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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남자 Feb 02. 2021

나보다 먼저 고양이에게 임플란트를 해주고 싶었다

늙어가는 고양이는 내게 "슬픔"이라는 감정을 선물한다.

나의 둘째아들 단오. 쥐를 잡아을 때마다 5파운드씩 주곤 했다.


 정확히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아마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한 참 후부터 내 눈에서도 눈물을 구경할 수 있었다. 슬픔이라는 감정이 자주 일렁였고 그때마다 눈물이 핑 돌거나, 심할 경우에는 장대비처럼 쏟아졌다. 주책맞다고 생각하며 당황하곤 했었는데, 돌이켜보니 슬픔을 슬픔으로 받아들이는 공감능력이 복원된 것이었다.


 공감 능력이 복원된 이후부터, 여행 때마다 아이에게 주문했던 "Man should be strong!(남자는 강해야만 한다!)"이 얼마나 잘못된 아빠로서의 신념이었는지 자주 반성하게 되었다. 아무리 내가 거칠고 험난한 영국의 이민사회에서 이방인으로서 성공하기 위해 몸부림쳤다고 한들 말이다. 거의 맨손으로 영국에 이민 와서 정착하는 과정의 고생을 어찌 다 말로 할 수 있으랴!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나만 믿고 따라온 아내에게도 항상 미안한 마음뿐이다. 그래서 시종일관 나의 머릿속에는 "남자는 강해야만 한다는 신념이 콘크리트나 아스팔트 덩어리처럼 굳어져서 나의 뇌를 감싸고 있는 해골바가지의 뼈만큼이나 단단해졌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인 아이에게까지 그 신념을 주입하느라 여념이 없었던 나는 모든 것들을 잃고  후에야, 남자도 감정에 충실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중에서도 슬픔이라는 감정을 말이다.


 "아빠! 잘 지냈어? 지난주에 단오는 이빨을 세 개나 뺐어. 그동안 이빨이 아파서 밥을 잘 먹지 못했는데 빼고 나서는 밥도 잘 먹고 다시 활기찬 고양이가 되었어. 그리고 창문의 캣 도어를 오르내리는 게 버거워져서 계단을 만들어 주었어. 체중도 8킬로대에서 이젠 7킬로대로 많이 빠졌어. 그래도 여전히 덩치가 웬만한 고양이 두 배는 되어 보여. 장모의 턱시도 고양이라서 더 커 보일 거야. 요즘 단오에게 아빠가 런던으로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들려주곤 해. 언젠가 기회가 되면 화상통화로 단오와 이야기해봐. 그런데 단오가 아빠를 알아볼 수 있을지 모르겠네. 하하." (이상은 한국말을 못 하는 아이와의 통화에서 아이가 영어로 한 이야기를 한국어로 옮김.)



 나에겐 한국 나이로 15세가 된 상당히 연로하신 고양이가 있다. 이름은 단오다. 그는 수컷이고 한 살이 되던 해에 중성화 수술을 해서 무자식이다. 내가 봐도 상팔자의 고양이다. 자식들이 어디서 잘 지내고 있는지 걱정할 필요가 없다. 실제로 단오는 걱정이 전혀 없어 보인다. 단오는 늘 검은색 외투를 입고 다닌다. 신발은 흰색 스니커즈만 신는다. 목덜미부터 배 부분은 나름 멋을 내려고 항상 흰색 티셔츠나 남방을 입었다.


 단오란 이름은 생일이 5월 5일이어서 붙여진 이름이지만 브랜드명인 지오다노의 줄임말이기도 하다. 그는 2007년 5월 5일 생이니깐 몇 달 후면 정확히 만 14세가 된다. 사람 나이로 치면 환갑 진갑 다 지나서 팔순쯤 되는 어마 무시한 나이이기도 하다. 단오는 영국 런던의 빈민 가중 한 곳인 Tooting Brodway 출신이다. 이곳은 현재 런던시장인 아미르 칸의 출생지이기도 하다. 참고로 그는 파키스탄 이민자 출신의 자녀로, 무슬림(이슬람교도)이 런던 시장이 된 입지전적인 놀라운 인물이기도 하다. 훗날 영국 PM(총리, Prime Minister)을 노리고 있는 야심가이다.


 반면 우리 단오는 정치적 야망은 없지만 아직도 사냥을 즐긴다(고 한다.) 인도어가 아닌 아웃도어 캣인 그는 마을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적어도 1주일에 한두 번은 새나 쥐를 잡아온다. 워낙 사냥에 능한 녀석이라 나이가 들어가도 사냥 본능은 어쩔 수 없나 보다. 정치인들이 나이가 들어도 야심을 내려놓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대표적인 사람이 트럼프 대통령일 것이다. 물론 오래전 팔순을 넘기고 90대 중반이 된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도 질 순 없다. 영국의 왕위 계승자인 찰스 왕세자는 머리가 하얀 70대 노인이 되어버렸다. 단오를 생각하면 나이 든 야심가들이 먼저 떠오르는 이유는 아마도 그의 욕심(사냥 본능)은 사그라들거나 포기할 수 없는 DNA에서 나오기 때문일 것이다.


 단오와 오랫동안 같이 살면서 수많은 추억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3년간의 추억을 빼놓을 수는 없다. 내가 만 3년을 런던에서 역기러기 아빠로 혼자 지낼 때 나의 둘째 아들이 되어 준 든든한 녀석이었기 때문이다. 역기러기 아빠란 아내와 아들을 한국으로 보내고 아내의 생활비와 아들의 국제학교 학비를 대주는 경우를 말한다. 이 용어는 전에도 있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아마도 내가 처음 사용한 말일 듯 싶다. 아내의 갑작스러운 질병으로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일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먼 훗날 나와 단오의 이별을 초래하고 말았다. 그래서 지금은 같은 런던 하늘인데도 불구하고 단오와 나는 볼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힘들고 슬픈 일이다. 2년 반 만에 돌아온 런던이지만 단오가 살고 있는 나의 집으로 달려갈 수가 없다. 단오는 한 때 나의 아내였던 엄마와 첫째 아들인 형과 같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형은 런던 시내에서 두 번이나 만났지만 단오는 그럴 수가 없다.


 아내와 아들이 한국으로 떠나고 나는 만 3년을 혼자 지내야만 했다. 갑작스러운 아내와 아들과의 이별은 내게도 어려운 날들이었다. 아들의 중학생 시절 3년을 빼앗긴 기분이었다. 그 3년의 세월 동안 나에게도 질병들이 찾아왔다. 그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것은 우울증이었다. 그 우울증을 견디게 해 준 것은 나의 둘째 아들인 단오였다. 단오는 항상 말이 없지만 의사 표현에는 상당히 적극적이었다. 엄마와 형이 떠나간 공백을 단오 또한 느끼고 있었다. 우두커니 창밖을 내다보는 일이 점점 많아졌다. 하지만 엄마와 형의 부재를 설명할 방법이 내겐 없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기사단장 죽이기에 등장하는 "고양이님"은 말을 할 수 있었지만 단오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었다. 하루키는 고양이를 음악만큼이나 좋아해서 그의 소설이나 에세이 곳곳에는 고양이가 은근슬쩍 등장한다. 대놓고 고양이를 책 제목으로 삼은 소설도 많다. "고양이를 버리다" 나 "장수 고양이의 비밀"처럼 말이다. "하루키, 일상의 여백"이란 에세이 부제는 "마라톤과 고양이 그리고 여행과 책 읽기"이기도 하다.



 오늘은 아들과 처음으로 화상 통화라는 것을 한 역사적인 날이다. 그동안 텍스트를 주고받거나 가끔 만나기도 했는데 런던의 사정이 이젠 그마저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화상 통화를 하게 된 계기는 내가 사용 중인 아이패드 프로가 리셋 과정에서 "엑티베이션 락"이 걸려서 풀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문제의 발단은 나의 애플 아이디가 한메일이었다는 점이다. 한메일은 영어권 메일과 종종 문제가 발생한다. 이번 애풀의 이메일 인증 과정에서처럼 말이다. 애플은 메일을 보냈다고 하고 다음 측에선 애플로부터 받은 메일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구원투수로 아들을 등판시킨 것이다.


 아들은 어려서부터 애플 마니아이기 때문이다. 아이폰부터 애플 워치에 맥북과 애플 모니터 등등.. 애플에서 나온 디바이스라면 항상 최신 모델을 탐닉하는 애플의 로열 고객인 것이다. 그런 아들도 한메일 문제는 풀 수 없는 난제였다. 한 시간 가량 화상 통화를 하다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자신의 대학 진학 문제를 도 있게 이야기했다.


 아이가 건축학을 전공하고 싶다는 말도 아이의 입을 통해서는 처음 들었다. 아이가 뭘 전공하든, 좀 더 솔직하게 말하면 대학을 가든 가지 않든 단 한 번도 물어보지 않았다. 아이에 대한 압박은 엄마 하나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아빠가 아이에 대해 무관심으로 일관했다는 비난을 듣고 싶진 않다. 나도 나름 속으로는 궁금하기도 했고 때로는 전전긍긍하며 아이가 영국의 명문 대학에 들어가길 바랐기 때문이다. 나도 어쩔 수 없는 속물 아빠라는 걸 인정한다. 하지만 아이에게 한 번도 표현하진 않았다.


 내가 표현한다고 상황이 바뀌거나 아이가 자극을 받아서 좀더 좋은 대학에 들어갈 확률이 높아지지도 않기 때문이다. 괜한 스트레스만 줄 뿐이다. 오늘은 그런 이야기를 처음으로 진지하게 했다. 아이도 처음으로 속내를 털어놓았다. 기쁘고 대견했다. 아이가 한 뼘 성장해서 이젠 정말 어른이 된 듯한 기분이 들기에 충분했다.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단오의 안부를 아빠에게 전해 준 것이다. 물론 아이가 영국의 명문대학 중 하나인 UCL(University Collage London)에 지원했지만 오퍼를 받지 못했다는 말에 집체만 한 슬픔이 와락 달려들었지만 말이다.



 단오가 지난주에 이빨을 세 개나 빼야 했다는 말에 와락 슬픔이 밀려왔다. 아이와의 화상 통화에서 슬픔을 숨기려 잠시 화면에서 얼굴을 돌려야 했다. 나도 현재 어금니를 세 개나 빼고 임플란트를 하려고 기다리는 중이다. 영국에서 임플란트 비용은 한국의 두 배 이상이다. 출국 전 한국에서 임플란트를 하고 왔어야 했지만 임플란트 후 사후관리를 받을 수 없어서 그냥 와야만 했다. 어금니 세 개가 빠져나간 나의 입안은 말 그대로 아비규환이다. 음식을 제대로 씹을 수도 없거니와 영어 발음에도 상당히 지장이 많다. 나는 런던의 북쪽에 위치한 정육점에서 영국 손님들을 매일 상대해야 한다. 그런데 구강구조에 이상이 생기면서 그렇지 않아도 시원치 않은 영어 발음에 더욱 문제가 생긴 것이다. 다행히 단오는 말을 하지 않기 때문에 살아가는 데 큰 지장은 없지만 그래도 임플란트를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영국에 고양이 임플란트를 해주는 곳이 없겠지만.


 슬픔이란 감정은 상당히 왜곡되는 경향이 있음에 틀림이 없다. 몇 년 전 어머니 장례식장에서도, 지난해 아내와의 이혼 과정에서도 슬프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모든 것이 자연의 순리대로 돌아갈 뿐이라는 생각은 나를 눈물도 없는 몰인정한 놈으로 몰아갈 뿐이었다. 죽고 이혼하고 많은 질병으로 시달리는 일 자체도 엄연한 일상으로 받아들일 뿐이었다. 심지어 어머니가 화장되어 하얀 가루로 변한 모습을 보면서도 나는 눈물이 나지 않았다.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에 나오는 주인공 뫼르소처럼 말이다. 어머니가 정확히 언제 죽었는지도 모르고 심지어 장례기간에 여자 친구와 섹스를 즐겼던 뫼르소와 나는 하나도 다를 게 없는 인간처럼 느껴졌다.


 한 줌의 가루로 변한 어머니의 남골함을 내장산 인근의 선산에 내 손으로 직접 묻으면서 생각했다. 몇 년간이나 뇌졸중의 후유증으로 고생하다 돌아가신 나의 어머니는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단지 자연으로 돌아간 것뿐이라고. 어쩌면 너무 슬퍼서 눈물이 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뫼르소가 햇볕이 너무 강렬하다는 이유만으로 아랍인을 죽이고 사형 선고를 언도받았을 때 판사의 판결에 영향을 미친 것은 바로 그의 슬픔에 대한 인지와 공감능력이었다. 프랑스 제국주의 확장에 기여했다는 비아냥을 듣는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까뮈를 좋아하는 이유도 바로  슬픔이라는 감정을 처리할 줄 아는 그의 탁월한 식견 때문이었다. 심지어 나의 카톡 프사도 알라딘에서 주는 쇼핑백에 그려진 까뮈의 사진이니 더 말해 무엇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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