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원하지 않는 것 깨닫기
대학생 때 대기업 계열의 광고회사에서 인턴 면접을 본 적이 있다. 개별 면접 이후 단체 면접을 볼 때였다. 평소 잘 입지 않는 정장에 구두를 신고 다른 지원자들과 함께 일렬로 앉았다. 동료가 될 수도 있는 사람들이자 경쟁자들. 지원자들 사이에 이상한 경계심과 긴장감이 맴돌았다. 면접관은 하필 끝자리에 앉아 있던 내게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여기부터.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세 문장으로 해보세요."
"네? 세 문장이요?"
"한 줄 아웃."
단호함과 압박감에 당황한 나는 무난한 답변을 횡설수설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질문이 불공평했던 것은 내가 답변을 하는 동안 내 옆에 쭈욱 앉아 있던 친구들은 생각할 시간을 벌었다는 것이다. 뒤로 갈수록 "세 문장"이란 조건은 어디로 가고 다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문장 수와 관계없이 하기 시작했다. 그중에 아직까지도 기억나는 답변이 있다.
"저는 이 일을 안 하면 죽을 것 같습니다."
나와 달리 정장이 잘 어울리는 여자 지원자의 말이었다. 목숨을 걸겠다는 그녀를 보며 면접관들은 엷은 미소를 띤 채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이 모든 상황이 어딘가 부자연스럽고 이상했다. 잘 지어진 세트장 속에 모두가 역할극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만 이 속에서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불편하게 앉아 있는 기분. 숨이 막혔고 도망가고 싶었다.
사회생활 경험이 없던 그때의 난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이런 곳에서는 저런 사람이 일을 하는 거구나. 목숨까지 걸겠다는 사명감이 대단하게 느껴지면서도 한편으로 자신이 없어졌다. 나는 죽을 것 같은 정도는 아닌데... 이 일이 정말 목숨까지 걸 일인가? 나는 그 정도로 광고가 하고 싶나? 애초에 내 목숨을 걸면서까지 하고 싶은 일이 있을까? 꼭 그렇게 거창한 이유가 있어야만 일을 할 수 있는 걸까?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그 정도의 간절함이 부러우면서도 의문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나는 아닌 것 같아.’
나는 그들의 기대치를 절대로 충족시키지 못할 것 같아 망연자실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면서 결과 통보를 받기도 전에 나는 내가 떨어질 것이란 걸 알았다. 아마 그 친구가 붙었을 것이다. 그때는 속상했지만 떨어진 걸 다행으로 생각한다. 그곳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니었다.
경력 없던 대학생 때 느꼈던 의문은 10년 차 이상이 된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나는 누구도 회사에 목숨까지 걸진 않았으면 좋겠다. 하고 싶은 일에 인생을 걸겠다는 말과는 다르다. '이게 아니면 죽겠다'는 결심은 너무 세상 밖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그 일이 아니더라도 일은 얼마든지 있다. 절실한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생각보다 더 잘 맞는 일을 찾을 수도 있다. 내가 직접 그 일을 만들게 될 수도 있다. 그 회사에서 일하려고 태어난 것도 아닌데, 하나의 회사를 위해 목숨까지 걸기에는 우리 인생이 너무 아깝다. 일이 아무리 중요해도, 사람 목숨보다 중요하지는 않다.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회사도 나를 선택하는 거지만, 나도 회사를 선택하는 것이란 단순한 사실을.
나와 잘 맞는 환경을 찾아가는 과정은 내게 어울리는 옷을 찾아가는 과정과 닮아있다. 잘 맞는 옷은 입었을 때 편안하고 자신감이 생긴다. 그에 반해 맞지 않는 옷은 어딘가 불편하고 계속 신경 쓰인다. 지금 마음이 불편하고 힘들다면, 나와 맞지 않는 환경에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내가 문제가 아니라 내게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10년간 6개의 회사를 다니며 다양한 리더십, 협업 방식, 조직문화를 겪었다. 뉴욕과 베를린 회사, 국내의 여러 에이전시와 스타트업에서 일하면서 다양한 일의 방식을 경험했다. 지금은 넓은 스펙트럼 안에서 별로였던 경험을 거르고, 좋았던 경험을 조합해 나만의 방식을 만들어 일하고 있다. 프리랜서로 일한 지 3년째. 다양한 클라이언트와 작업자들을 겪으며 내가 가장 좋은 에너지와 시너지를 내는 작업 환경도 더 깊이 알아가고 있다.
모든 고민은 '내가 나로 존재할 수 없을 때' 시작된다. 내가 안전하다고 느껴지지 않는 환경, 부자연스럽게 나를 꾸며야 하는 환경이라면 타인의 의견을 확인할 필요 없이 스스로의 직감을 믿어줬으면 좋겠다. 원하는 게 무엇인지 잘 모르겠을 때도, 원하지 않는 것은 비교적 쉽게 알 수 있다. ‘이건 아니다'라는 감정이 큰 힌트다. 그 순간마다 나는 먼저 브레이크를 걸었다.
회사에는 일에 집중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정치를 하는 사람들,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 눈치를 보는 사람들, 월급만 주면 최대한 편하게 시간을 때우다가 퇴근하고 싶은 사람들이 섞여 있었다. 일에 욕심이 많은 나는 더 잘하고 싶어서 개선할 점을 이야기했다가 찍힌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회사를 애정하는 마음이 컸기 때문에 '이건 아니다' 싶을 때는 의견을 냈다. 나를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회사의 내일을 걱정하는 마음과 동료들을 위해서 용기를 낼 때가 더 많았다.
그래서인지 나는 서러운 경험도 많다. 즐겁게 일한 경험이 훨씬 더 많지만. 좋은 것을 더 잘 기억하고, 안 좋은 건 잘 잊어버려서 잘 이야기하지 않았을 뿐이다. 사회 초년생 때 대표와 직속으로 일한다는 이유로 괜한 미움을 사서 상사로부터 투명 인간 취급을 당한 적도 있다. 누군가의 폭언에 자책하고 울면서 일한 적도 있고, “어디서 여자가 감히”라는 시대착오적인 말을 하는 직원과 싸우며 일한 적도 있다.
멘탈이 강하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 편이다. 웃프게도 내가 의도치 않은 강심장이 된 것은 여러 사람을 겪어봤기 때문이다. 개선사항이 보이면 관성에 반해 부딪혔기 때문이다. 이 사람 저 사람 겪어보면서 나 자신을 지키는 방법을 배웠다. 누군가 자기 자신이 되려 한다는 이유로 끌어내리려는 사람들을 보면, 이제는 건조하고 논리 정연하게 이런 입장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차분하고 당당하게 나의 할 일을 하며 대처한다. 하지만 이제 막 2~3년 차였던 시절에는 '일이란 원래 이런 것인지' 헷갈렸고, 좋은 선택지를 비교할 대상이 부족했다. 사람들과도 잘 지내고, 일도 잘하고 싶었던 내게 어떤 말들은 나의 하루를 흔들어놓기에 충분했다. 사회 초년생 정혜윤은 많이 깨졌고, 많이 울었다.
누군가 정답이라고 생각한다고 그 답이 내게도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다. 내가 불편한 감정을 느낀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고, 그 직감은 때로는 이유를 잘 모르겠을 때도 더 먼 미래까지도 도움을 줄 수 있는 촉이 바탕이 될 수도 있다. 내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나와 맞지 않는 사람들, 나와 맞지 않는 환경에 있어서 더 괴로운 걸 수도 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혹시나 떠오르는 인물(빌런)이 있다면. 그들에게 악당의 역할조차 주지 않았으면 좋겠다. 본래 대결이라는 건 수준이 맞아야 성립되는 것이니까. 그들의 수준에 나 자신을 낮출 필요는 없다. 인생에서 빼버릴 수 있다면 다시는 보지 말자 하고 막장 드라마에서 퇴장하는 것도 방법이다. 어떤 사람들 앞에서 물러나기를 택하고, 그들을 내 인생에서 빼버린 것은 풍요롭고 건강한 인생을 위한 선택이었다.
어떤 상황 앞에서 소신을 지킬 줄 아는 사람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비슷한 가치를 지켜온 사람들은 결국에는 어떻게 만나게 되어있는 것 같다. '끼리끼리 사이언스'라는 말도 있으니까. 지금 나는 함께 해서 즐거운 사람들과 일하고 있다. 아무리 바빠도 곁에 있는 동료들과 파트너들을 보면 감사하고 힘이 난다. 함께 일하는 것이 아니더라도 기꺼이 내가 시간을 보내고 싶은 사람들과 함께 하고 있다. 넓게 보고 멀리 봐도 작게라도 빛을 더할 수 있는 일들을 하고 싶다. 기왕이면 나 혼자만 잘 사는 게 아니라 함께 즐겁게 일하고 잘 살 수 있는 일들을 도모하고 싶다. 이게 내가 일을 만들어나가는 가장 큰 원동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