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시간 동안 딱딱딱을 몇 번이나 했는지 알 수 없지만, 아무튼 고통의 시간들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몇 주전에 본을 떠서 나온 어금니 임플란트 8개를 조립하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좁은 입속으로 손을 넣어 조립하는 사람도 입을 벌려주는 사람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힘든 와중에도 내가 죽어서 화장터에서 화장당하는 장면이 생각났다. 요즘 화장하고 나면 타지 않은 쇠붙이들이 많이 나온다던데. 나 이러다 인조인간 되는 건 아닐까. 무릎부터 허리 이 8개까지.
공교롭게도 임플란트를 하고 있는 이 8개가 모두 입 안쪽에 위치한 어금니였다. 지난해 한국에 오자마자 신사동에 있는 대형 치과병원으로 달려갔다. 임플란트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것도 한꺼번에 8개나. 아직 젊은데 틀니를 할 수는 없었다.
잇몸에 문제가 생기면서 이가 흔들리기 시작한 건 몇 년 전부터였다. 아내와 이혼 과정에서 그동안 경험해보지 못한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스트레스가 심해지면 잇몸뼈가 약해져서 이가 흔들릴 수 있다고 한다. 나처럼 결벽에 가까울 정도로 자주 양치나 가글을 하는 사람도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그렇게 불쌍한 나의 어금니들은 잇몸이 약해지면서 속절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한두 개도 아니고 8개 모두가 나의 잇몸과 이별을 요구하고 있었다. 속절없이 흔들리는 부부의 관계 속에서 아내가 이혼을 요구하듯이.
임플란트 과정은 대략 8~9개월이 소요되었다. 요즘은 기술이 발달해서 이를 빼고 동시에 뼈이식과 나사못을 박는다. 그리고 6개월을 기다린다. 6개월 후에는 조립할 이의 본을 뜨고 나사못을 교체해 준다. 그리고 다시 한두 달 기다려서 본을 뜬 이를 나사못에 고정시키면 된다. 비용은 대략 8백만 원 정도 들었다. 한국에 들어온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저렴한 비용 때문이었다. 영국은 모든 병원진료가 무료이지만 치과만은 예외다. 영국인들이 동유럽으로 치과 원정을 가는 이유도 바로 이 엄청나게 비싼 치과 비용 때문이라고 한다.
지난해 6월, 미루고만 있던 대공사를 전격 시작했다. 어금니 8개를 동시에 빼고 곧바로 나사못을 박는 일이니 대공사가 맞지 싶다. 생니를 빼는 고통이 얼마나 큰지 알기에 여러 번 망설였다. 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일 무렵에 나는 그 광경을 직접 지켜보았다. 아이는 치아교정이 필요했고 그러려면 멀쩡한 생니 2개를 빼야 했다. 할아버지 치과의사는 인자해 보였지만 그가 들고 있는 도구들은 아이뿐만 아니라 나마저도 두려움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마취를 하고 이를 빼는 과정을 나는 아이의 손을 잡고 지켜보았다. 마치 내 이를 빼듯 같이 두려워했고 같이 몸서리쳤다. 아내는 차마 볼 수 없다며 진료실에 들어오지 못하고 대기실에 앉아 있었다.
머리가 하얗게 셌지만 허리가 꽂꽂한 영국 할아버지 치과의사는 발치 정도는 easy-peasy(식은 죽 먹기)라며 씩 웃는다. 동시에 아이와 하이파이브까지 하는 여유를 보여준다. 아이도 약간 안심하는 듯하다. 옆에는 아빠가 아이의 오른손을 간호사 선생님이 왼손을 잡고 있고 대기실에는 엄마도 있다. 할아버지 의사는 먼저 마취를 하였다. 마취를 하고 10분 정도를 기다린 후 도구들을 아이입에 넣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이를 빼려고 시도하는 순간 아이는 커다란 비명을 지르며 울기 시작한다. 알고 보니 마취가 제대로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극심한 공포를 느낀 아이는 나의 손을 더욱 세게 잡았다. 그 강도에서 아이가 느끼는 공포를 피부의 미세한 떨림들과 땀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다시 마취를 하고 마침내 두 개의 이를 뺐을 때 나는 아이와 눈을 마주쳤다. 아이는 어려운 일을 해냈다는 성취감보다는 두려움에서 해방되었다는 안도감으로 뿌듯해 보였다. 그런 아이가 대견하고 사랑스러웠다.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이라는 것이 이런 감정이구나! 느끼면서 말이다.
신사동 치과병원의 의사 선생님은 할아버지가 아닌 젊은 분이었다. 발치를 하기 전에 먼저 엑스레이를 찍었다. 치료 의자에 눕자 입만 뚫린 덮개를 얼굴에 씌운다. 마치 교수형 집행 전에 마대자루 같은 것을 머리와 얼굴 전체에 씌우듯이 말이다. 아이가 발치할 때도 그런 걸 씌어 주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입을 벌리고 마취가 시작된다. 날카로운 바늘이 잇몸을 찌르고 마취액을 사정없이 토해낸다. 그렇게 서너 차례의 주사 바늘과 실랑이를 하면서 입안 전체가 얼얼해지면서 감각이 없어진다.
10여분이 지나자 나의 멀쩡한(?) 어금니들이 빠져나오기 시작한다. 사실 이 어금니들은 사형을 당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 흔한 충지조차 없던 녀석들이어서 더욱 미안했다. 잇몸을 잘못 만난 죄밖에는 없었는데. 하지만 어쩌라! 그것도 운명인 것을. 흔들리는 부부 사이에서 누구 하나는 빠져나와야만 둘 다 살 수 있는 것을. 집안의 평화를 위해서 더 이상 이혼을 미룰 수 없는 이치는 지금 어금니들과의 이별과 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충치하나 없는 어금니처럼 나 자신이 잘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내가 모르는 나로 인해 아내가 받았을 스트레스나 상처들이 쌓여서 관계가 흔들렸을 테니까!
마침내 어금니 8개가 잇몸에서 분리되었다. 어금니가 빠져나간 자리에는 뼈이식과 동시에 곧바로 건물로 치면 골조에 해당하는 나사못이 박힌다. 드릴로 잇몸을 뚫고 나사못을 박는 과정에서 화장장에서나 맡을 수 있는 뼈와 살이 타는 냄새가 진동한다. 마침내 8개 나사못이 잇몸에 박히는 난공사가 끝이 났다. 이렇게 무서운 줄 알았다면 임플란트를 하지 않고 차라리 틀니로 살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취기술이 그 고통을 상상 속에서만 느끼도록 도와주었다. 덕분에 공사는 순조롭게 끝이 났다.
의사 선생님은 고생했다는 말을 남기고 다른 환자의 그것들을 처단하고 응징하려고 내게서 멀어진다. 가글을 시도해 보지만 감각이 없어서 몇 번씩 되풀이한다. 마취가 조금씩 풀리기 시작하는 입안에서는 통증보다는 선혈이 낭자하다. 아비규환도 이런 아비규환이 없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말을 곰곰이 생각하면서 다시 엑스레이실로 가서 엑스레이를 찍었다. 마취가 조금씩 풀리면서 양쪽 볼은 심술궂은 복어처럼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다.
화가 잔 뜩 난 복어처럼 부풀어 오른 볼을 마스크로 가린 채 수납을 마치고 엘리베이터에 오른다. 거액(?)의 돈을 카드로 긁으면서도 비싸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몇 년 전에 이미 치아보험을 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이런 걸 두고 선견지명이라고 해야 하나. 엘리베이터 안에서 처음 알았다. 20층이 넘는 건물 대부분이 병원 관련 업종이라는 것을. 그것도 절반은 성형외과가 자리 잡고 있었다. 치과는 15층부터 18층까지였다. 16층에서 탄 엘리베이터는 거의 층마다 멈추었는데 타고 내리는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같이 정월대보름날의 커다란 달덩이처럼 부풀어 올라 있었다. 나의 양쪽 볼은 명함도 못 내밀 정도로 말이다.
1층 약국에서 약을 타서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포항 풀빌라로 내려가려면 다시 KTX를 타야 한다. 서울역에 도착해서 KTX에 오르니 안도의 한숨과 함께 미소가 터져 나온다. 하지만 극심한 통증 때문에 그 미소는 세상에서 가장 어색한 복어의 미소가 되고 말았다. 한강 철교를 지나는데 오늘따라 유독 붉은 노을이 시작된다. 길고 부드러운 마지막 햇살이 마스크로 가린 볼을 어루만진다. 오늘 정말 수고했다면서. 문득 런던에서 살고 있는 아이가 보고 싶다. 눈시울이 시큰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