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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이지 Aug 14. 2021

어둠 속에서 피어나는 꽃들

다시 쓰는 안데르센 세계 명작 <성냥팔이 소녀>

 불을 환하게 밝힌 빵가게에서 달콤하고 포근한 냄새가 풍겼다. 치즈와 우유로 반죽한 부드러운 빵. 달콤한 생크림을 잔뜩 올린 머핀, 체리와 오렌지를 올리고 금박 테두리로 장식된 초코케이크, 알록달록 예쁜 색으로 물들인 귀여운 마카롱. 소녀는 유리창에 얼굴을 대고 가게 안에 있는 빵들을 한없이 바라보았다. 단란해 보이는 가족이 케이크를 고르고 있었다. 그들은 캐시미어 스카프를 두르고 털모자를 쓰고 가죽 부츠를 신고 있었다. 소녀는 차갑게 얼어붙은 자신의 맨발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남자아이가 소녀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저기 좀 봐요! 유령이 우리를 쳐다보고 있어요.”

 아이의 부모는 남자아이의 외침에 비로소 소녀가 있는 창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저렇게 창백하게 얼어붙어있다니. 가엾지만 우리가 어떻게 해줄 수는 없잖아.’ 

 그럼에도 동정심 때문에 부부는 마카롱 몇 개를 소녀에게 주었다. 소녀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성냥 한 갑을 건넸다. 스물 네 개비가 들어있는 한 갑에 천 원짜리 성냥갑. 그들은 괜찮다고 했지만 소녀는 성냥갑을 아이 엄마의 손에 재빨리 쥐어주고 어둠을 향해 달렸다.     


 밤이 깊어질수록 눈보라가 거세졌다. 소녀는 술에 취해 고함을 지르던 아버지가 떠올라 지하철역에서 하룻밤을 지내기로 마음먹었다. 도시의 지하철역은 모두 폐쇄된 상태였다. 도시에는 언젠가부터 땅이 꺼지는 현상이 생기기 시작했다. 전문가들은 도시의 지반이 무척 약해졌다며 고층건물의 숫자를 반으로 줄이거나 지하철 운행을 멈추어야 한다고 했다. 도시 사람들은 지하철 운행 중지에 찬성표를 던졌다. 지하철은 없더라도 버스나 자가용이 있었으니 괜찮았지만 가장 큰 자산인 집은 포기할 수 없었다. 지하철역이 폐쇄된 뒤로 사람들은 지하로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폭력적인 이민자들이 그곳에 숨어산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지하철역 입구에 몸을 웅크리고 소녀는 마카롱을 아껴 먹었다. 너무 달콤해서 꿈에서 먹는 맛처럼 느껴졌다. 목이 마르면 하늘에서 떨어지는 새하얀 눈송이를 삼켰다. 

 주머니에는 성냥 세 갑이 남아있었다. 성냥갑에는 꽃그림이 있었다. 소녀가 색연필로 직접 그린 그림이었다. 도시가 전기로만 움직이게 되자 아버지의 성냥공장은 문을 닫았다. 엄마는 집을 나갔고 아버지는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집에는 공장에서 가져온 성냥이 수십 상자 쌓여있었다. 아버지는 소녀에게 성냥을 팔아 돈을 벌어오라고 했다. 소녀는 작은 성냥갑을 만들어서 꽃을 그려 장식하고 성냥을 스물 네 개비씩 넣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꽃들이네. 세상에 없는 것 같으면서도 이상하게 마음을 끌어. 잊어버리고 있었던 소중한 순간들을 떠올리게 하는 꽃들이야.”

 도시 사람들은 성냥은 필요 없지만 꽃그림이 좋아서 성냥을 샀다. 얼어붙은 손발을 녹이기 위해 소녀는 성냥 한 개비를 그었다. 눈보라가 불어 금세 꺼졌다. 소녀는 계단을 더 내려갔다. 어둠이 짙어졌다. 지하철역 개찰구 근처까지 왔을 때 소녀는 인기척을 느꼈다. 다시 성냥 한 개비를 그었다. 수많은 얼굴들이 보였다. 놀란 소녀가 비명을 지르며 성냥을 바닥에 떨어뜨리자 칠흑 같은 어둠이 밀려왔다. 그때 목소리가 들렸다. 

 “무서워하지 마세요. 저희는 지하생활자들입니다. 도시에 집을 얻지 못해서 지하철에서 살아가고 있답니다. 괜찮다면 성냥 한 개비만 빌려주세요. 어젯밤에 지하철역을 밝히던 화로의 불이 꺼져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어둠만 지켜보고 있었거든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소녀는 소문 속 폭력적인 이민자들을 떠올렸다. 하지만 예의를 갖춰 부탁하는 말투는 조용하고 부드러웠다. 소녀는 두려움을 떨쳐내며 성냥을 크게 그었다. 주변이 밝아지며 창백한 얼굴을 한 사람들이 보였다. 어린 아이도 있었다. 그들은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도시에 왔지만 거주 허가를 받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폐쇄된 지하철역에 몰래 숨어사는 지하생활자가 되었다.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할 수 없어서 날품팔이를 하거나 도시의 쓰레기로 간단한 물건을 만들어서 팔았다. 소녀는 주머니에 있던 성냥을 모두 건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하철역에 설치된 커다란 화로와 램프에 불이 켜졌다. 물과 수프가 끓으면서 온기가 돌았다. 불을 밝힌 램프가 걸리자 낡고 초라한 지하철역은 야시장이 열린 것처럼 활기가 돌았다. 그날 밤 소녀는 따뜻한 수프를 먹고 보풀이 일었지만 포근한 담요를 덮고 지하철 의자에서 잠들었다.      


 소녀는 술에 취해 잠든 아버지 몰래 성냥 스무 갑을 챙겨서 지하생활자들에게 나눠주었다. 성냥이 있는 한 지하에 불이 꺼질 날은 없을 것이었다. 소녀는 진심으로 이야기를 들어주고 따뜻한 수프를 나눠먹는 그들과 함께 지내고 싶었다. 

 그날 밤 도시에 정전이 발생했다. 무작위로 지은 고층건물이 원인이었다. 전력이 정상적으로 공급되기까지 일주일이 넘게 걸린다고 했다. 도시 전체가 어둠에 휩싸였다. 전기를 사용하는 생활에 익숙한 도시 사람들은 혼란스러웠다. 어떻게 불을 밝히고 어떻게 음식을 해먹어야하는지 알 수 없었다. 모든 생활이 멈췄다. 도시는 불안에 휩싸였다. 더구나 병원에는 출산을 앞둔 산모가 입원해있었다. 3년 동안 아기가 태어나지 않았던 도시에서 간절히 기다리던 아기였다. 그런데 정전 때문에 병원 업무도 중단된 상태였다. 아기가 무사히 태어나기 위해서는 전등과 물을 끓일 수 있는 도구가 필요했다. 도시를 책임지고 있는 시장은 아기가 태어나는데 필요한 물건들을 가져와달라는 공문을 도시 곳곳에 붙이고 확성기로 크게 알렸다. 깊은 지하에도 소리가 전해졌다. 소녀와 지하생활자들은 지하철역을 밝힌 램프 아래에서 따뜻한 수프를 나눠먹다가 소리쳤다. 

 “도시에서 지금 가장 필요한 물건들이 여기 다 있잖아!”  

   

 도시 사람들은 깜깜한 밤을 밝힌 수많은 램프 불빛을 고층 건물에서 내려다보았다. 소녀와 지하생활자들은 램프와 화로를 가지고 계단을 올라 102층 건물의 꼭대기에 있는 병원에 도착했다. 그들은 램프를 밝히고 화로에 솥을 올려 물을 끓였다. 아침 해가 뜰 무렵, 울음소리가 우렁찬 건강한 아기가 태어났다. 모두 아기의 탄생을 축하했다.      


 전기가 공급되기 전까지 도시의 광장에는 하루 종일 수프를 끓이는 화로가 놓였다. 불을 밝힌 램프도 걸렸다 지하생활자들은 솜씨가 좋아 고철과 플라스틱을 사용해서 금세 램프를 만들어냈다. 도시 사람들은 광장에서 수프와 램프와 성냥을 받아갔다. 소녀의 집에 쌓여있던 성냥은 도시에서 남김없이 사들였다. 그리고 불안정한 전력에 대비하기 위해 더 많은 성냥을 주문했다. 소녀의 아버지는 부지런히 공장을 돌려야했기 때문에 술을 마실 시간이 없었다. 지하생활자들은 정식 시민으로 인정받아서 집과 일자리를 얻었다.   

   

 지하철역은 미술관으로 바뀌었다. 사람들은 미술관에 가는 걸 좋아했다. 성냥을 팔던 소녀는 성냥갑에 그렸던 그림을 눈여겨본 화가에게 인정받아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지하철역 미술관에는 소녀가 그린 꽃 그림들이 전시되었다. 햇빛 한 줌 들지 않는 그곳에서 소녀의 손을 통해 새로 태어난 아름다운 꽃들이 날마다 활짝 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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