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1년 전에 결혼했고 6년째 별거 중이며 열 살 된 아이가 있다.
나의 글은 별거로부터 시작되었다. 처음 쓴 글은 나는 4년째 별거 중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별거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나는 언제나 아팠다. 장난스럽게 시작하든 조심스럽게 시작하든 이야기를 하다 보면 가슴이 답답하고 뻐근했다. 촘촘한 바늘이 내 속을 찌르는 것도 같았다. 별거는 나에게 실패, 고립, 절망, 불능의 단어들과 함께 왔다. 나는 한동안 별거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쉽게 울었고 반쯤 오그라들었다.
그랬었다,라고 말할 수 있다. 이제는 그 시절을 지나와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나의 별거는 계속되고 있으나 나는 다른 곳에 도착했다. 하나의 시절이 비로소 끝났다.
맨 처음에, 그 사람과 나는 비슷했다. 서른을 넘겼지만 어른스럽지 않았다. 가벼운 자리에서 처음 만나 두 번의 계절을 사귀었지만 서로에 대해 여전히 잘 몰랐다. 사랑에 대해서는 모르면서도 아는 척을 했다. 여러 가지 주변 사정들로 서둘러 결혼에 이르러야 했을 때, 결혼이야말로 다들 그렇게 확신 없는 가운데서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때에는 내가 아는 어느 누구의 결혼도 특별하지 않았다. 다들 어떤 절차처럼 그 일을 해냈고 그들은 신나지도 뜨겁지도 않게 살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처럼 우리 사이도 적당히 따뜻하고, 서로에게 괜찮은 조건에 시의적절했으므로, 결혼이 그 해 그 가을에는 가장 자연스러운 일로 보였다.
그는 타고난 기반 없이 스스로 성공한 사람이었다. 사업적인 재능이 있었다. 매달 벌어들이는 돈이 많았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그 사람을 남편으로 선택할 이유가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즈음 나는 경제적인 아슬아슬함이 지겨웠다. 벌면 써야 하고 쓰고 나면 남는 게 없는 정도의 평범한 월급쟁이였다. 어떤 기반도 능력도 없어서 그 이상을 이룰 수 없을 것 같았다. 내 가족들의 사정도 비슷했으므로, 내가 그 사람과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가장 먼저 그의 경제적 능력에 대해 궁금해했고 대답을 들은 후에는 내게 시집 잘 가는구나, 했다. 단지 오랜 친구들만이 갑작스러운 결혼 소식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무 말도 잇지 않았다.
신혼 기간이 거의 없이 아이가 태어났다. 희고 작은 여자아이였다. 나는 결혼과 곧 이어진 출산으로 인해 자아가 연달아 붕괴되는 것을 느꼈다. 느꼈다고는 하지만 사실 그건 먼 시간 뒤에 그때의 나를 떠올려 생각한 것이다. 서른셋에 아기를 안은 나는 점차 피폐해지고 협소해지고 메말라갔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한 사람이 삽시간에 그렇게 되기에 결혼과 출산이라는 사건은 충분한 이유였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비슷하게 살았다. 나는 그의 면면을 이해할 수 없었고 그도 마찬가지였지만 주말이면 유모차를 끌고 산책로를 걷고 마트에 가고 외식을 했다. 우리가 서로를 잘 알지 못하면서도 부부라는 이름으로 해야 하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이 적지 않았다. 자격이 주어진다는 것은 진정성과는 별개의 일이었다. 아내와 남편이라는 자리에 알맞은 얼굴을 하고 그 의무에서 별로 이탈하지 않았다.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 그는 밖에서 나는 안에서 결혼의 날로부터 각자에게 주어진 과제를 해나가려 분투했다. 나는 때때로 크고 작게 외로웠지만 비슷한 처지의 아기 엄마들과 육아 정보를 교환하고 남편 흉을 보고 키즈카페에 다니면서 허방과 같은 외로움을 이렇게 저렇게 피했다. 우습고 가볍게 말하면 그 어떤 일들도 입 밖에서는 그저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았다. 남편과의 불화, 시댁의 불쾌한 언행, 경력단절과 자존감 상실, 체력과 정신력 소실에 대한 불안.. 아기 엄마들 모두가 조금씩은 괴로움 속에 있다는 것을 확인할 때 내 것이라고 그다지 특별하지 않았고, 그래서 참을만했다.
아이가 태어나고 일 년 뒤에 그의 사업이 잘못되기 시작했다. 나는 그의 일에 대해서 잘 몰랐고, 그저 이제는 전처럼 돈을 벌어 올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만 이해했다. 모아둔 돈은 빨려나가고 차를 팔았다. 가정 경제는 어려워졌지만 안에 있던 사람이었던 나는 별로 실감하지 못했다. 아이의 아빠는 ‘바깥사람’으로서의 자신의 책임 영역이 위기를 맞자 힘들어했다. 실감하지 못하는 내가 한심하고 야속했을 것이다. 나는 그저 그가 어떤 방법으로든 잘 해낼 것이라만 생각하며 내 할 일을 했다.
글쎄, 더 뜨겁게 사랑하여 결혼한 사이였다면 어땠을까. 그 위기를 우리가 극복할 수 있었을까. 어려움 속에서 오히려 단단해지고 끈끈한 동지애가 생겨났을까. 그 시절을 함께 견딘 뒤 서로 닮은 주름을 훈장처럼 새기게 되었을까.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냈을까. 그건 이제 내가 영영 알 수 없는 일이 되었다.
경제적 위기가 자존의 위기로 번진 것인지, 그는 조금씩 달라져 갔다. 그것은 본인은 결코 인정할 수 없고 상대는 분명하게 느낄 수 있는 미묘하고 감정적인 것들이었다. 신경질적이고 옹졸해졌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한쪽이 날카로워지면 한쪽은 움츠리게 된다. 힘은 본능적으로 균형을 이루려고 했다. 집안에 구름과 같은 기운 두 덩어리가 매일 소리 없이 엉기고 뒤틀리는 것을 나는 볼 수 있었다. 물러나는 현명함 같은 건 내가 가진 자질이 아니었고, 당당히 맞서는 전투력 같은 것도 새끼 품은 동물처럼 아이를 낳고 사그라들었다.
그의 불어나는 스트레스, 그의 길고 긴말, 짜증, 무관심, 비난과 푸념, 본래 과격하지 않은 그였기 때문에 날카롭고 거칠지는 않고 마치 무딘 바늘 같아서 처음엔 아프지 않았다. 사업하는 사람이니 덮어놓고 이해해 주라는 엄마의 말, 아이 생각해서 참으라는 친구들의 말, 그런 말들이 목구멍으로 솟아 나오는 나의 말들을 꾹꾹 눌렀다. 어느 날인가부터 그가 돌아와 삑삑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에 나는 불안을 느꼈고 자는 척을 했다. 그러는 내가 참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반복되고 반복되면 무딘 바늘들도 아플 수 있다. 나는 그것들을 모조리 삼킨 것처럼 답답한 통증을 안고 지냈다.
두 해가 지나 봄이 되었다. 파경과는 어울리지 않는 날에 또 한 번의 다툼이 있었고, 그는 집을 떠났다. 여느 때와 같은 충돌이었으므로 나는 그것이 내 가정의 형태를 영영 바꾸어 버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아이는 네 살이었다. 인형처럼 귀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