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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유 Apr 12. 2023

강릉 산불, 그리고 자연재해의 공포

이것은 절대, 그 누구도 예비할 수 없는 재해였다

자연재해 때문에 인생에  피해를 입은 경험이 전혀 없었다. 1990년대 후반에 강릉 시내까지 영향을 미친 거대 산불이 있어 엄마가 밤새 도망을 가야하나 고민했다지만 너무 어렸기에 기억이 나지 않고, 기억에 있는 재난이라면 2002 태풍 루사, 2003 태풍 매미 정도였는데 역시   시간 정도 이웃집으로 대피했고 하루이틀 정도 단수가  것을 제외하면 나의 일상은 무탈했다. 이후 학창시절 내내 눈이 너무 내려서 휴교를 했다든가 가족 여행을 갔다 돌아왔더니 집이 눈에 파묻혀 들어갈 길이 없었다든가 하는 정도의 사건은 있었지만  삶에 위해를 가할 정도의 사건은 없었다. 인생  쉽게 살아왔다는 방증이다.

아침 8시 20분 무렵, 어느 때와 다름없는 아침이었다. 감자와 호박 등을 잔뜩 넣고 슴슴하게 간을 한 된장찌개에 질게 한 밥을 말아 밥태기가 온 아가에게 어떻게든 먹이고 있는데, 남동생 김몽상에게 메시지가 왔다. “바람 너무 불어서 펜션에 전기가 나갔어.” 별일이 다 있다고 생각했다. 바람이 부는데 전기가 왜 나가지? 나는 당장 밥을 계속 뱉어내는 아가를 배불리 등원시키는 게 더 중요했기에. 반 공기 정도 먹이고 포기한 뒤 내 출근 준비에 나선 9시 무렵 다시 김몽상에게 카톡이 왔다. “경포에 불 존나 크게 남.”

경포에? 경포에 불이 난 적은 여태 없었다.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렇게 강풍이 부는 날은 아니었다. 학창시절 내내 새로운 클래스에 익숙해질만할 4월이 되면 불어오던 그 바람. 지리 시간에 배운 바로는 ‘푄 현상’의 일종. 덕분에 중고등학교 내내 4월 초만 되면 긴 머리를 질끈 묶은 채 교복 팔을 잔뜩 걷어붙이고 다녔다. 너무너무 강한 바람이 부는데, 동시에 덥고 건조했기 때문이었다. 그 위력을 알고 있기에 살짝 걱정이 됐다. 게다가 경포라니, 우리 가족의 새로운 삶의 터전이다. 그 카톡 이후로 김몽상은 말이 없었다. 그 때 마침 연합뉴스 알람이 왔다. [속보] 강릉 초속 29m 태풍급 강풍속 산불... 강릉 경포 주민센터 대피 문자.

심상치 않았다. 전화를 걸었다.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바람 소리부터 들렸다. 김몽상은 “바빠. 끊어.” 하고는 전화를 끊어 버렸다. 아버지에게 전화했다. 아버지 역시 마찬가지 반응이었다. 그래도 통화가 된다는  무사하다는 뜻이니, 일단 너무 걱정하지 말아야지. 별일 없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일단 아가를 등원시키고, 서울에도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기에 택시에 탔다. 연세대를 지날 때쯤 흥겨운 라디오 방송은 갑자기 뉴스특보로 바뀌었다. 경포 일원에  불이 강풍으로 인해 도저히 진압이  되고 있고, 소방당국이 올해 최초로 최고단계인 3단계 경보를 발령했다는 거였다.


심장이  내려앉았다. 듣고 있던 음악의 볼륨을 낮추고 뉴스에 집중했다. 뉴스에서 언급하는 지명을 따라 네이버 지도를 껐다 켰다, 네이버 뉴스를 껐다 켰다를 반복했다. 회사에 도착해서도 일은 손에 잡히지 않았다. 손이 달달달 떨렸다. 다리도 달달달 떨렸다. 11시에 나온 강원도민일보 기사에는 우리 펜션 바로  상가 뒤로 화마가 타오르는 사진이 실려 있었다. 신랑도 계속 기사를 리젠 중인지 바로 카톡이 왔다. “여보. 여기  편의점  아니지?” 맞다고 대답하자 신랑은 곧바로 누구든 전화해보라고 했다. 하지만 전화가  리가.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김몽상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괜찮아?“ 답장은 없었다.

30분쯤 지난 뒤 드디어 김몽상에게서 답장이 왔다. 땀에 흠뻑 젖고 얼굴 곳곳에 재가 눌러붙어 있는 셀카였다. ”겨우 살렜다.“ 김몽상과 아버지는 직접 바람에 날아온 인근의 잔불을 끄며 나름의 방어선을 구축한 모양이었다. 안도감이 들었지만, 여기서 끝은 아니었다. 여전히 거센 바람으로 인해 헬기는 뜰 수 없었고, 주불 진화는 택도 없다는 뉴스가 계속되고 있었다.

한시쯤 됐을 때 아버지가 또 비보를 전해 왔다. ”2차로 산불이 재발화 됐대. 걱정이다.“ 다시 심장이 오그라들었다. 오후가 되자 소식을 전해들은 친구들에게서, 또 시부모님에게서 연락이 쏟아졌다. 지금은 너무 고마운 마음이지만 그 순간에는 제대로 감사의 마음도 전하지 못할 정도로 굳어 있었다. 아무 일도 못 한 채 뉴스만 계속 리젠 돌리는데, 자꾸 우리 펜션이 있는 인근 랜드마크에 불이 붙었다는 기사가 나왔다. 아빠랑 김몽상 성격상 절대 대피를 갔을 리는 없었다. 무신론자인데 부처님 하느님께 빌었다. 제발, 제발 무사하게 해 주세요.

다행히 3시쯤 되었을  김몽상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지구가 멸망할 것처럼 하늘을 뒤덮었던 잿가루가 제법 날아갔고  화창해졌다는 거였다. 김몽상은 농담도 던졌다. ” 고향이 강릉인데 타버리게 두겠나?“ 그러나 뉴스는 현장의 상황만큼 빠르지는 않다. 네이버뉴스  1  올라온 관련 기사는 여전히 불타는 동네를 보여주고 있었다. 똑같이 1 전에 출고됐으면서 어떤 기사는 진화 65% 이르렀고 어떤 기사는 여전히 진화 10% 머물러 있다고 보도하는 와중에강릉에 있던 친구들에게 카톡이 왔다. ”현유야,  !!“

정말 하늘이 돕는다는 건 이럴 때. 쓰는 말인 모양이었다.

동시에 김몽상에게도 연락이 왔다. ”소나기 쎄레붙는다. 천둥치고 비와.“  몸의 긴장이  풀렸다. 찔끔 눈물이 났다. 기상 예보는 5mm 수준이라 진화에 도움이    같다고 했는데,  5mm짧은 시간에 강하게 내려쏟은 모양이었다. 덕분에 걱정했던 것보다 빠르게 불이 진압됐다. 종일 아무 일도  했지만, 상관없었다. 아버지와 김몽상은 무사했다. 롸끈하게 내려주는 비와 함께 주불이 95%가량 진화되었다는 속보 알람이 떴다. 문득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떠올랐다. 나는  번이나 숨을 가다듬었다. 쓸데없이 커피를 많이 마셨다는 생각을 하면서.​


거대 산불의 원인은 강풍으로 인한 전신주 붕괴였다. 이것은 절대, 그 누구도 예비할 수 없는 재해였던 것이다. 김몽상이 정전이 났다고 말한 시간과 산불 발생 시간이 일치했다.

한 번도, 잘못을 따질 수 없는 문제가 내 인생을 훼방놓으리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얼마나 오만했는지. 자연재해 앞에서 인간은 한낱 먼지에 불과했다. 수많은 피해자가 삶의 터전을 잃었고 누군가는 세상을 떠났다. 긴급재난지역 선포 이야기가 있던데, 하루빨리 지정되어 이재민 분들이 최대한 빨리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길 진심으로 기원한다.

잠시 여러가지 비극적인 생각으로 덜덜 떠는 동안 여러 망상을 했다. 그리고 누구라도 도움의 손길을 뻗어 준다면 어떤 점에서든 도움이  거라는 점에 생각에 미쳤다. 이런 재난이 벌어졌을  인간과 인간 사이, 선의가 가장 합리적인 해결 방안이 된다. 그래서 기부했다. 많은 금액은 아니고,  사실 구호 단체를 100% 항상 믿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작게나마 어딘가에는 도움이   있으리라고 생각하니까.

기부를 요구하려고  글은 아니다. 당연하다. 나는 하루종일 다리 달달 떨다가 일을 하나도  해서 1시에 퇴근한 인간이고 그저 오늘의 마음을 기록하고 싶었다.


다시 한 번 이번 강릉 산불로 피해를 입은 모든 분들이 어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그리고 다시는 이런 자연재해가 일어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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