뒤편에 따로 나무로 만들었는데 가장자리에 불꽃이 타오르는 모습을 잘 표현하였다. 얼굴은 풍만하고 두꺼운 입술과 날카로운  코 등에서 근엄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부석사 안내문 인용).


통일신라시대 불상 양식의 전통을 이어 제작된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불상으로서의 위엄이 잘 배어 있으며 정교한 제작 기법을 보이는 우수한 불상이다(영주시 발간 리플릿 인용).

무량수전 좌측면에는 한자로 '부석'이라고 쓰인 넓은 반석처럼 생긴 바위들이 놓여 있다. 뜰 부, 독 석이라고 쓰여 있는 '뜬 돌' 바위 때문에 이 절이 부석사라고 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신라 문무왕 1년(661년) 의상대사가 화엄학을 공부하기 위해 당나라에 갔을 때 의상대사를 연모한 '선묘'라는 여인이 있었다.

의상대사는 깨달음을 얻고자 오직 부처님의 가르침에만 마음을 두었다. 의상대사는 중국 장안에 있는 종남산 지상사의 지엄삼장에게서 10년간 화엄의 도리를 배우고 깨달음을 얻은  귀국길에 올랐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선묘가 부두로 달려갔을  대사가  배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선묘는 바다에 몸을 던져 용으로 변신하여 의상대사가  배를 호위하여 무사히 귀국하게 하였다.   신라 문무왕 16(676) 의상대사가 화엄의 도리를 널리 펴기 위하여 이곳 봉황산 기슭에 절을 지으려고  , 많은 이교도들이 방해하였다. 이때 선묘 신룡이 나타나 바위를 공중으로 들어 올리는 기적을 보여 이교도를 물리쳤다. 그래서  돌을 '부석'이라고 불렀으며 사찰 이름도 '부석사'라고 불렀다고 한다.   선묘 신룡은 영원토록 부석사를 지키기 위해 석룡으로 변신하여 무량수전 뜰아래 깃들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조선 영조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위아래 바위 사이에 약간의 틈이 있어 줄을 넣어 당기면 걸림 없이 드나들어 떠있는 돌임을   있다"라는 내용이 실려있다(부석사 안내문 전문 인용).


무량수전 뒤편 작은 전각이 '선묘'의 영정을 모시는 '선묘각'이다.

영주 부석사 삼층석탑

탑은 원래 석가모니의 유골인 진신사리를 봉안하기 위한 축조물을 말한다. 한국의 석탑은 보통 바닥돌의 기단부, 몸돌과 지붕돌의 탑신부, 머리 장식인 상륜부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부석사 삼층석탑은 2단의 바닥돌 위에 3층의 탑신을 세운 구조이다. 기단부의 바닥돌은 각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모양을 조각하였다.

1956년에 석탑을 해체하여 복원하였고 석탑의 파손된 부분은 새로운 부재로 보충하였다. 이때 사리를 놓아 봉안하는 공간인 사리공을 확인하였으나 사리기는 없었다. 다만 기단부에서 소형 철제탑, 불상 파편, 구슬 등이 발견되었다(부석사 안내문 인용).

삼층 석탑뒤에서 바라 본 부석사... 많은 여행객들이 이곳에서 기념사진을 찍는다.

아마도 무량수전은 극락정토에 머물면서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 설파하는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자 먼  곳의 커다란 산도 바짝 다가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온 세상과 극락정토인 무량수전은 하나였다.   

무량수전 뒤편의 오솔길을 오르면 자인당과 응진전이 있다. 자인당에는 부석사 동쪽 폐사지에 있던 석조 비로자나 여래좌상 두 불상(보물 제220-1, 220-2호)과 석조 석가여래좌상(보물 제1636호)이 있다.

응진전은 석가모니 부처님과 그의 제자인 나한을 모신 전각이다.

무량수전 뒤편 자인당과 응진전이 가는 오솔길 앞에 국보 제19호 '조사당'이 있다. 부석사의 창건주인 의상대사의 상을 안치하고 있다.

처음 지은 시점은 분명하지 않지만 고려 신종 4년(1210년)에 단청을 했다는 기록이 있어 그 이전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고려 우왕 3년(1377년)에 다시 지었으며 조선 성종 21년(1490년)에 고쳐 지었다. 출입문 좌우 벽 안쪽에는 고려 후기에 그린 벽화(우리나라 사찰벽화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재석천, 범천, 사천왕이 그려져 있다)가 있다.

일제강점기인 1916년에 건물을 수리할 때 벽화를 떼어 내어 무량수전에 보관하다가 지금은 부석사 성보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부석사 안내문 인용). 소박하면서 간결한 맛배집으로 전통적인 주심포식의 과도기적인 건물로서 양식과 기법이 특이한 건물이다(영주시 발간 리플릿인용)


조사당의 오른쪽에는 선비화(골담초)가 심어져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부석사를 창건한 의상대사가 중생을 위하여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이곳 조사당 처마 밑에 꽂았더니 가지가 돋고 잎이 피었다고 한다.

1300년 이상 조사당 처마 밑에서 비와 이슬을 맞지 않고도 항상 푸르게 자라고 자라고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신비감을 주고 있다(부석사 안내문 인용).


아내와 함께 돌아본 부석사! 수많은 국보와 보물로 이루어진 화엄종의 종찰로서 천년세월을 시간여행한 느낌이다. 눈길이 가는대로 소리가 들리는 대로 내 영혼도 사바의 극락세계로 빠져든다.


#부석사 #영주 #무량수전 #의상대사 #하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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