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정시야.
이제 가을이 오고 있어. 이렇게 네게 편지를 쓰는 것이 얼마만인지?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네 소개가 인상적이었어.
'달리는 시계'라는 네 닉네임 말이야.
너희 집 시계가 항상 빠르게 간다는 이야기를 했었지.
아무리 시계를 정각에 맞춰놔도 일주일쯤 지나면 7분쯤 빨라져서 가고 있다고 하는 이야기.
온 집안 식구가 성격이 급하다고 했어.
그래서 가족들과 오래 있으면 빨리 늙는 느낌이라고 했던가.
정시라는 너의 이름 탓에 왠지 식구들과 성격이 맞지 않았다고, 가족들에 비해 느릿느릿했기에
왠지 어긋나는 느낌이었고, 맞추기 위해서 닉네임이라도 '달리는 시계'라고 지어야 했다고.
나중에 너와 친하게 되었을 때 닉네임의 또 다른 의미도 알려주었지.
달리의 그림에서 본 시계가 인상적이었기 때문에 닉네임을 '달리는 시계'라고 지었다고 했어.
중학교 때 미술 교과서에서 그 그림을 처음 봤을 때부터 너무 마음에 들어 책갈피로 만들어서 일기장 속에 끼워놓았다고 했어.
그 해 겨울 초현실주의 그림 전시회가 있었는데 달리의 그림을 전시한다고 해서 용기를 내서 혼자 보러 갔었다고 했지. 전시장도 처음이었고, 미술관에서의 그림구경도 처음이었는데 너무 좋았었다고.
그때부터 방학 때면 미술관에 그림 전시를 보러 다니는 취미가 생겼다고 했어.
용돈을 모아서 혼자서 버스, 지하철을 타고 보고 싶은 전시를 보러 다녔다고 했었지?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적은 없었냐고 내가 물어봤을 때, 그때의 너는 조금 쓸쓸하게 웃었던 것 같아.
관람객으로 감상하면서 즐길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고 했었어.
그랬던 네가 오랜 시간이 흘러 갤러리에서 하는 전시회에 참여한다고 하네.
코로나 시절 직장을 그만두고 쉴 때 배우게 된 것이 디지털로 하는 그림이었고, 그렇게 해서 디지털로, AI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고 했을 나는 기뻤어.
너는 자화상을 그렸다고 했었지?
그림 속에서 한 사람이 계속해서 느린 속도로 걷고 있었어.
움직이는 영상이었고, 가까이 다가가서 자세히 보니 그림 속에 시계가 있었어.
제목이 자화상(달리는 시계) 였어.
네가 느리다고 했지만. 내가 볼 땐 넌 항상 앞서 달리고 있었지.
전시장에서 오랜만에 너를 만나고 싶었는데 못 만나서 아쉬웠어.
이 가을이 지나기 전에 꼭 만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