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저 슬퍼요.”
종례를 하려고 교실에 들어왔을 때, 교탁 바로 앞자리인 혜영이가 내게 말했다.
“응? 무슨 일이야?”
“재현이랑 팔씨름을 했는데 졌어요.”
“으응?”
재현이는 우리 반 남학생이다. 중학교 2학년 여학생은 남학생에게 팔씨름을 졌다고 슬퍼할 수도 있구나. 내 머릿속 편견이 쨍그랑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혜영이가 힘이 엄청 센가 보네. 헬스하니?”
“아니요.”
말 끝에 배시시 웃는데, 얼굴이나 목소리에서 아쉬워하는 티가 계속 난다.
“너 나랑 팔씨름 해볼래?”
혜영이의 괴력이 궁금해서 나는 내 무덤을 팠다. 설마, 어른인 내가 지겠어?
“오, 좋아요!”
내 제안을 덥석 받아들인 혜영이는 단숨에 교탁으로 나와서 손을 내밀었다. 이렇게 적극적인 아이였나…? 얼떨결에 손을 맞잡았는데, 단단함이 느껴진다. 쉽지 않겠는데.
“자, 시-작!”
손목에 힘이 꽈악 들어갔다. 서로의 몸이 반대편으로 한껏 틀어졌다. 체중을 좀 더 실어서 죽으라고 버티면 이길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선생님한테 절대로 지지 않으리라는 아주 강력한 의지가 혜영이의 손바닥에서 느껴졌다. 얼굴에 피가 쏠렸다. 열이 올랐다. 제3의 눈이 달린 것처럼, 나는 내 얼굴이 점점 더 빨개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게 만화라면 내 머리 위로 땀방울 군단이 지나가고 뜨거운 김이 펄펄 솟고 있을 것이었다.
“으아… 못 하겠다.”
내 손등이 매가리 없이 스르르 내려가 바닥에 닿았다. 15살 청소년의 힘과 패기에 지고 만 것이다. 혜영이는 언제 아쉬워했냐는 듯이 선생님을 이긴 것에 즐거워하며 자리로 돌아갔다.
“내 얼굴 빨갛지?!”
아이들은 내 얼굴을 보고 웃을 뿐 다들 대답을 하지 않았다. 손목이 저렸다. 과장 한 스푼 보태서 더 오래 버티려고 들었다간 뼈가 살짝 부러졌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 혜영이 대단하다. 엄청 세다!”
나는 연신 혜영이의 힘에 감탄하며 종례를 마쳤다. 별 내용은 없었다. 이번 주도 수고 많았고, 다음 주는 화요일에 보자는, 기분 좋은 말.
아이들이 하나 둘 교실에서 빠져나가고, 이제 청소 지도를 하려는데, 혜영이가 교실 앞쪽 책상에서 누군가와 손을 또 맞잡고 있다. 그 상대는 우리 반 꾸러기 남학생 승원이다.
그냥 못 본 척 지나치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나는 그 흥미로운 대결에 은근슬쩍 끼어들어 보기로 했다. 두 아이가 꽉 맞잡은 손 위에 내 손을 얹고 어설프게 심판 흉내를 냈다.
“어허, 아직 힘주면 안 되지. 자, 준비, 시-작!”
두 아이가 일제히 힘을 주었다. 주변에 구경하는 아이들도 각자 응원을 하고 난리가 났다.
“끄으아아아아악!!!”
승원이의 아랫배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기합 소리가 교실에 울려 퍼졌다. 그런데 혜영이의 손은 어디 고정이라도 된 듯이 꿈쩍도 않는다. 혜영이의 얼굴에 알 수 없는 미소가 번진다. 반면 승원이의 얼굴에는 여유가 없다.
“너 설마 지는 거 아니지?”
옆에서 구경하던 아이들의 도발에 승원이가 다시 한번 이를 앙 다물고 힘을 꽉 줘본다.
“끄으으으…”
그래도 혜영이는 끄떡없다. 승원이의 기세가 살짝 시들어들던 그때, 손이 넘어갔다. 혜영이의 승리다.
“와, 혜영이 엄청 나! 힘 진짜 세다!”
나는 혹여나 승원이가 민망할까 봐 괜히 더 오버하며 혜영이의 힘이 엄청나다고 연신 감탄을 했다. 그러나 승원이는 그런 것에 기죽는 아이가 아니었다. 승리의 기쁨을 안고 자리로 돌아가는 혜영이 뒤로, 승원이가 당차게 한 마디 던졌다.
“야, 솔직히 내가 봐준 거 알지?”
혜영이는 대답 없이 또 씨익 웃는다. 옆에서 듣고 있던 아이들도 같이 웃음이 터졌다.
“그럼 그럼, 알지. 알고 말고!”
나는 혜영이 대신 열심히 대답을 해주었다.
-2024.05.03. (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