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버스 위로 노란 태양이 떠오르고 있을 때, 스크린에서는 노을이 지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그는 그림을 그리던 손을 멈추고 시계를 쳐다본다. 시계는 10시 10분을 가리키고 있다. 초침 소리도 들리지 않는 방 안의 공기는 적막하기만 하다. 알람이 울리지 않았다. 큰일이다. 시계가 멈춰버렸다.
그는 그림을 그릴 때면 세상과의 모든 연결을 끊는다. 창문이 없는 작은 지하 작업실에 틀어박혀 그림을 그린다. 작품이 완성되기 전까진 무슨 일이 있어도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빛이 들지 않는 대신, 벽면 하나를 대형 스크린으로 삼아 세상의 풍경을 띄워 놓는다. 이 작업실에는 인터넷, 와이파이가 없다. 하나뿐인 시계에 모든 알람을 맞춰놓고 그 루틴을 철저히 지키는 생활을 한다. 잠자는 시간, 밥 먹는 시간, 그림 그리는 시간, 방 안에서 간단한 운동을 하는 시간, 심지어는 화장실에 가는 시간도 알람에 맞춰두었다. 그렇게 해야만 완벽한 그림을 완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실제로 그렇게 해야 가장 그림이 잘 그려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정신없이 그림에 몰두해 있었다. 언제부터 시계가 멈춘 것일까? 시간을 알 수 없으니,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 알 수 없다. 졸린 느낌도 들었고,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는 것도 같았다. 화장실에도 가야 했고, 그러나 무엇부터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잠을 자려고 누워봐도 잠이 오질 않고, 밥을 먹으려 해도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화장실도 계속 여러 번 드나들었지만 제대로 볼일을 볼 수 없었다. 식은땀이 나고 손발이 차가워졌다. 시계 하나 멈췄을 뿐인데 그의 모든 세계가 무너지기 시작한다.
이곳은 그에게 가장 완벽한 공간이었다. 안전하게 잘 관리된 시간 속에서만 그는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그는 스스로 이 공간을 '완전 공간'이라 이름을 붙였다. 이곳은 세상과 격리된, 오로지 그 자신과 캔버스가 하나가 되어 최상의 그림을 완성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평소에 불안증, 대인기피증이 있는 그였지만 이 작업실에 있을 때만은 모든 것이 편안했다. 여기선 병원에서 처방받은 약을 먹을 필요도 없다. 그런데 지금 이곳은 불안하고 갑갑한 숨이 막히는 공간이 되어버렸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의 그림은 처음에 계획했던 그대로 점, 선, 면, 컬러, 세부 디테일까지 만족스럽게 그려지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림을 그리는 것은 고사하고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다. 어지럼증이 느껴지고 그의 눈앞에서 입체가 평면으로, 컬러가 흑백으로, 면이 선으로, 선이 점으로 변해간다. 그는 의식을 잃고 쓰러진다.
시계가 멈추고, 알람 소리가 사라졌을 때, 그는 계속해서 며칠 동안 쉬지 않고 그림만 그렸다. 잠도 자지 않고 밥도 먹지 않고 화장실에 가는 것도 잊고 그는 계속 집중해서 그림만 그리고 있었다. 그림 속 태양이 떠오를 때, 그는 시계의 초침 소리가 멈춰버린 것을 깨닫고 급격히 피로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쓰러진 그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꼬박 이틀 동안을 깨지 않고 잠만 자다 일어난 그는 이제 몸이 가벼워지고 머리가 맑아지는 것을 느낀다. 기력을 다시 찾은 그는 다시 마음을 다잡고 어떻게든 그림을 완성하려 하였다. 여전히 시계는 멈춰있고 초침 소리와 일상의 규칙을 알려주던 알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어떻게든 그림을 완성해야 한다. 그래야 밖으로 나갈 수 있다. 그는 떨리는 손과 심장을 부여잡고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떠오르다가 멈춰있던 노란 태양이 다시 온전한 빛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림이 완성되었다.
그가 그림을 완성하고 밖으로 나왔을 때, 눈부신 아침 햇살이 초췌해진 그의 얼굴을 비췄다. 작품을 끝마친 그의 얼굴은 편안해 보였다. 지금이 몇 시인지 확인해야 했다. 그는 처음으로 작업실 근처에 있는 공원의 시계탑까지 산책을 해보기로 결심한다. 공원에 도착해 시간을 확인한 그는 깜짝 놀랐다. 지금 시간이 그의 시계가 멈춰있던 10시 10분이다.
공원 벤치에 앉아 오랜만에 세상 밖의 맑은 공기와 햇볕을 즐겨본다. 벤치에 기대 주변 풍경을 돌아보니 사람들이 각자의 모습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지금이 몇 시인지는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았다. 그는 몇 시간을 그렇게 벤치에 앉아 사람들을 관찰하였다. 개를 데리고 나와 산책하는 사람, 러닝화를 신고 짧은 바지를 입고 달리기를 하는 사람, 세발자전거를 타고 있는 아이와 그 아이를 지켜보는 엄마, 비둘기들, 세상은 평화롭고 안전해 보였다.
그날 이후로 그의 루틴에 매일 10시 10분 공원 산책 시간이 추가되었다. 산책길에 작은 스케치북과 펜을 챙겼다. 벤치에 앉아 멍하니 앉아 있다가 그림을 그리고 싶을 때는 주변 풍경과 사람들을 스케치하기도 했다. 그는 작업실이 아닌 곳에서도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처음 얼마 동안은 공원에서 사람들을 마주치는 경우의 수를 생각해서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상상 시뮬레이션을 해보았지만, 실제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익숙해지니 그런 시뮬레이션 없이도 편하게 공원 산책을 즐기게 되었다. 강아지가 다가오면 조금은 불편하기도 했지만 참을 수 있었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다가와 말을 건네고, 내 스케치북 한 귀퉁이에 낙서하고 싶어 하는 어린 친구도 생겼다. 지금의 그는 완전 공간이 아니더라도 그림 속 태양이 떠오를 수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10시 10분에 공원에서 만나는 풍경과 사람들, 이제 그들이 그의 태양이 되어 그의 화폭에 담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