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글자에 담긴 시대의 철학
4월 1일 오전 11시 41분, 일본 열도를 떠들썩하게 한 이벤트가 있었다.
생전 양위를 발표한 아키히토 덴노의 뒤를 이어 5월 1일에 즉위 예정인 새 덴노의 연호 발표가 그것.
11시가 조금 지나 전국의 언론사가 새 연호가 "令和(레이와)"라는 속보를 타전했고, 도쿄, 오오사카, 교토 등의 대도시에서는 호외가 뿌려졌다.
일본의 고대가요집 "만요슈(万葉集)" 제 5권 중 "매화의 노래" 서문에서 따온 두 글자의 조합으로 만들어졌으며,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기자 회견에서 "귀족뿐 아니라 방인부터 농민까지, 폭넓은 계층의 사람들이 즐겨 읊은 노래들이 수록된, 일본의 풍부한 문화와 오랜 전통을 상징하는 국서(国書)"라며 만요슈의 매력을 강조하기도 했다.
현 아키히토 덴노의 연호인 "平成(헤이세이)"에 이르기까지 역대 연호는 모두 중국 문학에서 그 기원을 두고 있으므로, 최초로 일본 문학에서 유래한 연호라는 점도 주목할 만 하다. 다만 정작 "令和"의 두 글자를 딴 서문은 중국의 명문을 근거로 하고 있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
코지마 츠요시 도쿄대 교수(중국사)에 따르면, 서기 730년 정월, 지금의 후쿠오카 현에 위치한 다자이후(大宰府) 장관 오오토모노타비토(大伴旅人)의 저택에서 열린 연회에서 "떨어진 매화"를 주제로 총 32수의 노래가 읊어졌다고 한다. 이 <매화의 노래> 서문에 등장하는 初春の令月, 気淑く風和ぐ라는 표현에서 한 글자씩을 가져왔다. 이 서문은 중국 동진(東晋)의 유명한 문필가 황희지의 <난정서(蘭亭序)>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상쾌한 바람이 불어 잔잔하고도 포근한 기분이 된다는 뜻의 "혜풍화창(恵風和暢)"과 겹친다는 것이 코지마 교수의 설명.
"중국이 아닌 일본의 고전에서 기원한 연호"를 강조한 일본 정부의 입장을 생각하면 역설적으로, "일본의 전통은 결국 어떻게 해도 중국 대륙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점을 실증했다고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初春の令月(이른 봄의 영월)은 음력 2월을 의미하지만, "무엇을 해도 다 잘되는 달, 경사스러운 달" 즉 가진영월(嘉辰令月)의 뜻도 있다.
和ぐ 는 "やはらぐ (야하라구)"라고 읽는데, 이는 "부드럽다"는 뜻의 "柔らかい(야와라카이)"와 뿌리가 같으며, "바람이 그치고 파도가 잔잔해지다, 풍파가 가라앉다" "마음이 평온해지다"의 의미.
또한 추운 겨울에 피는 매화를 노래한 시가 출처라는 점도, 지금은 어려워도 열심히 노력하면 반드시 좋은 일이 있다는 희망을 담은 연호라는 것이 일본 국문학자들의 대체적인 견해다.
(물론 연호 선정에 일본 황실은 일절 관여하지 않고, 국문학자 등이 추천하는 후보군에서 내각이 최종 결정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국가주의를 표방하는 우파 아베 정권의 기치를 들어주는 연호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아사히신문에서 분석한 결과 和는 이번을 포함하면 벌써 20번째로 연호에 등장하고 있지만, 令는 무려 처음으로 쓰인 한자라고. 참고로 가장 많이 쓰인 한자는 총 29회를 기록한 永.
한편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이 발표한 새 연호는 서예가 모즈미 오사미(茂住修身)의 작품으로 밝혀졌는데, 令자의 마지막 획이 너무 짧아 今자와 유사하게 보인다는 지적이 많았다.
이에 대해 문헌학자 야마구치 요지(山口謠司)는 "令" 자를 쓰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설명했다.
명령(命令)의 의미로 쓸 때에는 짧게, 영양(令嬢)에서의 쓰임과 같이 "아름답다, 좋다"의 뜻으로 쓰일 때에는 밑으로 쭉 내려긋는 것이 올바른 방식이므로, 이번 경우 후자가 바람직했다는 의견.
(아래와 같이 폰트에 따라 다르게 보이기도 한다.)
새 연호가 발표된 1일부터 수일간 일본은 "레이와 피버(Fever)"라 불릴만한 흥분의 도가니였는데, 이는 덴노의 사망으로 인해 연호가 바뀌는 일반적인 경우와는 달리 생전 양위의 형태였던 까닭에 딱히 조심스러운 분위기도 아니었고, "잃어버린 20년" 등 버블 경제 붕괴와 각종 사건사고, 사회 양극화 등으로 여러모로 어두웠던 헤이세이 시대가 막을 내리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다는 희망과 기대감을 반영했다는 분석이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나는 새 연호 발표 호외를 받았다. 4월 1일 일본 여행 중이었는데, 교토의 가장 번화가인 시조 가와라마치를 지나다가 누군가가 손에 쥐어주는 전단지(?)를 무심코 받아 보니 아사히 신문의 호외였던 것.
인터넷과 모바일의 시대, 거리에서 나누어주는 종이신문의 호외를 받는 것도 신선한 경험이었지만, 4면짜리 호외에 실린 2개의 광고가 1면은 야후재팬, 4면은 넷플릭스의 전면 광고라는 것도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 (이 호외판은 이미 당일부터 일본의 중고거래 사이트인 메르카리에서 게재되는 족족 품절되는 등 폭발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ㅎㅎ) 심지어 불과 2시간이 채 못된 낮 1시 경부터는 도쿄의 신바시에서 "레이와 코카콜라"를 무료 배포하기도 했다.
과거 일본은 연호가 바뀔 때마다 구 연호 마지막해이자 신 연호 첫해에 발행된 우표, 동전 등등이 수집가들 사이에서 높은 인기를 끌었는데, 이미 아사히맥주의 한정판 수퍼드라이가 49만 케이스 수주를 기록하는 등, 2019년 일본의 레이와 마케팅은 이제 막 시작된 듯 하다.
<참고자료 및 사진 출처 - 알파벳순>
https://www.asahi.com/articles/ASM4154Z4M41UTFK00Z.html
https://www.asahi.com/articles/photo/AS20190405003772.html
https://www.iwanami.co.jp/news/n29282.html
https://www.j-wave.co.jp/blog/news/2019/04/42-1.html
https://www.jiji.com/jc/article?k=2019040100680&g=soc
https://www.jiji.com/jc/p?id=20190401195850-0031053699
http://news.livedoor.com/article/detail/16249831/
http://news.livedoor.com/article/detail/16249904/
https://rocketnews24.com/2019/04/01/1192103/
https://www.ssnp.co.jp/news/liquor/2019/04/2019-0402-1602-1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