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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처음 Mar 14. 2019

이주를 결심하다, 영국으로

영국: 처음 가본 이국 땅


나는 스무 살까지 해외여행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넉넉하지 못했던 집안 형편도 그랬거니와, 부모님도 여행이 익숙하지 않았던 분들이었기 때문에 스물몇 살까지 그 흔한 제주도 여행 한 번 해본 적이 없었다. 그랬던 내가 처음으로 밟아본 이국의 땅이 바로 영국이었다(스무 살 때 부모님 몰래 남자 친구와 갔던 일본 여행은 빼도록 하자).


대학 공부와 아르바이트, 연애로 일상을 가득가득 채우며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쉼표 없는 삶을 채워가던 스무 살 초반, 인생의 쉼표도 결국 내가 찍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지 않으면 그저 달리고 달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하고, 직장 생활을 하다가 그렇게 아무 특별한 사건 없이 이십 대가 끝나고 말 것 같았다. 그래서 학교를 잠시 휴학하고, 런던행 티켓을 끊었다.


이 넓디넓은 지구에서 런던을 콕 집어 선택한 건 나보다 일찍 유럽 배낭여행을 다녀온 친구의 추천이었다.

"나는 파리가 좋았는데 파리가 좀 많이 더러워서 너는 런던을 더 좋아할 것 같아."

그렇게 큰 고민 없이 런던으로 가게 됐다. 런던에 있는 스위스코티지라는 동네에서 한 달을 지냈다.




그로부터 10여 년 후...


지금 나는 영국으로 이주를 준비 중이다. 10년 동안 어떤 일이 있었을까?

첫 영국 여행 후 내 인생은 자석에 이끌리 듯 계속해서 영국이라는 나라와의 인연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졸업 전 교내 젠더연구소에서 주최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해 다시 한번 런던을 방문했고, 운 좋게도 졸업과 동시에 국내에 있는 영국 공공기관에 취업했다. 그곳에서 4년 반을 근무했고 내 영역에서 전문성을 키우고 싶어 영국으로 석사과정 유학을 떠났다. 그곳에서 문화정책 및 외교 석사과정을 취득하고 한국으로 돌아오기 직전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일 년 동안 장거리 연애와 국내에서 이 년 동안 동거 끝에 작년 10월 결혼식을 올렸다. 남편은 영국 사람이다.


나는 영국에서 내 인생의 새로운 경험을 많이 했다. 한국의 입시 영어교육에 익숙했던 내가 영국의 다양한 액센트를 경험하고 '딱 한 가지 영어만 있는 건 아니'라는 걸 깨달았고, 그렇게 다양한 인종이 한 곳에 모여있는 것도 처음 피카딜리 서커스에 도착해서 부츠(Boots) 앞에서 여행가방을 옆에 놓고 친구를 기다리며 처음 보았고, 내 인생 첫 프라이드도 런던에서 경험했다. 그런 사회의 다양성이 잭슨 폴록의 물감처럼 내 머릿속에 현란하게 섞이고 터지면서 내 작은 세상을 여러 가지 색으로 물들였고 잔잔하게 때로는 강렬하게 파동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내가 꼭 영국 기관에 취업해야지! 라든가 영국으로 꼭 유학을 가야지! 라든가 영국 사람하고 결혼해야지! 했던 것은 아니다. 그저 내가 지원했던 국내 기업이 나를 원치 않았고 그 와중에 영국 기관이 내 지원서를 맘에 들어했을 뿐이고, 내가 관심을 가졌던 '수도권에 집중된 문화예술 혜택의 지역 분산'이라는 주제에 부합되는 영국의 사례가 많았고 문화정책이라는 주제를 구글에서 검색했을 때 영국 대학이 상위에 노출되었을 뿐이다. 지금의 남편을 만난 것도 나의 결심이라기보다는 우연 아니면 필연에 가까울 것이다.




다시, 시작


"이렇게 살 수도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

최승자 시인은 말했다. 내 나이 서른이 훌쩍 넘었지만, 이 구절은 여전히 유효하다.


나는 내 인생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한 치 앞도 몰랐다. 지금도 잘 모른다. 모아 놓은 돈도 유학과 결혼에 다 썼다. 귀국 후 다니던 직장은 계약 만료로 작년에 퇴사했고, 현재 나는 프리랜서 번역가이자 프로젝트 매니저로 일하고 있다. 지금 내 나이면 대출을 끼고서라도 나름 집과 차도 장만하고, 아이가 있기도 하고, 직장에서는 중간관리자이거나 일찍 사회생활을 한 경우 10년 정도 직장생활을 했을 나이다. 그런데 나는 '0'에서 다시 시작이다. 심지어 6개월 후면 한국이 아니라 이국 땅 영국에서 삶의 새로운 막을 올릴 것이다.


이제 영국은 내게 '처음 가본 이국 땅'은 아니지만, '여러 번 가본 이국 땅'도 이국은 이국이다. 나는 영국인이 아니다. 나는 수도 없이 좌절하고 넘어질 것이다. 하지만 10여 년 전 스무 살 초반의 어린 대학생이 영국에 갈 때 미래를 알 수 없었던 것처럼, 30대인 지금도 이 결심이 내 삶을 어디로 이끌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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