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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수거자 M

by 래인

보라시티에서는 어디에서도 거대한 기억의 탑이 보이지만,

사람들은 탑으로 접근할 수가 없다.

오직 기억수거자만이 탑으로 가는 내비게이션과 제한 없이

모든 곳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특별한 통행증을 받는다.


기억관리자 E는 사람들의 모든 기억을 볼 수 있는 존재다.

사람들이 지워 버린 시간조차도 그는 볼 수 있다.

모니터 스크린이 가득한 방에 머물고 탑의 모든 열쇠를 관리한다.

행방불명된, 기억의 탑을 만든 시스템 설계자가 E의 아버지였다.

사람들은 그가 더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거라고 이야기한다.

설계자의 아들인 그는 자연스럽게 기억을 다루는 능력을 지니게 되었고

이 탑의 관리자가 되었다.


2828년 3월 28일


오늘은 기억수거자 M이 기억의 탑으로 출근하는 첫날이다.


오후 2시 28분,


알람 소리와 함께 꺼져있던 모니터 스크린이 환하게 밝아왔다.

멀리서 자줏빛 모래바람을 뚫고 마젠타색의 옷을 입은 사람이 다가온다.

사막을 지나 탑을 향해 걸어오고 있다.


"시스, 확대해 줘"


E는 음성인식 시스템을 호출해 명령을 내린다.

사람의 모습이 가까워지고 모니터 하단 오른쪽에 '기억수거자, M'이라는 글자가 반짝이기 시작한다.

그녀가 언제나 마젠타색 옷을 입고 다니기 때문에 사람들은 M을 '마젠타걸'이라고 불렀다.


기억수거자는 사람들이 잊고 싶은 기억을 기억 캡슐에 옮겨 담아 탑으로 전달하는 일을 한다.

그 캡슐은 탑의 기억보관소에 차곡차곡 쌓여 아카이빙 된다.

기억수거자가 되려면 기억과 감정을 지워야 한다.

다른 직업에 비해 보수가 많고, 보라시티의 통제구역까지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지만,

마음을 삭제하면서 이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을 찾기는 어려웠다.


메타시티가 붕괴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을 때,

위기 상황에 대비해서 비밀리에 건설되고 있던 계획도시가 보라시티였다.

메타시티의 생존자들은 모두 보라시티 허브시스템에 등록되어 시민증을 받았다.

그러나 마젠타걸은 심하게 다쳐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병원에 이송되었고

6개월이 넘도록 깨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신원미상자, M(메타시티에서 온 신원미상자)'으로 분류되어

허브의 시민 시스템에 등록되지 못했다.

3년 6개월이 지나 몸을 회복한 그녀는 병원을 나와야 했다.

시스템에 등록할 때 그녀를 보증할 서류상 후견인이 필요했다.

몇 년을 노력해도 병원에서 깨어나기 전의 기억을 찾지 못했다.

그녀에겐 보호자가 없었고

그 시간이 지나도록 그녀가 누군지 알고 있는 사람을 찾지 못했다.

뇌의 감정을 담당하는 대뇌변연계에 손상을 입어 감정마저도 느낄 수가 없었다.

E는 허브에서 신원미상자의 후견인이 되어달라는 연락이 왔을 때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그녀가 이전의 기억, 감정을 잃었다는 데 마음이 흔들렸고,

대재난 때 죽은 소꿉친구와 비슷한 나이였기에 마음이 쓰여 결국 후견인이 되기로 했다.

마젠타걸은 E가 그녀의 후견인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보라시티 시민증이 있으면 의식주를 보장해 주고 매달 최소한의 생존 수당이 지급된다.

그러나 모범 시민이 되어 모범 시민증을 받기 전까지

일반 시민증을 가진 이들은 직업을 가지기 어려웠고 거주지를 맘대로 옮길 수도 없었다.

모범 시민이 되려면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시민증을 받은 지 얼마 안 되고, 가족, 기억, 감정을 모두 잃은 마젠타걸이

기억수거자가 되려고 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이 일의 적임자였다.

그녀는 어려운 마지막 면접까지 무난하게 통과했고 기억수거자가 되었다.


"지금 시간은 오후 2시 45분입니다. M의 예상 도착 시간은 오후 세 시입니다. "


E는 기억의 탑의 방문객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가장 햇빛이 잘 드는 방의 테이블에 봄꽃 가지를 꺾어 장식하고

계절에 어울리는 벚꽃색 찻잔과 붉은 히비스커스차를 준비했다.

그는 마젠타걸의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주고 싶었다.


2828년 3월 28일 오후 3시


초인종이 울리고 약간 긴장한 듯한 마젠타걸이 서 있다.

그는 그녀를 방안으로 안내한다.

차를 마시면서 그녀를 조심스럽게 살펴보던 E는 심장이 내려앉는다.

처음엔 몰랐는데 눈앞에 있는 그녀는 보면 볼수록 어린 시절부터 함께 했던 친구의 모습이다.

조심스럽게 응시하며 기억을 들여다보려 했지만 보이지 않았다.

깨진 파편 조각과 희뿌연 안개만 가득하다.

메타시티의 기억을 모두 잃은 그녀는 무표정하게 앉아 묻는 말에만 간단히 대답했다.

다만 차를 마실 때의 그녀는 생기가 있어 보였다.

마젠타걸이 왜 마젠타색 옷을 입고 다니는지 알겠다.

친구가 좋아하던 색이 마젠타색이었고 즐겨 마시던 차가 히비스커스차였다.

처음에는 맛과 향기가 낯설어서 억지로 마셨던 차였다.

지금은 습관처럼 이 차만 마시게 된 것은 친구가 즐겨 마시던 차였기 때문이다.

메타시티에서 만날 때마다 이렇게 차를 마시며 이야기하곤 했었다.

기억과 감정을 잃었어도 취향은 변하지 않는구나.

그렇지만, 오랜 친구 사이였다는 사실을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그녀가 한없이 안타깝고 아팠다.


업무를 끝내고 돌아가는 마젠타걸의 퇴근 시간은 어둠이 내리는 황혼 무렵이었다.

그는 문 앞에서 배웅하고 다시 스크린 가득한 방으로 돌아왔다.

모니터를 통해 그녀가 어두워져 가는 사막을 지나 시티로 돌아가는 것을 지켜봤다.

점점 멀어져 점으로 보여 사라질 때까지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시스, 이제 모니터를 꺼줘. "


방안을 밝게 비추던 모니터 스크린의 빛이 꺼졌을 때,

적막 가득한 방 안에 짙은 보랏빛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다.



m.jpg Magenta Girl by NikkaLain with Midjourney AI ,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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