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방기억
병욱과 오래간만에 만났다. 매일을 만나서 함께 시간을 보내던 때도 있었지만, 요즘은 병욱을 포함한 친구들과 더 이상 그렇게 만나지 않았다.
병욱과는 일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만나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1차로 뼈다귀해장국을 한 그릇씩 비우면서 소주를 두 병 비우고, 2차로 감자튀김과 함께 생맥주를 석 잔씩 나눴다. 끝없이 들어가는 술이 속을 뒤집어놓는다고 생각이 들어 그만 마실까 싶던 차에 병욱은 나를 동네 골목길에 있는 편의점으로 이끌었다. 그리고서 편의점에서 네 캔에 만 원하는 싸구려 캔 맥주를 사 와 나뒹굴듯 놓인 편의점 앞 플라스틱 의자에 앉았다.
얼굴이 발개진 병욱이 캔 맥주를 호쾌하게 뜯은 뒤 캔에서 거품이 흘러나오기도 전에 입으로 가져댔다. 고개는 한껏 뒤로 젖힌 주제에 눈으로 나를 뚫어지라 쳐다보고 있었다. 병욱이 맥주를 마시는 ‘벌컥벌컥’ 소리에 맥주가 급히 당겼기에 나도 맥주를 뜯어 ‘벌컥벌컥’ 거리며 마셨다.
“야, 너는.”
병욱이 가벼운 트림인지 한숨인지 모를 숨과 함께 꺼낸 말이었다.
“뭔데?”
“너는 여기 있는 이 캔 맥주 같은 사람이라 이거야.”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건데? 개소리할 거면 얼른 집에나 가.”
“아니, 진짜로 맥주랑 뭐가 다르냐고요.”
병욱은 캔 맥주의 윗부분을 손가락을 잡고 플라스틱 테이블 위에서 빙글빙글 돌리며 말을 이었다.
“넌 이게 뭐로 보이냐?”
“뭐긴. 술이지.”
“아, 그러니깐 무슨 술이냐고.”
“얼마나 취했으면 지 입에 들어가는 게 뭔지도 몰라. 맥주잖아.”
“그렇지? 싸구려 캔 맥주. 내가 알기로 이거 네 캔 만 원인데도 잘 안 팔려. 왜인지 알아?”
“다른 게 더 맛있는데 가격이 똑같아서. 근데 너는 맨날 이거 먹잖아.”
“아닌데. 하여튼, 넌 네 캔에 만 원짜리 맥주 같은 인간이라는 거야.”
병욱은 내 얼굴이 아니라 나를 뚫고 내 안을 바라보듯이 흐리멍덩한 눈이었다. 병욱이 하는 말은 잔뜩 취한 술주정이 분명했지만, 왜 나를 캔 맥주 같다고 말하는지 궁금했다.
“근데 하고많은 술 중에 맥주야?”
“그냥 맥주 아님. 캔 맥주, 싸구려 캔 맥주.”
“아, 그러니깐 왜냐고.”
병욱은 캔 맥주를 들어 올려 내 손의 맥주에 건배하고서 다시 벌컥벌컥 마셨다. 그리고 겨우 두 번 만에 다 비워버린 캔 맥주를 멀리 쓰레기통으로 던져 버리고 새 캔 맥주를 뜯으며 말을 이었다.
“넌 여기에 무슨 맥주가 들어있을까? 생각해 봤어?”
“상표에 적힌 맥주겠지. 요즘에 맥주 종류가 수십 가지인데.”
“거, 모르는 소리. 우리가 아까 술집에서 먹은 건 확실히 맥주야. 왜냐면 투명한 유리컵으로 보이거든. 맥주를 따르는 컵은 언제나 투명해. 그러니깐 우리가 항상 먹던 그 맥주가 맞다 이거야.”
병욱은 내 반응을 짐짓 살피더니 거리낌 없이 말을 이어갔다.
“근데 캔 맥주는? 상표는 있지만 뜯어서 마시기 전까지, 아니 어떨 때는 뜯어서 마시는 순간에도 이게 내가 알고 마시고 싶었던 그 맥주가 맞는지 아닌지 끊임없이 의심해야 해.”
“내가 그럼 의심되는 인간이라는 거냐?”
“하, 이해를 못 하네. 너는 포장으로 꽁꽁 싸매고 있어서 내가 알았고, 그래서 마시고 싶어서 찾는 그 맥주인지 아닌지 아리송한 인간이라는 거다.”
“맥주가 다 똑같지. 뭐가 다르냐. 그냥 다른 맥주들이랑 똑같은, 그냥 맥주야.”
“얘는 입맛이랑 코도 맛이 갔네. 취했냐? 아니면 요즘 들어 너라는 맥주가 상했나 보다.”
“맥주를 향으로 먹는다는 소리는 처음 들어보네.”
병욱은 캔 맥주를 들고 있던 손을 휘두르다가 손가락을 펴서 냉장고를 가리켰다.
“저기 냉장고 안에 있는 맥주들을 다 꺼내보면 향이 다 달라. 너도 그래. 그 뭐라고 했더라. 여자친구가 너보고 뭔 향이 난다고 했다고?”
“민트.”
“까고 있네. 너는 딱 비릿한 캔 맥주야. 보이는 짓도 캔 맥주. 냄새도, 맛도 캔 맥주.”
싸구려 술 취급에 기분이 나빴지만, 술에 취한 병욱이 읊어대는 말의 결론이 궁금해서 가만히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아무런 대답 없이 손에 든 맥주를 홀짝 마시며 병욱을 쳐다봤다.
“목이 말라서, 아니면 술이 모자라서 캔 맥주를 산다? 그러고 딱 처음에 따면 어때. 그 향기가 엄청 좋아. 그리고 단숨에 쭉 마셔. 와, 목 넘어가는데 개 맛있어. 근데 한 번에 다 마시지는 못한다? 꼭 남겨. 왜냐고 하면 처음에 상상하던 맛은 금방 사라지고 그 뭐냐…, 아 뭐였지….”
“캔 맛 나는 거?”
“어! 그래 그거! 바로 따라서 컵에 담겨 있을 때같이 좋은 향이 처음에는 분명히 났는데 갑자기 비릿한 캔 냄새가 나. 그럼 알아서 입이 살포시 떨어지지.”
“그게 내 어떤 점이랑 같은 건데. 오늘 술이 아주 쭉쭉 들어가시더니 앞뒤 안 보고 말을 막 던지네.”
“기분 나쁘면 미안한데, 사실이라서 말을 해야 내가 오늘 집에 가서 잘 수 있겠다. 아, 어디까지 이야기했는지 까먹을 뻔했네. 아무튼 좀 끝까지 들어.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 알 수 없게 너를 가리고 있는 캔 포장이 문제라고.”
병욱의 이야기에 심취한 사이 병욱이 벌써 세 번째 맥주를 뜯고 있다. 나는 아직 첫 번째 캔인데. 어쩌면 이야기로 나를 홀려 자기 혼자 맥주를 독식하려는 속셈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캔은 금방 차가워지고 금방 식어. 맥주를 왜 유리컵에 마시는지 알아? 유럽에는 미지근하게 마시는 맥주도 있는 거 알지? 맥주는 무조건 차갑게만 먹는 거 아니래. 처음 탭에서 나올 때 그 순수했던 온도가 중요해서 그걸 유지하려고 유리컵에 담아준다더라.”
이제는 사뭇 진지해 보이기까지 하는 병욱의 이야기에 이 자식이 언제부터 나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나 싶어서, 그리고 진지한 모습이 너무 안 어울려서 웃음이 나려는 걸 억지로 참았다.
“아마 너도 그럴 수도 있어. 근데 너는 다른 맥주들이 냉장고 속에서 얼면서 차갑게 있으니깐 혼자 다르다고 생각하는 게 무서워서 유리컵에 담아지길 포기하고 얇아서 쉽게 찌그러지고 상처받고 차가워지고 식어버리는 캔에 들어가 버린 거야.”
“그래서 결론이 뭔데.”
병욱은 내 물음에 바로 대답하지 않고 손에 남아있던 맥주를 모두 마셔버렸다. 그리고 처음 이야기를 꺼낼 때처럼 가볍게 트림을 하고는 말했다.
“아, 시발. 그러니깐 너는 캔 맥주고, 그 캔이 문제라고 알겠냐? 형이 말하면 좀 알아들어. 근데 술 다 떨어졌네. 이 새끼가 언제 다 처마셨냐? 더 마실 거?”
“미친놈인가. 나, 이거 첫 캔인데 아직 다 안 마셨는데 네가 세 캔 다 처먹었어.”
“아, 그럼 더 마셔야겠네. 기다려봐. 내가 더 사 옴.”
병욱은 자리에서 일어나 기우뚱거리는 걸음으로 편의점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병욱의 캔 맥주 이야기를 전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병욱이 나에게 뭔가 큰 아쉬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은 알 수 있었다. 무엇이 B가 나에게 아쉬움을 가지게 했는지를 고민하던 때 병욱이 편의점 문을 열어젖히며 나타났다.
“야! 형 왔다. 여기 술.”
병욱은 나를 캔 맥주에 비유하면서 불편한 소리를 내뱉던 네 캔에 만 원하는 싸구려 맥주를 또 사 왔다. 비틀거리며 걸어와 테이블 위에 맥주를 올려놓고는 의자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혼자서 네 번째 캔을 뜯기 시작했다.
“너는 캔 맥주가 별로라고 나랑 비유하면서 그렇게 말하더니. 또 이거 사 왔네? 취한 거야? 머리가 어떻게 된 거야? 아니면 성격이 어떻게 된 거야?”
병욱은 아무 말 않고 자신이 뜯은 맥주를 내 앞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새로운 맥주를 또다시 뜯고는 멋대로 건배를 하고 자신의 손에 있는 맥주를 들이켜기 시작했다.
“도대체 뭐 때문에 나한테 볼멘소리 하는 거야? 내가 뭐 너한테 돈을 안 갚았냐?”
병욱은 마시던 맥주를 내려놓고서 나를 쳐다보았다.
“아니. 그런 거 아니야.”
“그러면 여자 친구 생겼다고 말도 안 하고, 계속 소개도 안 해줘서 이래?”
“그것도 아니야.”
“일 년 만에 만나서 그러면 도대체 뭐가 문젠데 이 지랄이야?”
병욱은 잠시 침묵하다가 피식하고서 웃었다.
“거, 캔이 문제지. 누가 맥주가 별로래?”
병욱이 가벼운 트림인지 한숨인지 모를 숨과 함께 꺼낸 말이었다.
“맥주는 맛있어. 아무리 싸구려에 맛도 금방 변한다 하더라도 말이야. 처음에 딱 뜯었을 때, 그때는 우리 다 같이 친구들이랑 술 퍼마시던 그때 향과 맛이 난단 말이야. 그러니깐 너도 캔에 싸매놓지 말고 얼른 목에다 부어버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