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2/07 개봉영화 <플랜75>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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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국에서 안락사 도입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시점이다. '안락사' 자체는 내가 초등학생이던 시절부터 토론 주제로 도마에 올라 왔다. 안락사의 역사가 오래된 스위스를 필두로 북미와 유럽 국가들이 안락사를 허용하는 쪽으로 법을 개정하고 있다. 이 보편적 흐름에서 특이하게도 아시아만 동떨어져 있는데, 아마도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인 문화적 차이에서 기인할 것이다.
<플랜75>는 집단주의 그 자체인 일본 감독의 영화이다. 북미나 유럽에서 제작되었다면 큰 반향을 일으키지 않을지도 모르겠으나 아시아 국가에서 안락사를 주제로 하니 디스토피아적 판타지처럼 다가온다.
어느 정도 나이를 먹으면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청소년 때야 내가 영원히 늙지 않을 것 같지만, 이제는 거울을 보면서도 깜짝 놀랄 때가 있다. 한 해, 한 해 나이를 먹어갈 것이고, 언젠가는 죽음을 준비해야 한다.
희한하다. 내 마음과 정신상태는 20대 초반과 크게 다르지 않은데, 육체가 늙고 사회적으로 나이를 먹었다는 것이. 나는 사회가 규정한 정상 궤도의 삶을 살지도 않는데 이따금 나이를 생각해 보면 당황스러워지곤 한다. 누구라도 그럴 것 같다. 20대도, 30대도, 40대, 50대…. 90대인 우리 할머니도 그럴 것이다.
안락사 허용에 대한 관점은 지금도 첨예하게 대립한다. '죽을 권리'가 있다는 찬성과 윤리적인 측면의 반대다. 윤리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건 너무 추상적이라, 나는 그보다 '죽음을 강요'하므로 반대한다는 쪽에 힘을 싣는다. 안락사가 허용되면 아마도 죽고 싶지 않은데 죽어야 할 사람들이 늘어날 것이다. 지금도 노인복지가 개판인 우리나라에서, 왜 안 죽느냐는 핍박이 없을 리 없다. 나는 살고 싶은데 누가 죽으라고 한다면, 그보다 더 큰 비극이 있을까.
그럼에도 죽을 때 죽더라도 곱게 죽고 싶다. 겨우 연명만 하며 살고 싶지 않다. 치매에 걸린다거나 의료기기를 주렁주렁 매달고 살아야 한다면 그 또한 끔찍하다. 적당히 살고 죽을래, 라는 말을 죽어가면서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반대로, 75살에 고통없이 죽겠냐고 묻는다면 나는 바로 오케이 하고 죽을 준비를 할 수 있을지도 장담할 수 없다.
<플랜75>는 초고령사회에 접어 들면서, 청년층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75세 이상의 노인에게 안락사를 권하는 국가정책사업이다.
영화가 시작되고 몇 분간의 장면은 후에 이어지는 장면들과 매우 이질적인데, 한 청년이 집단주의적 선언을 하며 자결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일본인들의 정서를 살짝 내비치는 것이다. 국가를 위해 죽음을 선택한다는, 가미가제식 자결을 보여 주는 건 감독이 일본인이어서일까? 썩 좋지 않았다.
아무튼 이후로는 호텔 청소부로 일하는 '미치'와 그의 친구들 이야기이다. 미치는 78세의 노인이지만 아직 경제활동을 한다. 젊은이들보다야 손이 느리기는 해도 아주 못할 만큼 늙지는 않았다고 믿는다. 플랜75 정책이 발표되고 나서 시청 직원인 '히로무'는 정신없이 바쁘다. 노인들에게 플랜75가 얼마나 좋은 정책인지 설명하고 신청을 받느라 여념없다. 일시금으로 지원금도 받고, 고통없이 죽을 수도 있으니 천국 아닌가.
그저 공무원으로서 나라에서 하는 일을 성실하게 하던 히로무는 삼촌의 등장으로 흔들리기 시작한다. 제 친척이 안락사를 신청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삼촌은 히로무의 부친과 사이가 좋지 않아 장례식에도 참여하지 않을 정도였다. 몇 년 만에 만난 삼촌은 늙고 비루하기만 하다.
각종 교량이나 도로 공사에 참여하며 지역에서 수도 없이 헌혈을 했던 헌혈증을 발견하면서, 삼촌에게도 젊고 반짝이던 시절이 있었음을 안다. 그 삼촌과 지금의 비루한 삼촌이 동일 인물일까. 개인의 연속성을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미치도 마찬가지, 젊은 시절의 미치와 지금의 미치는 동일한 인물일까. 플랜75에 관심이 없었으나 아파트 퇴거 명령이 떨어지고, 직장을 잃으면서 미치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오직 안락사뿐이다. 문자 그대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떠밀리듯 플랜75를 신청하고, 미치는 전담 콜센터 직원인 '요코'와 정기적으로 통화를 한다. 통화를 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에 대하여, 지금의 감정에 대하여 털어 놓는다. 미치에게 결국 요코를 만나고 싶다는 욕망이 생기는데, 요코도 회사 몰래 미치를 만나기로 한다.
같이 볼링을 치는 순간들, 크림소다의 맛, 친구들과 모여 앉아 사과를 깎아 먹는 것, 해가 지는 노을이나 비가 오는 풍경. 그런 사소한 것들이 사람을 살게 만든다. <플랜75>에서는 일상적인 풍경들을 천천히 카메라에 담는다. 미치가 빨래를 걷고, 친구의 집에 놀러 가고, 삼촌이 조카에게 요리를 해 주고, 조카가 삼촌을 모시고 짧은 여행을 떠나는, 어쩌면 지극히도 평범한 일상의 풍경.
플랜75에 참가하는 노인들에게는 지원금이 지급되는데, 초반의 히로무는 그들에게 그 돈으로 여행이라도 다녀 오라고 권한다. 그러나 삼촌과 함께 여행을 하면서 히로무의 감정이 서서히 변한다. 미치를 만난 이후 요코의 감정도 요동친다. 그들이 낡으면 폐기되는 물건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기가 막히도록 당연한 사실을 깨닫기 때문이다.
미치가 플랜75에 사인한 것은 자발적 선택일까, 강요된 선택일까. 바꿔 말해 죽기로 선택했을까, 죽으라고 강요받았을까. 미치는 죽고 싶지 않았다. 옆 침대에서 약물을 투입받으며 죽어가는 남자를 보며 두려워했다.
인간에게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본능이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죽어야 할 만큼 삶이 더 두렵다면,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나에게 안락사를 선택하라고 하면 나는 할 수 있을까. 당연히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것들, 예컨대 영원히 맑은 하늘을 서서히 붉게 물들이는 일몰을 볼 수 없다는 것,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영원히 못 듣는다는 것. 그런 사소한 것들이 마음에 걸린다. 하루만 더, 한 번만 더, 이런 미련이 질질 샐 것만 같다.
그런데 또 늙을 만큼 늙었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노인이 되었을 때 나에게 곱게 죽을 기회가 생긴다면 그 기회를 놓칠까 싶기도 하다.
영화 <미 비포 유>를 함께 보는 것도 좋겠다. 설정도 분위기도 완전히 다르지만 비슷한 주제를 이야기한다. <미 비포 유>에서 촉망받았던 젊은 사업가 윌에 대한 마음과, <플랜75>의 미치에 대한 마음이 완전히 달랐다. 어이없게도 나는 무엇을 응원했나 싶다. 내가 좀 쓰레기 같다는 생각을, 아주 잠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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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랜75(Plan 75)
감독: 하야카와 치에
출연: 바이쇼 치에코, 이소무라 하야토
러닝타임: 113분
개봉: 2024. 02.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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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랩에서 시사회에 초대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