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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이지 Jan 08. 2021

기나긴 겨울잠을 자고 깨어나면

열다섯 마리 애벌레들

 방문을 열자 쿰쿰한 냄새가 훅 끼쳤다. 창을 자주 열지 못하는 겨울 접어들면서 더 심해진 것 같다. 응달에서 담아온 이끼 오른 흙에 비에 젖은 낙엽과 썩은 나무를 갈아서 잘 섞은 다음 아랫목에 며칠 동안 넣어두면 이런 냄새가 나지 않을까.

 민감하게 반응하는 나와 달리 H는 자신의 방에서 나는 냄새에 무척 관대했다. 젖은 흙냄새가 조금 날 뿐이라며 아무렇지도 않다고 했다. H, 정말이니. 그러면서 너는 왜 내 손끝이 향하고 있는, 쿰쿰한 냄새를 풍기는 진원지를 몸으로 가리고 있는 것인가.      


 방에서 키우고 있는 열다섯 마리 애벌레 때문이었다. 발효톱밥을 채운 열다섯 개 플라스틱 통에서 각자 기나긴 잠을 자는 열다섯 마리 애벌레들. 작년 늦가을, 알에서 애벌레가 된 녀석들은 톱밥 속에서 자다 먹다를 반복하며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중이다.      


 예전에 <사슴벌레의 하루>라는 글을 썼만 해도 녀석들은 열다섯 개의 알이었다. 쌀알만큼 작은 크기의 알들은 내가 아무리 쳐다보아도 미동조차 없었기 때문에 당시 나의 관심은 수컷 사슴벌레에 쏠려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면 별 볼일 없는 인간이라는 듯 고개를 돌리고는 권태로운 날갯짓을 몇 차례 하다가 잠을 자러 들어가던 수컷 사슴벌레는 내가 자신에 대한 글을 쓴 며칠 뒤에 생을 마감했다. 쨍한 햇빛에 눈이 감기던 늦가을, 여느 때처럼 사슴벌레가 있는 사육통을 들여다보다가 밤새 곤충젤리가 줄어들지 않은 것이 이상해서 톡톡 통을 두드려보았다. 사슴벌레는 꼼짝도 하지 않고 엎드려있었다. 내가 주변을 맴돌며 눈을 마주치려 했지만 끝내 고개를 들지 않았다. 단조로운 세계와 별 볼일 없는 인간 사이에서 권태를 느꼈을 사슴벌레는 그렇게 떠났다.      


 H는 생각보다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바람이 차가워지면서 사슴벌레의 움직임이 줄어들었고 먹이를 반만 먹는 걸 지켜보며 본래도 짧은 수명이 조만간 끝날 거라고 예감했었다며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H는 아파트 화단에 사슴벌레를 눕혀 흙을 살짝 뿌린 뒤 그 위에 낙엽을 덮어주었다. 답답할 것 같아 묻지 않았다고 했다. 풍장을 치른 셈이구나. 그리고 뒤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돌아왔다. 윤기 나는 몸체와 단조롭고 규칙적인 리듬으로 살아가는 사슴벌레에게 ‘귀엽다’고 하며 지극정성으로 돌보던 것에 비하면 무심해 보였다. 하지만 외출을 하고 돌아올 때면 사슴벌레가 아직도 그 모습 그대로 있다면서 좀 더 깊이 묻어주어야겠다고 말하는 H의 씁쓸한 표정에서 그렇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사슴벌레를 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알들은 애벌레로 성장했다. 여전히 알인 줄 알았는데, 어느 날 ‘꿈틀’ 거려서 애벌레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H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H는 쌀알처럼 작은 녀석들을 하나씩 분리해서 열다섯 개의 통에 넣고 본격적으로 키우기 시작했다. 기나긴 겨울잠을 자면서 영양섭취를 할 수 있도록 발효톱밥을 충분히 넣어주었고, 25도 이하에서는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다고 하면서 방안 온도를 26도에 맞춰놓았다.


 바깥 온도와 차이가 많이 나는 H의 창문에는 하얗게 김이 서렸다. 내가 환기를 시키기 위해 창문을 열려고 하면 H는 애벌레들이 얼어 죽을지도 모른다며 말렸다.     

 

-H, 집에서 키우지 않고 자연에서 태어나 자라고 있는 애벌레들은 지금쯤 산에서 혹독한 추위와 맞서고 있잖아. 혹독한 겨울 추위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태어났을 거야. 창을 잠깐 연다고 해얼어 죽지는 않아.

 

-자연에서 태어 애벌레들과 이 녀석들은 달라요. 산속 애벌레들은 뱃속에서부터 자연의 기질을 물려받아 생존력이 강하고 우리 집 애들은 인공적인 환경에서 태어났으니까 약할 수밖에 없어요. 산속 애벌레들은 생존에 적합한 온도를 찾아 땅속 깊숙이 파고 들어가는 것도 차이점이죠. 따뜻해지기 전까지는 조심해야 돼요.


-냄새는 그렇다 쳐도 애벌레와 함께 자라고 있는... 저기.. 애벌레 주위를 맴도는 진드기는 어떡하려고?     


 내 고민을 듣고 H는 그럴 줄 알고 준비해두었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사육통 뒤쪽에서 진드기 억제 및 탈취성분이 들어있는 허브 스프레이를 꺼냈다. 그리고 사육통  뚜껑을 열어 톱밥에  뿌리고 사육통 주변에도 뿌렸다.

 젖은 낙엽과 썩은 나무가 이끼 오른 흙과 함께 발되어가는 쿰쿰한 냄새에 페퍼민트 향이 섞였다. 감히 표현할 길 없는 기이한 냄새의 탄생이었다.      


 처음에는 쌀알 크기에 불과하던 애벌레들은 열심히 자고 부지런히 먹어 점차 애벌레의 면모를 갖추었다. 톱밥을 먹는 속도에 따라 몸집이 제각각 달라졌다. 아직 소지의 반에 불과한 애벌레가 있는가 하면 검지만큼이나 자란 애벌레도 있다. 거의 비슷한 시간에 태어났는데 성장하는 속도는 다르다.

 어쩌다 태어나보니 플라스틱 사육통이 전부인 세상. 발효톱밥으로 채워진 그곳에서 잘 적응하여 영양분을 고스란히 흡수한 애벌레들은 잘 자랐다. 몸집이 커진 애벌레들이 있는 통은 발효톱밥이 빨리 닳아졌다. 갈색 톱밥들은 애벌레의 몸에서 크림색으로 발효되 빛을 발했다.      

  움직임이 없는 애벌레힐끔 쳐다보다가 살아있는 거 맞냐고 묻자 H는 씩 웃으며 내 눈앞에 통을 내밀었다. 축축한 톱밥 속에서 윤기 흐르는 크림빛 애벌레가 통통하게 살이 오른 몸을 꿈틀거리며 식사를 하고 있었다. @@;;     




 H가 집에 없을 때면 나는 창을 열어 방을 환기시킨다. 덕분에 예전보다 냄새가 옅어졌다. 눈치를 챈 건지 H는 스티로폼 상자를 구해 사육통을 그 안에 넣어 애벌레들을 추위로부터 보호했다. 애벌레들은 봄이 되면 번데기가 되었다가 초여름이 되어갈 때면 탈피하여 성충이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묻자 H는 씩 웃으며 ‘어쩌면'이라며 말문을 열었는데, 때마침 애벌레가 몸을 크게 틀어 톱밥 일부가 무너져내리는  기척이 나서 그 뒷말은 듣지 못했다.


 그래.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어 애벌레들이 겨울잠에서 깨어나 더 깊은 잠을 자기 위해 번데기에 몸을 숨겼을 때 다시 물어보면 답을 들을 수 있겠지.

창틀에 쌓인 하얀 눈을 손가락으로 쓸며 바깥공기를 마신다. 차갑고 맑고 아릿하다. 아직 겨울은 밀린 숙제처럼 가득 쌓여있고 애벌레의 잠은 길고도 깊다.


열다섯 마리 애벌레들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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