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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런던남자 Jan 26. 2023

언제든 어디로든 떠날 수 있는 자유

양뗀 없지만 유목민처럼 살고싶어 #2



"연금술사"라는 책이 있다. 브라질 출신의 작가 파울로 코엘료가 쓴 책으로 전 세계에서 2억 5천만 부 이상이 팔렸다고 한다. 주인공인 산티아고가 자유롭게 살기 위해 성직자의 길을 포기하고 양치기가 되어 세상을 여행하는 내용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간절하게 원하면 우주까지 나서서 도와준다고 한다. 다만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언가 필요한 행동을 하고 노력해야 한다. 산티아고가 보물을 찾기 위해 한 첫 번째 일은 떠나는 일이었다. 그 자신을 빼고는 망설이는 산티아고를 붙잡는 사람은 전혀 없었다. 그 사실을 깨달으면서 그의 여행은 시작된다. 영혼의 보물과 철학자의 돌을 찾아서. 떠나는 일도 떠나지 못하는 일도 결국 자신에게 달린 셈이다. 인생 또한 마찬가지다. 성공과 실패도 남이 아닌 자신의 몫이다. 나는 떠나는 삶을 선택했지만 그렇다고 이전에 떠나지 못했던 삶이 문제가 있던 것은 아니다.


 파주 헤이리에 아침부터 함박눈이 내리는가 싶더니 아예 퍼붓고 있었다. 아름답다는 생각도 잠시 헛헛한 웃음과 함께 짧고 묵직한 탄식이 터져 나왔다. 멋지고 아름답고 목가적인 풍경이긴 한데, 왜 하필 오늘 함박눈이람!! 첫눈은 아니지만 11월의 함박눈은 의외였다. 오랜만에 한국에서 보는 함박눈은 몇 가지 감정을 동시에 선물하며 얄밉게도 소복소복 쌓여갔다. 소리 없이 차분하게 내리는 눈앞에서 오늘의 일정을 그려본다. 하지만 마음속에선 이미 풍랑이 몰아치고 있다. 그 풍랑이 잔뜩 수증기를 먹고 태풍으로 자라기 전에 진정시켜야 한다.


 한국에서의 운전도 서투른 내가 짐을 잔뜩 싣고 눈길운전이라니! 눈길이 미끄러울 텐데! 스노우 타이어도 아닌데! 장거리 운전인데! 아무리 조심한다 해도 5시간이나 운전하다 보면 사고 위험이 있는데! 좋은 날로 바꿀까! 다 귀찮은데 그냥 눌러앉을까! 겨울철이라서 방도 쉽게 나가지 않을 거라는 데! 떠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차고 넘쳤다. 하지만 이제 와서 방법이 없다. 약속을 번복하는 일은 사람을 구차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나란 사람을 털처럼 가볍게 만들 뿐이다. 새가 되고 싶진 않다. 그렇다면 계획대로 그냥 떠나는 수 밖엔.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오늘이 파주를 떠나는 날이다. 좀 더 거창하게 이야기하자면 이삿날인 것이다. 감포에 저녁 전에 도착하려면 점심 전에는 출발해야 한다. 감포 풀빌라 직원들과 저녁 약속이 되어있었기 때문에 함박눈을 뚫고 내려가야 한다. 남쪽으로 남쪽으로. 하지만 아직 짐도 싸지 않은 상태다. 설상가상으로 내가 사는 곳은 4층인데 엘리베이터가 없다.


 짐을 싸고 차에 싣는 과정은 2시간가량 반복되었다. 그것도 짐이랍시고 승용차 한 대 분량의 짐을 싸서 4층 계단을 오르내리는 일은 쉽지 않았다. 20번가량을 오르내리고서야  끝이 났다. 입고 있던 반팔 티셔츠는 땀으로 흠뻑 젖었다. 덕분에 오랜만에 운동 같은 노동을 했다. 매일 사무실에만 앉아 있다 운동을 하니 기분은 상쾌해졌다. 무엇보다도 그새 싸인 불필요한 짐을 정리해서 버리고 나니 마음이 홀가분해진다. 유목민의 삶을 살다 보면 자연스럽게 미니멀 라이프의 생활을 추구하게 된다. 신기하게도 우리가 사서 소유하게 되는 많은 물건들은 없어도 되는 것들이다.


 자유로워지려면 가진 것이 없어야 한다. 언제든 떠날 수 있을 정도의 짐이 아니면 엉덩이는 점점 무거워진다. 꽤 오래전에 방송에서 키아누 리브스의 이야기를 본 적이 있다. 영화배우 키아누 리브스는 집도 짐도 없이 호텔에서 살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영혼 같아서 부러웠었다. 나도 언젠가는 키아누 리브스처럼 살고 싶었다. 하지만 그처럼 살려면 어마어마한 양의 돈이 있어야 했다.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다가 한 달 살기가 유행하면서 내게도 희망이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떠나던 날, 헤이리 마을에 내리던 눈이 잦아들었다  함박눈이 내려도 도로에는 쌓이지 않았다.


 다행히 눈발은 잦아들었다. 차의 시동을 걸고 내비게이션을 켰다. 목적지 주소를 입력하자마자 다시 한숨이 나왔다. 430킬로에 예상 소요시간은 5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자유로에 들어서자 다시 눈발이 굵어지기 시작했다. 오른쪽에 펼쳐진 한강 하류는 강인지 바다인지 모를 정도로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있었다. 철조망 너머로 그 위에도 어김없이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무리 지어 강물에 앉아있는 하얀 갈매기들 위로도 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다.  영국에서는 좀처럼 구경하기 힘든 귀한 눈이 한국에서는 자주 내린다. 하지만 오늘 눈은 더 이상 상이나 낭만의 대상이 아니다. 뚫고 나가야 하는 장애물이다. 바라보는 시점이나 관점에 따라 같은 대상이 다르게 보이거나 해석된다는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한남대교를 건너 경부고속도로에 진입하고 있었다. 거대한 도시 서울은 이 정도의 눈쯤이야 가소롭다는 듯이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휴게소에서 점심 먹고 쉬는 사간을 포함하니 여섯 시간이 지나서야 목적지에 도착했다. 다행히 수도권과 강원도를 벗어나자 눈발은 약해졌다. 운전에 별 지장이 없을 정도의 눈발만 날려 주웠다. 경주를  지나자 이미 땅거미가 내려앉으며 어둑해지고 있었다. 마침내 내가 일할 곳에 도착하자 대표님과 직원 둘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직원 중 한 명이 그녀다. "오빠 잠 안 오지? 내려와서 노가다좀 뛸래"라고 제안했던 그녀가 반갑게 맞아준다. 그렇게 나의 노가다 생활은 시작되었다. 멋진 바다뷰의 풀빌라에서 바다를 보면서. 나는 연금술사의 주인공 산티아고처럼 떠나왔다. 산티아고는 사막을 여행하다 마침내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발견하게 된다. 나는 바닷가 펜션에 살면서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까? 설사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다 해도 상관없다. 매일 바다를 보면서 노가다를 뛰는 즐거움만으로도 설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 설렘부터 내가 찾는 보물, 즉 행복인지도 모른다.




"노가다"는 막일이란 의미의 일본어다. 일본어 사용은 좋아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지만 문장에서 어감을 살리려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사용했다는 점을 밝히고 양해를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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