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 정리
2019년 2월 작성된 글입니다.
서울살이 4년차, 감사하게도 성인이 된 후부터 두 번의 이사를 하면서 내 공간을 꾸며나간다는 개념을 알게 됐다. 한 번은 자취방에서, 한 번은 아파트 방 한칸에서. 10평되는 자취방에 20년동안 모아 둔 짐을 모두 갖고 올라오니 좁은 원룸이 가득찼다. 짐으로 뒤덮힌 방에서 잠든 첫날 밤은 엄마도 아빠도 없어서 무척이나 조용했고, 또 낯설었다.
하나 둘 비워가던 방은 이제야 비움으로 인한 넉넉해진 마음을 되찾자마자 2년 만기로 떠나게 되었다. 아파트에서 가족과 함께 살게 되면서 나에게는 두가지 선택권이 있었다. 따뜻한 볕이 드는 현관 맞은편의 큰 방과 그늘진 2.5평의 좁은 방.
조건을 내걸었다. 좁은 방을 선택하는 대신,
(1) 자취방에서의 크고 무거운 책상은 버리기
(2) 침대 또한 버리는 것
(3) 내 방에는 나의 물건만 놓는 것
아버지의 허락과 함께 그간 무겁고 커다락 가구와 함께 살던 나는 2.5평의 방 한칸을 주도적으로 꾸미고 비워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1년여의 시간이 흘렀다. 내 방은 이사 온 최근의 모습보다 훨씬 더 비워졌고, 정돈된 느낌이다. 아직도 더 간결하게 살고 싶다. 초등학교 때부터 함게 해온 옷수납장도, 끝내 자취방에서 들고 온 책장도 처분하고 싶지만, 가구를 쉽게 버리는 것은 부모님 입장에서는 힘든 일이라 한수 접고 방에 들였더니 나름의 역할을 해주며 내 삶을 풍성하게 해주는 중이다.
오늘은 4면 중 한켠을 차지하고 있는 책장을 소개하고자 한다.
무엇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는 것
책장을 구성하는 기본 골자이다.
내게 있어서 '무엇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 것'은 내가 이 공간을 온전히 주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책장에는 책만 꽂아야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났다. 한켠에는 책, 한켠에는 화장품박스, 한켠에는 매일 사용하는 소지품을 올려놓으면 완벽한 올인원(all in one) 수납공간이 완성된다.
원래는 책상 위에 올려놓는 책장인데, 책상을 처분하면서 이 책장은 바닥에 내려놓고 사용 중이다. 바닥에 놓으면 총 4층의 책장이 만들어진다. 이 중 1층에는 다이소에서 구매한 바구니 3개로 정리 중이다. (21.01 현재는 수납박스를 포함한 책장 전체를 처분한 상태)
길쭉한 바구니에는 대학 전공서적과 프린트물 중 내 관심분야에 해당되는 지류만 정리해서 보관해놓은 통이다. 숱한 교양 수업을 들으면 매 학기가 끝나고 난 뒤 수업자료가 잔뜩 남아버리게 되는데, 이 중 애정을 가진 수업은 그닥 없다. 실제로 필요도도 낮고 말이다. 하지만 청소년심리나 유아심리학 상담, 임상심리처럼 내가 관심있는 수업을 통해 얻은 자료물들은 애착도 많을 뿐더러 실제로 어린 조카들에 대한 행동을 살피고 조언을 구하는데 좋은 지식창고가 된다. 섣불리 버리지 않음에 감사함을 느끼는 빈도가 많아서 보관 중이다.
희망사항은 이 자료물들을 타이핑하여 전자문서화 하는 것이다. 시간이 여유로울 때 하고 싶은데, 과연 그럴 때가 있을까? (21.01 전자문서화 완료한 상태)
옆으로 긴 두개의 바구니에는 내가 가진 온갖 짐들이 들어가있다. 캘리그라피나 드로잉용 도구들이나 와콤타블렛, 아직 안쓰는 화장품이나 편지지, 전자기기의 부속품이나 가끔 꺼내 쓰는 고데기 그런것들 말이다. 아래에 있는 바구니에는 비교적 꺼내쓸 일이 없는 것들을 보관했고, 윗칸에는 자주 꺼내쓰는 화장솜이나 문구류를 보관했다. 뚜껑이 약하기 때문에 물건이 조금이라도 뒤죽박죽이거나 많은 물건이 들어가면 붕 떠버리게 된다. 그래서 늘 여유롭게 뚜껑이 닫히도록 물건의 양을 조절하는 중이다.
2층에는 취업준비중이라 한켠에 그득하게 자리잡고 있는 분철된 수험서적들과 노트북2개, 아이패드 그리고 성경책과 다이어리가 있다. 아마도 취업준비가 끝나면 2층이 텅텅 빌 것 같다. 그날만 기다리면서 살고 있다. 원래는 가장 좋아하는 책들도 몇권 있었지만, 그마저도 더이상 내게 의미가 없어져서 처분하고, 읽고싶어하는 책은 학교도서관을 통해 신청하거나 빌려서 보는 중이다.
3층은 책상 옆에 바로 놓인 위치로 매일같이 뒤적거리는 칸이다. 평소에는 홍대 Object에서 구입한 작은 천포스터로 책장 한켠을 가려놓고 사용한다.
아무래도 원래 목적이 책장이나보니 별다른 가림막이 없어서 쉽게 지저분해보인다는 단점이 있다. 고민하다 마침 사놓고 방치해둔 천포스터로 가려놓으니 일본식 가림막인 '노렌'처럼 보기싫은 부분만 감춰준다.
3층에는 화장품과 시계 그리고 스탠드가 놓여져있다. 가끔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이 있다면 책을 놓는 공간이기도 하다.
살짝 걷어내면 무인양품에서 구매한 바구니로 정리된 모습이 보인다. 오른쪽 바구니에는 데일리로 사용하는 스킨케어와 빗이 왼쪽의 바구니 하단에는 콘텍트렌즈와 헤어롤, 위에는 작은 소품함과 연필꽂이. 그리고 뒤에는 보관용 화장품파우치가 있다. 공교롭게도 바구니 사이에 작은 공간이 생기는데, 여기에 다이소에서 구매한 접이식 거울이 깔끔하게 들어간다.
코스트코에서 구매한 스탠드는 목과 허리부분이 자유롭게 접히며, 케이블과 본체가 분리가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어서 사용하지 않는 낮시간에는 분리 후 책장에 보관하여 책상이 깔끔하게 비워질 수 있도록 했다.
작은 소품함을 열면 립밤과 핸드크림, 눈바디용 줄자, 수분크림용 스패츌라와 인공눈물, 화장솜, 생리컵이 보관되어져있다.
위 사진은 약 2달 전 사진으로 현재는 핸드크림과 분홍색 립밤은 다 사용하거나 나눔을 하여 없어진 상태다. 화장솜은 3-4개 정도씩 이 소품함에 소분해놓는다. 벌크를 비치해 놓으면 이런저런 용도로 사용해서 낭비를 줄이고자 일부러 소분해놓는데 효과가 좋다.
물건을 세로로 세워서 보관하면, 필요할 때마다 뒤적거리는 수고를 덜 수 있다.피부가 닿거나 화장품에 닿기 때문에 먼지에 민감한 제품은 뚜껑이 있는 바구니에 보관하면 걱정을 덜 수 있다.
스킨케어 제품이 들어있는 바구니의 모습이다. 이 사진 역시 2달 전 사진으로 현재는 플라스틱 빗 2개를 처분하고, 녹단나무빗 1개로 줄였으며, 네일케어제품 2개는 위의 작은 소품함으로 자리를 옮겼다.
현재 내가 사용중인 스킨케어 제품들이다.
하다라보고쿠준 스킨로션-연어앰플/청귤세럼-닥터지블레미쉬크림
이 현재 사용 중인 스킨케어 루틴이며, 지금은 스킨로션을 거의 다 써가는 중이라 새로운 제품을 찾는 중이다. 이후에는 점차 스킨케어 라인을 줄여갈 것이다. 스킨과 세럼, 수분크림까지 너무 많다고 느껴져서 제로이드의 순한 보습제 하나만 바르려고 한다. 그 전까지는 열심히 발라서 비워내길!
가끔 화장을 하는 날이면 바이오더마의 클렌징워터로 지워내는 편이고, 외출 시에는 선물받은 지방시의 향수를 뿌려준다. 향수 욕심이 없는 내게 이 향수는 유일하게 가진 향수다. 작년에 부모님께 선물받은 제품으로 과하지 않고, 달콤하지 않은 향이다. 약간의 중성적인 향이지만, 사람을 이끄는 향인 것 같다.
커피집 사장님도, 수업을 같이 듣는 동기도, 오랜만에 집에 들린 언니도 물어볼 만큼 기분좋은 향기. 나는 여러가지 향을 내는 팔색조같은 사람이기보다는 한가지 향을 우직하게 내는, 그래서 그 향이 내 시그니처가 되길 바라는 사람으로서 아직 많이 남은 이 향수를 다 써도 아마 고민없이 같은 향수를 구매할 것 같다.
화장품 바구니 한켠에 놓인 파우치는 오랜 친구에게 고등학생 때 선물로 받은 캐스키든스 파우치다. 천에 코팅이 된 재질로 탄탄해서 오랫동안 사용하고 있다.
파우치 속에는 매일 사용하는 데일리 화장품이 들어있다. 매일 화장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끔 화장을 해야할 때면 잔뜩 섞여있는 화장품 파우치를 뒤지는 것이 아니라 이 빨간 파우치 속의 제품들만 꺼내서 순서대로 발라주면 빠르게 화장을 끝마칠 수 있다. 두달 전 파우치 속은 이랬지만, 현재는 힛팬을 이미 드러냈던 섀도우가 바스라지기 시작해서 드디어 비워내고, 보관용파우치에 있던 단품섀도우를 꺼내서 사용하기 시작했다.
작은 소품함 옆에 있던 연필꽂이에는 필기구가 꽂혀있다. 필통 속 제품을 제외하고 내가 가진 필기구의 전부다. 이 중에서도 빨간색 색연필은 저번달에 처분했다.
무인양품에서 구매한 반투명의 필통 속에는 매일같이 사용하는 필기구가 들어있다. 스타빌로의 형광펜과 샤프, 삼색볼펜, 무인양품 잉크펜, 제트스트림 1.0으로 제트스트림 삼색볼펜을 제외하고는 재구매 의사가 없다. 스타빌로 형광펜은 부피가 커서 다음에 구매할 형광펜은 일반 펜 사이즈인 제품으로 선택할 것이며, 2개의 볼펜은 모두 충동구매로 인한 것이라 사용 후 재구매는 하지 않을 것이다.
4층에는 매일 사용하는 물품을 보관하는 바구니가 놓여져있다. 위 바구니는 뚜껑이 없는 불투명한 다이소 바구니인데, 이번 달에 가족들과 주방 수납정리를 하면서 주방살림으로 보냈으며, 현재는 다이소의 2천원 짜리 뚜껑이 있는 투명한 직육면체 바구니에 들어가있다.
4층의 소지품 바구니에는 작은 우산, 안경집, 메모패드, 지갑, 2개의 보조배터리, 이어폰과 충전케이블이 들어가있는 파우치들과 운동용 헤어밴드와 마스킹테이프가 들어간 명함케이스가 들어있다.
바쁘게 외출할 때는 고민없이 이 바구니를 들여다보며 필요한 물건을 빠르게 챙겨간다. 예전에는 가끔씩 지갑을 집에 놓고와 곤혹스러울 때가 있거나 보조배터리를 놓고와서 충전을 하지 못한다는 불안감에 휩싸일 때가 있었는데, 이렇게 정리를 해놓고 외출하기 전에 한번씩 들여다보는 습관을 갖고 나니 그런 당황스러운 상황들이 많이 줄어들었다.
물론 집에 돌아왔을 때는 다시 가방 속 물건들을 모두 꺼내어 제자리에 놓는 것 또한 습관으로 연습해야 한다. 며칠 동안 가방 속에 물건이 있어 뒤늦게 꺼내는 것은 잘 정리해놓은 모든 것이 다시 어지럽게 뒤섞이는 시발점이 될 수 있다. 집에 왔을 때 당연히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눕고 싶지만, 조금 귀찮아도 옷은 제자리에 걸고, 생활복으로 환복 후 가방 속 소품을 정리하고 가방까지 서랍장에 보관하고 나면 훨씬 더 쾌적하게 집에서 쉴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지도 못했다. 내가 가진 모든 물건이 이 4층의 책장 속에 '여유롭게'들어가서 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1톤 트럭에 간신히 담을 만큼의 어마무시한 양의 짐을 소유하며 살았다. 다시 1톤 트럭에 짐을 싸서 아파트로 이사를 올 때는 생각보다 여유롭게 물건이 담겼다. 이제 다시 이사를 갈 어느날에는 몇개의 의류박스 그리고 캐리어 하나와 백팩하나만으로도 가뿐히 이사를 갈 수 있는 그런 미니멀리스트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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