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이주를 준비하면서 가장 걱정되는 것
반면 나도 나만의 고민이 있다. 리스트로 작성할 정도는 아니지만, 남편이 '여름이 왔다'라고 직감하는 것처럼 내 안에 이주에 대한 불안감이 일상에 반영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징후들이 속속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불안감을 인식한다는 것은 나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내 두려움의 이유는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것도, 친한 친구들을 자주 볼 수 없는 것도, 한국 음식을 못 먹는 것도, 언어장벽도 아니다. 내가 가장 두려운 것은 '소수자로 살아가기'로 인해 파생되는 내 안의 여러 감정들이다. 그 감정들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합적이고 무의식적이지만, 굳이 표현하자면 불안감, 우울감, 수동적인 공격성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다.
소수자에 대한 사회 다수 집단의 무감각함은 예기치 못할 때 일상적으로 발현되기 때문에 소수자들은 항상 어느 정도 긴장 상태에 있다. 그렇기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또는 나 스스로를 어떻게 방어해야 할지 불안감을 항상 가지고 있다. 게다가 요즘이 어떤 시대인가. 한 나라의, 그것도 미국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민주당 의원들에게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Go home)'고 하는 시대이니 오죽하겠는가.
영국에서 유학하던 시절에 길을 가다 보면 "곤니치와!" "니하오!"라는 소리를 심심치 않게 들었다. 이런 일이 얼마나 흔하냐면 영국의 한 대학교의 학생회에서 2016년에 '니하오 인종주의에 반대하는 캠페인(Say No to Ni-hao Racism)'을 진행했을 정도이다. 나도 이런 일이 나에게 생겼을 때 처음에는 '나 일본 사람 아닌데', '나 중국인 아니야' 라고 대답한 적도 있었다. 그러다가 결국 나중에는 못 들은 척 지나치게 되었다. 그 수많은 '니하오'들과 '곤니치와'들... 그런데 그런 경험은 차곡차곡 쌓인다. 그리고 결국엔 폭발한다. 어떤 형태로든.
이건 영국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한국에서 그나마 글로벌한 메트로폴리탄 도시라고 여겨지는 서울에서 남편은 여전히 "헬로!" "하이! 얼유 아메리칸?! 얼유 잉글리시?!"라고 소리 지르며 쫓아오는 사람들을 종종 상대해야 한다. 처음엔 남편도 자신은 영국 사람이라고 때론 영어로, 때론 한국말로 대답했다. 처음엔 웃으면서 대화를 나누기도 했지만 요즘은 그냥 못 들은 척 지나친다. 기분이 안 좋은 날엔 "내 피부색 때문에 괴롭히는 것 좀 그만(Please stop harrasing me because of my skin colour.)"하라고 정말 괴로운 얼굴로 혼잣말을 하기도 한다. 그래도 일반적으로 기득권층이라 여기는 백인 남성이니까 이런 것쯤은 넘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건 개개인이 이 문제를 넘길 수 있는 성격을 가졌는가의 문제이지 인종에 따라 구분 지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영국에서 겪은 감정과 남편이 한국에서 겪는 감정은 결국은 같은 종류의 것이다.
소수자는 그 사회에서 잘 드러나지 않는다(under-represented). 영국 정부의 최신 인구조사(2011)에 따르면 영국 인구 중 백인을 제외하고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하는 것은 흑인이 아니라 아시안이다. 물론 아시안 중 인도와 파키스탄 이민자의 비율이 가장 크긴 하다. 그러나 흑인 인구가 전체 영국 인구 중 3.1%인데 동아시아 인구비율이 1.6%라는 것은 무시할 수 없는 숫자이긴 하다. 2011년보다 더 최신 인구 통계가 있다면 좋겠지만 영국 정부에서 인구조사를 10년에 한 번씩 시행하고 있기 때문에 2019년인 지금은 2011년보다 영국의 인구가 좀 더 다양화되었으리라 짐작만 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나 학계까지 갈 것도 없이 영국 내 미디어만 봐도 동아시아인들의 이야기는 많이 나오지 않는다. 영국 뉴스, TV 시리즈, 영화 등에서 종종 보이는 장애인, 성소수자, 동아시아가 아닌 다른 지역에서 온 난민이나 이주민보다 훨씬 덜 노출된다. 몇몇 배우들은 영화나 TV, 드라마 캐스팅에 있어 동아시아계 영국인들이 겪는 편견과 차별에 대해서 꾸준히 언급해왔고 2017년에는 중국이 배경인 연극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역할이 백인 배우들로 캐스팅돼 이를 비판하는 시위가 런던에서 열리기도 했다.
영국 의무교육에서는 아시아의 역사를 거의 다루지 않는다. 실제로 얼마 전에 만난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역사학을 전공한 영국인 친구의 경우, 대학교 2학년 때까지 한 번도 아시아 역사를 배운 적이 없고 대학교 2학년 때 역사학 전공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과목으로 중국 근대사에 관한 과정이 하나 있었다고 회상했다. 세계적인 명문인 옥스퍼드대학교에서조차, 역사학 전공조차 이렇게 얘기할 정도니 일반적인 영국 사람들의 아시아에 대한 이해는 말할 것도 없다. 또한 영국 역사를 통틀어 소수민족을 대표하는 국회의원 중 동아시아 출신은 지금까지 2015년 중국계 영국인 남성 Alan Mak이 유일하다. 보이지 않는 사람, 정확한 기표를 가지지 못한 채 떠돌아다녀야 하는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을 당당히 드러내기 힘들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물론 이런 상황에 저항하고 싸우고 자신을 증명해 보이는 멋진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항상 저항하고 싸우고 나를 증명해야 한다는 것은 엄청난 피로감을 동반한다. 그 피로감은 우울감을 만든다.
The ache for home lives in all of us, the safe place where we can go as we are and not be questioned. (의심이나 질문받지 않고 있는 모습 그대로 안전하게 돌아갈 수 있는 집을 그리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다.)- Maya Angelou, All God's Children Need Travelling Shoes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영국에서 한 번 살아봤잖아. 그런데도 두려워? 그때 좋았다고 했잖아."
"영국에서 좋았던 경험은 없었어?"
영국에서 좋았던 경험은 정말 많다. 프롤로그에도 썼듯이 영국에서 경험한 다양성은 내가 살고 있던 좁은 알을 깨고 나올 수 있는 촉매제가 되었다. 좋은 영국 친구들도 알고 있고, 모두가 하나같이 맛없다고 질색하는 영국 음식도 입에 너무나 잘 맞아서 영국에 사는 동안 체중도 많이 늘었었다. 지금도 영국에 돌아가면 가장 기대되는 것 중 하나가 음식이니까... 그렇지만 그때 내가 소수자로서 느꼈던 여러 가지 감정들은 그 또한 커다란 파동을 일으켰다.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경험한 일이라 잔상이 많이 남는 것 같다. 한국이라는 상대적으로 단일 문화권인 나라에서 중산층 한국인 가정에서 태어나 대학교에 진학하고 취업도 했던 내가 '외국인'이 되어 타국에 살아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으니까.
이런 감정을 다스리고자 요즘은 인종주의나 정체성과 관련된 책들을 읽고 있다. Watching the English는 인류학자인 Kate Fox가 잉글랜드 사람과 문화에 대해서 가볍게 분석한 책인데, 남편과 시댁 식구들에 대해서 좀 더 알고 싶은 마음에 작년 12월부터 읽었던 책이고, BRIT(ish)라는 재치 있는 제목의 책은 기자이자 법정 변호사인 Afua Hirsch가 흑인의 피가 섞인 영국인으로 살면서 느낀 정체성의 문제를 기자 또는 변호사답게 폭넓은 자료와 담백한 글솜씨로 버무려낸 책이다. Why I'm No Longer Talking To White People About Race는 사놓고 아직 읽지 못했지만 올해 안에 읽을 예정이다.
남편의 대학교 친구 중에 인도계 영국인이 있다. 인구의 42%가 비백인이며 영국에서 런던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 행정구역인 버밍엄 출신이다. 증조부가 인도에서 영국으로 이주했기 때문에 이민 3세대인 그녀는 영국에서 태어나 영어가 모국어인 영국인이다. 그녀는 남편과 아주 가까운 친구라서 자주 메신저로 남편과 근황을 주고받는데, 최근에 남편이 내가 이런 걱정을 하고 있다고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었나 보다. 나중에 남편이 그녀의 메시지를 보여주었다.
"맞아, 지금은 영국이라는 나라는 백인이 아닌 사람들이 살기에 가장 좋은 타이밍은 아닌 것 같아."
"저런 책을 읽는 건 정말 중요한 것 같아. 그리고 이 책들이 요즘에 와서 정말 많이 읽히고 있는데 그것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5년 전에는 저런 책들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거든. 나는 한 번도 내가 갈색 피부를 가졌다는 사실이 좋았던 적이 없어."
"내가 그녀의 아시안 동지(fellow Asian)가 되어주면 어떨까?"
작년 겨울 영국에 갔을 때 한 번밖에 만나보지 못했고 그녀는 영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영국인이지만 왜일까. 마지막 말에 왜인지 조금은 안심이 됐다. 내 마음속에 허락도 없이 자리 잡은 두 녀석이 밑도 끝도 없는 우울함과 밑도 끝도 없는 희망이라면, 그녀의 말은 그동안 세력을 넓혀가던 우울이라는 녀석 때문에 있는 지도 잊고 있었던 희망 쪽에 새겨졌다.
이런 희망으로 두려움을 달래며 조금씩 나아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