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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능의 욕망 Feb 04. 2024

세계의 공포 (Terror Mundi)

나폴리 6

노르만의 등장은 로마 제국 몰락 이후 남부 이탈리아를 두고 수백 년간 이어진 세 문화권(비잔틴, 롬바르드, 이슬람)간의 대립을 종결시킨 사건이었다. 11세기 당시 이미 영국과 프랑스 북서부(노르망디)를 손에 넣은 바이킹의 후손은 곧 지중해 역사의 주인공으로 부상하게 된다.


11세기 남부 이탈리아는 풀리아와 칼라브리아 주의 비잔틴, 카푸아, 살레르노, 베네벤토의 롱고바르디아(일반적으로 롬바르드는 이탈리아 북부의 롬바르드족을, 롱고바르드는 남부의 롬바르드족을 가리킨다),시칠리아의 이슬람, 나폴리, 아말피 가에타의 독립 도시들로 나누어져 있었다. 끊이지 않던 이들 간의 세력다툼은 노르만족이 이 지역으로 침투하는 계기를 제공하게 된다. 

서기 1000년 이탈리아 지도 (Wikipedia)

노르만이 이루어낸 남이탈리아와 영국 점령이라는 두 정복사 간의 차이는 후자가 노르망디 영주 윌리엄이 주도한 ‘거국적 정복사업’이라면, 전자는 신분상승의 기회를 모색하던 노르만 소속 망명인사, 상속 재산으로부터 소외된 중간 계급 자녀들에 의해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라는 점이다. 


노르만이 어떤 연유로 남부 이탈리아에 진출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아마투스(Amato di Montecassino)(1080년 집필)에 따르면 최초로 이 지역에 모습을 드러낸 노르만족은 성지순례를 다녀오던 귀향객들이었다. 10세기말 예루살렘에서 고향으로 향하던 40인의 노르만족은 살레르노가 이슬람군의 공격을 받고 있는 것을 목격한다. 그들은 살레르노의 군주 과이마리오 3세(롱고바르드 군주)를 찾아가 도움을 자청하고, 이 소수의 노르만족은 즉각 이 지역의 전세를 바꾸어 놓는다. 전투가 끝난 후 과이마리오는 그들에게 살레르노에 머물 것을 제안한다. 하지만 노르만 순례객들은 이를 거절한다. 차선책으로 과이마리오는 그들의 동족들을 남이탈리아로, “젖과 꿀과 더 좋은 것들이 넘치는 땅”으로 보내줄 것을 간청한다. 전언된 그의 메시지가 전달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후로 지중해 인근으로 속속 집결하는 노르만의 용병들은 곧 이 지역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게 된다. 


노르만 이탈리아 정복사의 맥락을 살피기 위해서 우리는 오트빌 가문의 서사에 주목해야 한다. 성(姓) 오트빌은 노르망디 오트빌 지역으로부터 유래했다. 가문에서 처음으로 이름을 알리게 된 탕크레드 오트빌(980-1041)은 정복왕 윌리엄 수하 영주로서(윌리엄과 조부를 공유하는 같은 가문 출신) 노르만 중간 계급에 속했다.   

노르망디 오트빌 (Wikipedia)


평생 이탈리아에 발을 들여놓은 적이 없는 그가 지중해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된 것은 순전히 그의 아들들 덕분이었다. 이 가문의 역사는 그에게 지나치게 아들이 많았다는 ‘문제’에서부터 비롯했다. 탕크레드는 두 부인에게서 무려 열둘의 아들을 두고 있었다. 다만 그의 영지 오트빌은 열둘의 아들에게 분배하기에는 너무 협소했다. 자연스레 그는 자녀들 사이 필연 벌어지게 될 골육상쟁을 염려했다. 


탕크레드의 권유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결과적으로 아들들은 거의 모두 노르망디를 뒤로하고서 지중해로 향하는 뱃길에 오른다. 가장 나이가 많은 윌리엄, 드로고, 험프리가 첫 주자였다. 1030년대 중반, 이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남부 이탈리아에 상륙한다. 전사민족 노르만의 피가 이들에게 더 진하게 흐르고 있었던 것일까. 탕크레드의 아들들은 곧 노르만군의 맹주 자리를 쟁취해 낸다. 

오트빌 가문 문장


1030년대부터 1050년대까지, 노르만족은 롬바르드, 이슬람, 비잔틴 사이 벌어지고 있던 세력싸움에 용병으로서 활약한다. 어느 쪽에도 별다른 신의를 느끼지 않았던 그들은 때로는 비잔틴 편에서, 때로는 롬바르드 편에서 전장을 누비게 된다. 오트빌 남아들의 활약상이 처음으로 기록된 사례는 1038년 이슬람을 상대로 전개된 비잔틴의 시칠리아 원정이었다(그들은 비잔틴을 지원하기 위해 참전한 살레르노의 군주 과이마리오 4세가 고용한 용병으로 이 전쟁에 참여하게 된다. 당시의 기록은 오트빌 가문의 윌리엄이 노르만 기병을 통솔하고 있었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 원정 중 벌어진 트로이나 전투에서 윌리엄은 직접 시라쿠사의 이슬람 총독을 단창에 해치워버림으로써 승리를 결정짓고, 이후 무쇠팔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이 시점에서 나는 소수에 불과했던 노르만족이 어떻게 이 지역의 최강자로 거듭날 수 있었는지를 살펴보려 한다. 우선 100년간 이어진 그들의 정복사업을 뒷받침한 것은 노르만의 모방과 적응 능력이었다. 특히 전투에 있어서 그 역량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9세기까지만 해도 북해를 주 무대로 하는 바이킹의 병사들은 장비, 전략, 지휘체계에 있어서 로마의 전통을 이어받은 비잔틴군에 비하면 오합지졸이었다. 노르만군의 주력은 가벼운 투구, 갑옷, 방패로 무장한 채 도끼, 투창, 칼을 들고 싸우는 순수 보병이었다. 


반면 11세기 초 남이탈리아에 상륙한 노르만족은 그들의 조상 바이킹과는 달랐다. 많은 학자들이 노르만의 성공을 그들의 바이킹 혈통과 연관해 이해하려 하지만, 노르만족은 2세기에 걸쳐 이어진 프랑크족과의 교류를 통해 인종, 문화적으로 프랑크족과 구별이 어려울 만큼 ‘프랑스화’돼 있었다. 


1066년 정복왕 윌리엄이 참전한 헤이스팅스 전투를 묘사한 바이외 테피스트리


바이킹족이 노략질에 능숙한 보병이었다면 프랑크족을 대표하는 전투방식은 기병전이었다. 그들의 중장기병 전통은 샤를마뉴 시대 이전부터 내려오던 것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중무장한 기사가 창을 겨드랑이에 끼고서 적을 향해 돌진하여 승부를 결정짓는 것이 프랑크족의 전투방식이었다. 


노르만은 이러한 프랑크족 기병을 그들의 것으로 흡수한다. 11세기 중반에 이르러 노르만 기병은 이미 무적이라 불리고 있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몇 가지 요소를 언급할 수 있다. 우선 노르만족은 기병 양성에 있어서 신분에 구애받지 않았다. 주로 기사계급에 기병 전력을 의존하고 있던 서유럽의 관습과 달리 노르만은 다양한 출신 성분의 남아들을 기병으로 육성했다. 일찍이 기병으로 지명된 소년들은 사춘기를 맞이함과 동시에 승마 훈련을 받았고(그보다 더 일찍 훈련을 받기 시작했다는 기록도 있다), 전장에 나설 때 즈음에는 문제없이 전투에 임할 수 있도록 어려서부터 백병전 훈련을 반복했다.   


둘째, 노르만족은 그들의 기병을 다방면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알아두어야 할 것은 프랑크족의 주력부대인 창기병은 중세 전장에서 최강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실상인즉 겨드랑이에 장창을 끼고서 돌진하는 중세 기사는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기병을 상대할 때에만 강력한 존재였다. 반면 일사불란하게 진영을 갖춘 중장보병 앞에서 그들은 사실상 무력했다. 말은 밀집된 진형을 이루고 있는 보병을 상대로 돌진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 가려는 습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노르망디를 두고 벌어진 프랑크-노르만의 오랜 전쟁에서 노르만은 그들의 보병 구성 덕분에 프랑크 기병을 상대로 지속적으로 이득을 보았다. 그들을 상대하기 위해서 프랑크의 기사들은 말에서 내려서 백병전을 벌여야 했다) 반면 노르만 기병은 프랑크족의 기병과 달리 순수 창기병 구성이 아니었다. 긴 세월 이어진 노르망디 정복 전쟁을 통해 그들은 동쪽의 프랑크족뿐 아니라 서쪽의 브르타뉴족과도 자웅을 겨루어야 했는데, 이 과정에서 브르타뉴족의 투창기병 전법 역시 답습하게 된다. 서아시아 유목민족의 경기병 전략을 변형-적용한 브르타뉴 투창기병은 밀집대형으로 적진을 돌파하는 것이 아닌 기동력이 좋은 소수 경기병이 적군의 측면에서 투창을 던져 진형에 균열을 만드는 데 활용됐다(반면 서아시아 기병은 투창 대신 활과 화살을 사용했다). 이는 중장보병, 또는 기병을 상대로 매우 효과적인 전략이었는데, 방패와 체인메일로 몸을 감싸고서 진영을 갖춰 전진하는 중장보병은 정면의 적에게는 강했지만 측면에서의 공격에 비교적 취약했기 때문이다. 노르만군은 투창 기병이 보병 진영의 측면을 두드려 진열을 무너뜨린 후에 창기병이 그 틈을 파고드는 전략으로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게 된다. 


마지막으로 남부 이탈리아의 최강자로 거듭나기 위해 노르만은 비잔틴군으로부터도 교훈을 얻어야 했다. 이탈리아에 갓 도착한 노르만족은(이 시점에서 노르만은 바이킹과 구별돼야 한다. 무엇보다 2세기 간의 교류를 통해 노르만족과 프랑크족 사이 혼인이 폭넓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남부이탈리아사에 노르만족이 종종 ‘프랑크족’으로 기록되는 이유다) 1018년 아풀리아에서 비잔틴을 상대로 반기를 든 롬바르드 영주 멜레의 편에서 전쟁에 참여한다. 이후 벌어진 깐네 전투에서 노르만족은 롬바르드+노르만군에 비해 수적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잘 훈련된 병사들을 적절히 활용한 비잔틴군을 상대로 패배를 맛보게 된다. 그들은 로마제국 전통의 매뉴얼에 따라 소수일 때에는 매복 전략을 사용한다는 전략을 활용하여 적군에 치명적인 타격을 안겨주었다. 노르만-롬바르드족은 거의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경험했던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이 전투에 참여한 3000의 노르만군 중 살아남은 것은 500명뿐이었다. 오로지 잘 훈련된 병사들만이 보여줄 수 있는 전략적 기지에 의해 쓰라린 패배를 경험한 노르만족은 그들 역시 정열 된 통솔 체계를 갖출 필요성을 깨닫게 된다(이후 노르만은 전술한 1038년의 시칠리아 원정에서 비잔틴의 지휘 체계와 기병, 보병 구성을 가까이에서 답습하게 된다)


깐네에서의 대패(1018) 이후 롱고바르디아의 영주들은 비잔틴이 아닌 서로를 상대로 세력다툼을 이어간다. 자연스레 노르만족은 이 전쟁에 용병으로서 참여하게 된다(만약 이와 같은 분쟁이 이토록 잦지 않았다면, 노르만족은 ‘일자리’를 찾아 노르망디로 귀환해야 했을 테다). 언급했듯이 지중해의 노르만족은 통일된 통치 체계를 갖춘 집단이 아니었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의 세력이 아닌 개별적으로 활동하는 다수의 군벌을 이루게 된다. 그중에서 몇몇이 두각을 나타내게 되고,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 바로 풀리아의 윌리엄 오트빌과 캄파니아의 라이눌프 드렌곳이었다.


카푸아의 롬바르드 군주 판둘프 4세는 1027년 노르만 용병을 동원하여 나폴리를 침략한다. 그는 나폴리를 점령하는 데 성공하지만, 잠깐 뿐이었다. 나폴리 공작 세르지오 4세는 3년 후인 1030년 나폴리를 수복한다. 레이눌프 드렌곳의 노르만 용병을 동원해서 이루어낸 성과였다. 노르만의 손에 의해 빼앗긴 도시를 동족의 힘으로 다시 되찾은 셈이다. 다만 공작 세르지오 4세는 카푸아의 판둘프 4세가 다시금 나폴리를 향해 야욕을 드러낼 것을 걱정했다. 결국 그는 그들의 침략을 막아내기 위해 라이눌프를 아베르사 영주로 임명하고 자신의 누이와 혼인을 주선한다. 이는 남부 이탈리아에 노르만이 공식적으로 그들의 영토를 확보한 첫 사례였다. (정략결혼을 통해 강력한 노르만 군벌과 친교를 맺는 생존전략은 이후 이 지역 롬바르드 영주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반복된다. 윌리엄 오트빌 역시 살레르노의 군주 과이마리오 4세의 조카딸과 혼인한다)



캄파니아, 칼라브리아, 풀리아를 두고 지속된 롱고바르디아 군주들의 영토싸움은 누가 더 많은 노르만 용병을 확보하느냐의 경쟁과도 같았다. 1039년 살레르노의 군주 과이마리오 4세가 비잔틴 영토를 제외한 남부 이탈리아 거의 모두를 통일하는 데 성공하는데, 이는 그가 노르만 용병을 확보하는 일에 비단, 금, 말을 아낌없이 지불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물론 용병부대의 중심에는 윌리엄 오트빌이 있었다. 그는 전장에서의 지속적인 승리를 통해 풀리아 공작자리에까지 오르게 된다(과이마리오가 하사하고, 윌리엄 사망 이후 그의 동생 드로고의 대에서 신성 로마 제국의 콘라드 2세가 이 작위를 인가하게 된다). 이탈리아에 도착한 지 10년도 채 되지 않아 외지 출신 용병에서 공작으로의 비상을 이루어낸 무쇠팔 윌리엄의 성공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앞으로 그의 가문이 영위하게 될 영광의 시작에 불과했다. 몇 년 후인 1047년, 그의 이복형보다 이탈리아 역사에 몇 배는 더 선명하게 그 이름을 각인시키게 되는 윌리엄의 이복동생, 로베르 오트빌, 또는 로베르 쥐스카르(영리한, 또는 족제비)가 이탈리아에 상륙한다. 


19세기 프랑스 출신 화가 메리-조셉-블론델이 그린 로베르 쥐스카르

그는 단 열다섯의 기병과 함께 이탈리아에 상륙했다고 전해진다. 그 시작은 순탄치 않았다. 쥐스카르의 이복형들은 후발주자로 지중해를 건너온 그의 등장을 반기지 않았다. 노르만의 군벌들은 모두 적자생존의 법칙에 따라 스스로의 살 길을 모색해야 했고, 로브레 역시 예외일 수 없었다. 형들의 도움을 통해 자기 영역을 확보하려 한 그의 요청은 드로고(탕크레드의 둘째 아들, 윌리엄의 사망(1046) 이후 칼라브리아-풀리아의 공작자리를 이어받았다)에 의해 거절당한다. 결국 스스로 힘을 기르는 것 외에는 별다른 길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로베르는 우선 칼라브리아, 아풀리아에서 산적노릇을 하며 때를 노린다. 그는 곧 인근 지역에서 악명을 떨치기 시작하고, 약탈한 재화를 통해 점차적으로 기병 전력을 키워가게 된다. 


이 시점, 재미있는 전개가 기다린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선 중세 전쟁에 관한 설명이 필요하다. 창기병, 경기병, 중장보병, 궁병(석궁 역시 갖추고 있었다)으로 구성된 노르만군은 백병전에서 뛰어난 전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토 확보를 위한 전쟁에 있어서 백병전은 드물게만 맞닥뜨리는 ‘예외’에 속했다. 이 시기 유럽 내 거의 모든 정복전쟁은 공성전을 통해 결정되고 있었다. 백병전의 강자 노르만군은 매우 결정적인 취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그들에게 비잔틴과 같은 공성병기를 제작할 기술이 없다는 점이었다. 


투석기를 비롯한 공성병기는 높은 성벽 뒤에서 공성전을 펼치는 적을 빠른 시일 내에 굴복시키기 위해선 필수적인 존재와도 같았다. 투석기의 경우 성벽을 위협할 뿐 아니라, 성내로 떨어지는 바위 시위를 통해 시민들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데에도 매우 효과적이었다. 노르만족은 이런 공성병기의 부재를 극복해야 했다. 따라서 그들은 성벽을 에워싸는 진지를 짓고서, 주위 농지를 철저히 파괴하여 보급을 완벽하게 차단하는 초토화 전략을 애용했다. 잔인하게 성들을 ‘말려 죽이는’ 그들의 공성전은 적들에게 있어서는 혐오와 공포의 대상이었다(물론 노르만족만이 이러한 전략을 활용한 것은 아니었다. 성내 보급을 끊는 공성전법은 중세유럽에선 통상적인 것이었다). 초토화된 토지만을 남기는 바람에 전쟁이 끝난 후에도 인근 지역의 주민들은 지속적으로 기근에 시달리기 십상이었다. 이러한 잔인 행위는 결국 로마 교황을 남이탈리아로 불러들이는 계기가 된다. 


커져만 가는 노르만 세력을 견제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던 로마 교황 레오 9세와 그들의 정복사업을 위해 노르만용병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었음에도 내심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던 롱고바르디아의 군주들에게 노르만의 잔인행위는 필요한 빌미를 제공해 주었다. 롬바르드의 군주들은 교황에게 도움을 청하고, 교황은 연이어 프랑스와 신성 로마제국에 지원을 요청한다. 결국 그는 1053년 소집된 연합군을 이끌고 몸소 남하한다. 


교황군이 진군하고 있다는 소식은 노르만족 모두를 한 깃발 아래 결집시키기에 충분했던 듯하다. 그들은 오트빌 가문을 중심으로 교황청과의 결전을 준비한다. 중앙은 풀리아 공작 험프리 오트빌(탕크레드의 셋째 아들, 드로고의 사망(1051) 이후 풀리아와 칼라브리아의 공작 지위를 이어받았다)이, 우측은 아베르사의 공작 리샤르가, 마지막으로 좌측은 소식을 듣고 달려온 로베르 쥐스카르가 맡게 된다. 


결과적으로 Civitate 전투는 쥐스카르라는 영웅을 탄생시키는 무대가 된다. 개전과 함께 아베르사의 리샤르 공작(아베르사를 영지로 하사 받은 라이눌프 드렌곳의 조카)이 지휘하는 기병이 롬바르드군(이탈리아 북부 출신 롬바르드족)이 포진해 있던 교황군의 좌익을 상대로 돌진한다. 투창과 칼로 무장한 리샤르의 기병(경기병으로 추측된다)은 적군 진영 안으로 침투하는 데 성공하고(기습 공격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전열이 무너진 채 완전히 사기가 꺾여버린 롬바르드군은 후퇴하기 시작한다. 


반면 독일 스와비아 출신 중보병을 상대하는 험프리의 우익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그는 아베르사군과 달리 우선 투창 중심의 경기병을 통해 원거리에서 스와비아 보병 진영의 분산을 시도했다. 적군의 전열을 무너뜨린 후 창기병으로 후속타를 가하는 전형적 노르만식 전법을 구상했던 것이다. 그러나 스와비아 보병들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험프리군의 투창 공세를 성공적으로 막아낸 그들은 적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단발에 두 동강 내는 길고 날카로운 칼을 앞세워 노르만의 말과 병사들을 베어내고 있었다. 


패색이 짙어질 무렵 전장에 쥐스카르가 도착한다. 좌익에서 그의 기병과 함께 대기하고 있던 그는 우군의 상황이 어려워진 것을 목격하고서 곧장 스와비아군의 우측을 파고든다. 창과 칼로 무장한 쥐스카르 휘하 기병의 돌격은 그의 용맹성을 잘 보여주는 것이었다. 비교적 방비가 허술한 측면을 공략하는 것이긴 해도 중장보병을 상대로 말을 앞세워 돌진해 들어가는 일은 위험천만한 것이었다. 그 역시 말에서 세 번 이상 낙마하는 위기를 맞게 된다. 그럼에도 쥐스카르는 끝내 돌격을 멈추지 않았다. 결국 롬바르드군 추격을 마치고 말머리를 돌려 복귀한 리샤르의 아베르사군이 전투에 가담하고, 전세는 완벽하게 기운다. 철저하게 궤멸당한 교황군은 심지어 교황 레오 9세까지 포로로 포획되는 참패를 경험한다.


교황청의 망신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교황은 풀려나지만, 교황청은 1059년 오트빌 가문의 풀리아-칼라브리아 공작 작위를 인가함으로써 그 몸값을 치러야 했다. 이제 남부 이탈리아에 노르만의 독식을 저지할 존재는 없었다. 물론 그 중심에는 스스로의 실력을 증명한 쥐스카르가 있었다. 그는 이복형 험프리 오트빌의 사망 이후 노르만의 모든 세력을 통합하여 교황령이남 대부분을 통일하는 데 성공한다. 유럽 전체에서 그의 기병보다 강력한 존재는 없었다는 것이 당시의 평가였다. 수려한 외모에 전형적인 바이킹 남아답게 기골이 장대했던 그를 두고 동시대 사람들은 ‘이상적인 지휘관’이라고 평했다. 얼마 후 영국을 정복하게 되는 정복왕 윌리엄 역시 쥐스카르의 활약상을 되뇌며 자신보다 훨씬 더 지위가 낮은 그보다 용맹함에 있어서 뒤질 수 없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노르만족은 그들만의 변형된 봉건제를 기반으로 이탈리아 남부를 통치했고, ‘적자생존’의 섭리에 따라 지속적으로 뛰어난 통치자를 배출했다. 이 지역을 다수의 영지로 분할했고, 각각의 개별 영주가 이를 다스렸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와 로마 교황이 오트빌 가문에 하사한 풀리아, 칼라브리아 공작 작위는 영주들이 명목상 오트빌가에 종속됨을 뜻했지만(사실 그들은 모두 혈육지간이나 다름없었다), 노르만의 남아들은 그 누구도 쉽사리 머리를 굽히려 들지 않았다. 자치권을 행사하던 영주들을 상대로 지배력을 행사하는 것은 순전히 맹주의 역량에 달려있었다. 


따라서 이 시기 이탈리아 남부 통일의 기반을 닦은 것은 전적으로 쥐스카르의 카리스마였다. 지중해의 최강자로 거듭난 그는 국제 정세에 직접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1073년 그가 지지한 그레고리 7세가 교황으로 즉위하고, 쥐스카르는 당시 유럽 정세를 흔들고 있던 서임권 투쟁에서 교황의 편에서 교황이 황제를 상대로 뜻을 굽히지 않을 수 있는 군사적 지원을 제공했다. 1084년에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앙리 4세가 남하하여 로마에서 그레고리 교황을 포위하자, 쥐스카르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로마로 진출한다. 정예군 3만 6천을 이끌고 아무 문제 없이 로마 시내로 침투하는 데 성공한 그의 노르만군은 3일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황제군을 굴복시킨다. 결국 그는 교황을 구출하여 살레르노로 호송하게 된다. 그는 다시 한번 전장에서 스스로가 무적의 존재임을 증명한 것이다. (다만  전투를 승리로 마친 후 노르만군은 로마를 처참하게 약탈한다. 그들은 로마가 이 시점까지 겪었던 침략 중 가장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고 로마는 이 피해로 인해 수백 년간의 암흑기를 겪게 된다)


그러나 1085년, ‘세계의 공포’라 불리던 주스카르의 사망과 함께 남부이탈리아의 정세는 다시 격동하기 시작한다. 로베르 쥐스카르라는 강력한 구심점이 사라짐과 함께 노르만 영주들은 노골적으로 반기를 들고일어난다(주스카르 생전에도 반발은 끊이지 않았다. 다만 그가 매번 이들을 성공적으로 진압함으로써 절대 군주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쥐사카르의 아들 보에몬도(마크 오트빌)(그는 십자군 원정 역사상 서방의 최고 군사 영웅이었다. 그러나 원정에서 이룬 활약과는 반대로 남부 이탈리아에서는 아버지와 같은 실력을 보여주지 못했다)와 이복동생 루제로 보르사 사이 유산을 두고 치열한 다툼이 시작되었다. 풀리아, 캄파니아의 영지는 오트빌 가문의 영주들에 의해 분열되어가고 있었다. 

19-20세기 프랑스 화가 위젠 르메시에가 그린 쥐스카르와 루제로 1세

이런 상황에서 새로이 노르만족의 지도자로 새로이 부상한 존재는 쥐스카르의 동생 루제로(루제로 1세- 시칠리아 공작)였다. 그는 쥐스카르 생전 가장 중요한 조원자였다. 쥐스카르 사망 당시 루제로는 이미 시칠리아에서 형과 함께 시작한 정복전쟁을 수십 년째 이어가고 있었다. 1056년에 이탈리아에 도착한 그는 형과 함께 칼라브리아와 풀리아 점령을 완성한 후(1071년 비잔틴의 마지막 보루 바리가 함락된다) 형의 뒤를 이어 풀리아 공작의 자리에 오른다. 이후 두 형제는 남부이탈리아를 각각 동서 쪽 양방에서 잠식해 본토의 대부분을 정복하기에 이른다. 이후 루제로는 1061년 개시된 시칠리아 정복사업을 전적으로 맡아 이끌게 되고, 이슬람 세력을 상대로 30년간 전개된 이 과업을 1091년 마무리 지음으로써 통일 시칠리아의 공작자리에 오르게 된다. 


시칠리아의 풍부한 자원을 바탕으로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던 루제로는 쥐스카르의 사망 이후 벌어지고 있던 조카들 간의 세력경쟁을 틈타 점차적으로 본토 내 자신의 영향력을 키우게 된다. 그는  보에몬도와 (루제로) 보르사 사이에서 후자를 지원했고, 보르사는 형 보에몬도를 무찌르기 위해 지속적으로 칼라브리아의 영토를 삼촌에게 넘겨주게 된다. 자연스레 이는 루제리오의 힘을 키우는 결과를 낳는다. 다음 포스트에서는 루제로 1세와 그의 아들 루제로 2세를 주인공으로 연속하게 되는 노르만과 남이탈리아의 역사를 다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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