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현유 Apr 02. 2023

어린 시절에 접한 것들이 인생관에 미치는 지대한 영향

마치 열림교회 닫힘 같은 나의 인식 체계에 큰 공헌을 하셨다

독일 최초의 여성 총리이자 전후 최연소 총리, 그리고 4연임을 해낸 최장기 총리인 앙겔라 메르켈은 지난 2021년, 총리직에 오른 지 16년 만에 사임했다. 독일이라는 나라가 갖는 영향력이 있으니 메르켈의 사임은 전 세계적으로도 화제였지만 나는 그녀의 축복받는 사임 자체보다 다른 점이 흥미롭게 다가왔다. 독일의 일부 청소년들이 메르켈의 사임에 당혹감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어떤 당혹감이냐면 어떻게 여자가 아닌 남자가 총리가 될 수 있냐는 것… 너무 어린 시절부터 총리가 항상 여성이었기에,남성 총리를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안 됐었다는 것이다. 독일 매체 디 벨트에 따르면 메르켈 사임 당시 13세이던 율리안이라는 소년은 “정장을 입고 넥타이를 맨 남성 총리의 모습은 기괴하다”고 말했고, 당시 15세였던 레오니라는 소녀는 “쉽지 않겠지만 남자가 총리가 될 수 있다는 걸 존중하고 받아들여야겠다”고 다소 겸허(?)한 입장을 밝혔다.


​물론 총리가 여자일 수도 있고 남자일 수도 있다. 우리에게도 잠시 ’여자 대통령‘이 있었던 것처럼... 하지만 모태 메르켈이던 독일 청소년들에게 여성 총리의 시대가 끝났다는 건 그 이상의 의미였던 것으로 보인다. 같은 기사에서 한 독일 소년은 “남자는 술도 많이 마시고, 고기도 많이 먹고, 건강하게 사는 것과 거리가 멀고 책임감도 부족하다”고 말했으며 한 소녀는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아무리 봐도 남자는 여자에 비해 진화론적으로 능력이 부족하다”고 편견 가득(?)한 말들을 내놨다. 취임 때부터 퇴임 때까지, 긴 세월 내내 60% 이상의 높은 지지율을 유지해 온 메르켈만 인생 내내 봐 왔다 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 남성 총리에 대한 반발이 생기는 게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메르켈의 후임으로 남성 총리가 임명된 지 2년 정도 되어가고 있으니 지금은 모태 메르켈들의 생각이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만 올라프 슐츠 총리의 지지율로 봤을 때 확신하긴 어렵다.


우리가 모태 메르켈 친구들을 통해 알 수 있는 건, 어린 시절에 접한 것들의 기억은 생각보다 인생 전반의 가치관에 영향을 크게 준다는 것이다. 이를 새삼 깨닫게 된 사건 하나. 몇 달 전 친구를 기다리며 서점에서 책을 고르고 있는데 누군가 나에게 다가왔다. 혹시 신발을 어디서 산 거냐고 물어보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사실, 아까부터 봤는데 친하게 지내고 싶어요. 혹시 번호 주실 수 있어요?”라는 게 아닌가. (약간 뿌듯하게도) 20대 때는 숱하게 들어왔던 멘트이고 여기에 대한 답은 정해져 있으나 나는 잠시 당황했다. 상대가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조금 긴장한 듯 했지만 눈빛에 결단력이 가득했다. “죄송해요. 저 결혼했어요.” 그녀의 표정이 굳었다. “아… 그게 아닌데…” 그리고 그녀는 얼굴이 빨개져서는 자리를 떴다.


그녀가 도망치듯 떠나고 조금 지나서야 정말로 나와 ‘친구‘가 되고 싶었을 수도 있거나, 혹은 사이비 종교거나, 다단계거나, 뭐 어쨌든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 내가 생각한 것처럼 나와 ’연인‘이 되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 수 있겠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나는 당연하게도, 여자가 여자의 번호를 따는 목적이 우정이 아닌 ‘그쪽’에 있다고 생각해버린 것이다. 마치 열림교회 닫힘 같은 나의 인식 체계란…


​그러고보면 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여자와 여자의 연애에 정말 아무런 거부감이 없었다. A의 ‘남자친구’가 여자라는 걸 알게 됐을 때도, B의 룸메가 여자친구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도, C가 술에 취해 나는 바이섹슈얼이라고 털어놨을 때도, 이밖에 정말 많았던 떨림 가득한 커밍아웃의 순간마다 나는 정말 아무렇지 않았다. 당사자가 조금 당황할 정도로. 물론 약간 신기하기는 했다. 엄청나게 호기심을 품을 만큼 많이 신기한 건 아니고, 축구 잘하게 생긴 남자에게만 매력을 느끼는 이성애자 입장에서 모델 같은 남자에게만 매력을 느끼는 이성애자 친구에게 드는 신기함과 비슷한 수준의 신기함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편견 없는 인간은 나뿐만이 아니다. 내 주변의 인간들은 대부분 여성과 여성의 연애에 거부감이 없다. 끼리끼리라고 하기엔 실제 25~35 사이 여성이 성소수자에 가장 열려 있는 세대라는 통계를 본 적이 있다. 과도한 확장성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어쩌면 우리 세대가 세일러문을 보고 자란 게 어느 정도의 영향을 미친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일러문은 단순 마법소녀물이 아니었다. 다들 어린 시절에도 존잘 우라누스와 퀸예쁜 넵튠이 보통의 친구 관계가 아니라는 건 어렴풋이 짐작했지만 어른이 된 뒤 돌아본 세일러문은 그 커플 외에도 온갖 비언들이 등장하는 그야말로 비언 마법소녀물이었다. 물론 그 시절에는 때묻지 않은 순수한 동심과 그 동심을 지켜주기 위한 KBS의 진심을 다한 더빙으로 인해 정확히 여자 둘이 연인 관계라는 사실을 파악하기 어려웠지만, 시간이 지나서는 저절로 깨닫는 때가 왔다. 그리고 깨달아 버렸지만 이미 아무렇지도 않았다. ​모태 메르켈인 독일 청소년들처럼, 어린 시절 접한 세계가 평생의 가치관에 제법 영향을 준 셈이다. 세일러문은 기존 마법소녀물의 문법을 깨는 데에만 공헌한 게 아니라, 동아시아 유교걸들이 유독 여성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 없이 자랄 수 있도록 큰 역할을 한 것이다. 다만 원작자인 타케우치 나오코 센세는 세일러문에 그런 코드를 심어둔 애니판 감독에 큰 불만을 품고 결국 도에이 애니메이션과 파국을 맞이해 이후의 작품에는 이런 코드가 아예 배제된 걸로 안다. 그러나 이미 이웃나라의 90년대생 여자애들은 물들 대로 물들어 벌이고 만 뒤였다.


사실 세일러문만 그랬던 것도 아니고, 그 시절 소녀만화에는 약간 그런 코드들이 들어 있었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지,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는. 하지만 카드캡터 체리의 지수나 천사소녀 네티의 세인트가 체리와 네티를 좋아하는 방식은 분명 우정이 아니었고, 애니메이션을 보는 내내 어린 마음에도 조금 다르다고 느껴질 정도로 암시가 되었다. 성소수자에 편견 없는 세대를 길러내기 위한 작정이었다면 대단한 전략이었다는 생각이다. 현재 디즈니가 온갖 인종을 짬뽕한 리메이크를 내놓고 있는 것도 그런 전략의 일환이 아닌가? 그러나 현실적으로 시대 배경을 고려해보면 뭐 그렇게 깊은 사상을 담았을 것 같진 않고, 세일러문과 마찬가지로 그냥 애니메이션 감독 취향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디즈니처럼 과하게 옳고 그름을 분간하는 내용이 담긴 것도 아닌 걸로 봐서 더더욱. 뭐 덕분에 닫혀벌인 열린교회 같은 인간으로 자랐으니 나쁠 건 없다.


아가 때문에 유아 콘텐츠를 많이 본다. <타요 시리즈>의 정비사는 모두 여자다. 한국의 미키마우스로 등극한 펭수는 성별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아서 젠더리스 스타일링을 한다. <페파 피그>의 아빠는 늘 집에서 아이들을 돌보고 집안일을 하고 엄마는 회사를 다닌다. <세서미 스트리트> 속 머펫들과 인간들이 한 자리에 모여 노래를 부를 땐 지독할 정도로 인종과 성별이 균형을 이루고 있다. <뽀롱뽀롱 뽀로로> 속 남캐는 모두 우직하고 든든하지만 여캐는 얄밉고 잘 삐진다는 지적이 나왔던 게 10여년 전인데, 이제 유아 애니메이션은 오히려 모태 메르켈 친구들처럼 반대의 편견(?)이 생길 정도로 기계적으로 균형을 맞춰 주고 있다. 현재의 아이들에게 지금의 콘텐츠는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세일러문만큼의 파급력이 없을 수도 있고 아니면 너무나 지대한 영향력을 미쳐 기계적 균형에 집착하도록 만들 수도 있고 어쩌면 반발심을 불러올 수도 있다.


지나봐야 알 일이지만 어쨌든 그 모습이 어색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계속 보여주는 게 나쁠 건 없을 것이다. 살다 보면 당연히 성소수자보다는 이성애자를 많이 보게 되고, 여자 정비사와 젠더리스 패션을 한 인간보다는 남자 정비사와 여자 전업주부와 젠더 티피컬한 패션을 한 인간을 더 많이 접하게 된다. 하지만 어느 순간, 만화 속에서만 보던 성소수자를 실제로 마주하거나 여자 정비사와 남자 전업주부와 젠더리스 패션을 한 인간도 접하는 날이 올 수 있다. 그런 모습을 색안경 끼지 않는 어른으로 자랄 수 있다면 좋은 것 아닐까. 열림교회 닫힘 같은 사고방식의 어른이 되는 게 닫혀버리기까지 한 닫힘교회 같은 인간이 되는 것보단 나을 테니까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내가 재수없는 인간이 된 것엔 다 이유가 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