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드는 건 어렵지 않았는데 새벽에 두어 번 잠이 깼다. 그래도 얼마 전 큰맘 먹고 매트리스를 새로 바꾼 덕인지 전보다 잠이 훨씬 편안해졌다.
잠에서 깰 때마다 건너가 들여다본 아이는 베개를 품고 한껏 웅크린 채 잠들어 있다. 아기 때 자던 습관 그대로다. 이젠 길어진 다리가 불편해 보여 손대려다가 깨울 까 싶어 그냥 둔다.
고양이는 내가 깨어 움직이면 보초병처럼 어느새 곁에 와 있다. 어두운 집안에서 그 애의 눈동자는 별처럼 홀로 빛난다. 너도 다시 자,라고 나는 그 애를 달래며 내가 잠든다.
아직 이른 시간인데 결국 완전히 깬다. 밤새 비가 추적거렸는지 창이 젖어있다. 며칠째 아침 하늘은 저녁처럼 회색빛이다.
옆집은 오늘 이삿날인가 보다. 일찍부터 분주한 소리가 들린다. 청테이프 쫙쫙. 커다란 상자가 쿵쿵.
맹물이 싫어서 뜨거운 곡물차를 끓인다. 그러는 사이 아침이 서서히 모두 열린다.
차를 끓여둔 채로 나는 소파에 좀 앉아있다가 졸고 만다. 아이가 늦었다며 서둘러 방에서 나왔을 때야 나는 퍼뜩 정신이 든다. 못 찾는 걸 찾아주고 뭘 좀 먹고 가라고 타이르면서 그 애의 짜증 섞인 분주함을 지켜본다.
아이는 나를 한 번도 제대로 보지 않은 채로 현관을 나선다. 그 애는 십오 분 전에 일어난 사람 답지 않게 눈이 또랑하고 얼굴이 뽀얗다. 조금도 낡지 않은 어린 사람은 그런 건가보다. 나는 손을 흔들지만 언제나 현관문은 너무 빠르게 닫힌다.
뉴스채널을 틀까 하다 관두고 유튜브 플레이 리스트를 찾다가 그것도 관둔다. 귀찮아진다. 읽다만 책이 탁자에 쌓여있다. 요즘은 책 하나를 끝까지 읽지 못한다. 자꾸 딴생각이 끼어들어 글을 좀처럼 따라갈 수 없다. 이리저리 뒤적이다 만, 결말을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이 방치된다.
핸드폰에 광고메시지가 여럿 도착한다. 070으로 시작하는 번호로 전화가 온다. 다 식어버린 차를 그냥 미지근하게 마시며 메시지를 하나하나 눌러 하나하나 지운다.
이제 9시를 막 지난 시계를 바라보며 짧은바늘이 한 바퀴 를 휘 돌아가는 상상을 한다.
오늘 내게는 할 일이 별로 없다. 어쩐지 그래야 할 것 같아서 그렇게 해두었다. 무슨 일이든 생길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그것이 예비인지 기대인지 모르겠지만.
잠잠하고 한가할 뿐 실은 어떤 조짐도 보이지 않는데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나는 이렇게 아침부터 텅텅 빈 하루가 막막해진다.
간밤에 검은 점들이 번져버린 바나나 하나를 송이에서 떼어다 검은 점에 손대지 않고 껍질을 벗긴다. 검은 점을 만지면 꼭 손에 묻을 것만 같다. 바나나 속살이 검게 물들지 않는 것이 언제나 신기하다.
부드러운 바나나 과육을 입안에서 뭉개면서, 9시 15분이 되는 것을 본다. 시계는 오래된 자전거 바퀴 같다. 어떤 날은 삐걱댄다. 먼 길을 달릴 때 바퀴는 몇 번 돌까. 그중 한 바퀴는 아무 인상도 의미도 남기지 않지만, 자전거가 멈추지 않고 가고 있다는 사실을 위해 필요하다.
그러니까 오늘은 그런 식으로 흘러갈 모양이다. 다른 날보다 조금 느리고 다른 날보다 태연하게. 여느 날처럼 심상하게.
오늘은 나의 생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