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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초롱 Dec 25. 2023

자연이 깨우고 재워주는 세계

 르완다의 해는 반려동물처럼 일찍 일어나 얼굴을 간지럽히고 저녁 늦도록 곁을 떠나지 않는다. 해가 눈을 뜨면 새를 가장 먼저 깨운다. 새가 졸린 몸을 털며 나뭇가지를 흔들면 나무가 녹빛을 퍼트리며 아침이 밝았음을 알린다. 저 멀리 낮게 기어 다니던 안개가 빛을 피하며 유령처럼 사라지고, 은색 골함석지붕이 쨍한 빛을 반사시켜 방 안으로 들여보내면 사람들도 하나둘씩 눈을 뜨기 시작한다. 언덕 사이에 숨은 작은 마을부터 부지런함이 퍼져나가고, 온 동네 아이들이 등교를 마치면 길가의 작은 풀꽃부터 멀리 있는 카리심비* 의 흰 눈까지 선명하게 보이는 정오가 된다. 사람들은 지름길을 내지 않고 자연과 짐승이 먼저 걸어간 시간을 따라 천천히 걷는다. 어제 밟은 길을 다시 밟으며 오솔길을 뚜렷하게 다진다. 다져진 오솔길은 멀리서 보면 노란 격자무늬의 바둑판처럼 보인다. 줄 사이사이에 빼곡하게 박힌 바나나 나무들은 별 무리처럼 빛이 난다. 곤충과 새들이 바람을 유영하고 개미가 실개천 흐르듯 줄지어 간다. 


 지저귐이 가장 활발한 시간이 이른 아침이라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라는 속담이 생겼지만 실제로 작은 새들의 식사시간은 해 질 무렵의 오후다. 작은 새들은 하룻밤 새 체중이 10%나 줄기 때문에 부지런히 배를 채워야 한다. 하지만 몸이 무거울수록 느려지고 둔해져 천적들에게 잡힐 위험이 크기 때문에 해와 함께 눈은 뜨되 종일 주린 배를 안고 날아다닌다. 오전 내내 질 좋은 모이의 위치를 정찰해 놓았다가 포식자들의 배가 운수 나쁜 누군가의 피와 살로 채워졌을 때쯤 기억해 둔 곳으로 찾아가 식사를 한다. 반나절 굶는 작은 새들을 동정한다면 르완다가 포식자들의 낙원처럼 비칠 수 있다. 하지만 작은 새만큼 포식자들 간의 치열한 경쟁이나 매일 유명을 달리하는 꽃과 열매의 연약함을 생각한다면 반나절의 배고픔은 못 견딜 일도 아니다. 


 자연의 생명력에 한바탕 정신을 뺏기고 나면 어느새 눈이 감기는 오후가 된다. 서늘한 곳을 좋아하는 도마뱀들은 바위 밑으로 들어가거나 실내로 슬며시 들어오고, 도마뱀만큼이나 서늘함을 좋아하는 사람들 역시 잠시 오솔길가에, 나무 밑동에, 벽돌에 기대어 눕는다. 날파리들만이 윙윙거리는 르완다의 한낮은 여유로움이 고조되는 시간이다. 시장통의 여전한 시끌벅적함은 마치 먼 곳에서 들려오는 자장가처럼 희미하게 울려 잠을 재촉한다. 쏟아지는 햇살과 자연의 리듬감이 감미롭다. 자연의 모든 것들이 어제와 같은 자리에서 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에 감사하다. 1년 내내 선선한 바람과 따뜻한 햇살 덕분인지 현지인들은 늘 여유롭다. 르완다에서 조급한 것은 짧고 굵게 비를 퍼붓고 사라지는 구름뿐이다. 주변 환경에 따라 색을 바꾸는 카멜레온처럼, 사람들이 흙바닥과 둔 턱, 잔디밭 곳곳에 누워 있어 모퉁이를 돌다 깜짝 놀랄 때가 많다. 이 땅에서는 어디든 머리를 대면 베개가, 누우면 침대가, 앉으면 의자가, 볼일을 보면 변소가 된다. 골목마다 굽은 길은 모든 집을 향해 열려있고, 언덕마다 옹기종기 모인 집들은 서로의 정원에 그늘을 드리우지 않는다. 작은 새들이 창공의 매를 부러워하지 않는 것처럼 자신들이 가진 것에 대해 만족해한다. 사람들은 쓸데없는 규칙이 사회를 지배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고 자연에게 많은 것을 기댄다. 


 바위의 왼편을 비추던 태양이 맹렬함을 삭이고 오른편으로 이동하면 저녁이 찾아온다. 오늘의 노동을 끝내고 잔디밭에 앉아 쉬던 남자들, 내일 아침까지 온 가족이 쓸 물이 담긴 석유통을 들고 가는 어린아이들, 아기와 건초더미를 업은 여자들이 집으로 향한다. 귀가 의사가 없는 소 떼 와 염소 떼도 한 방향으로 흐른다. 시야가 어두워지면 후각이 살아난다. 도처에서 폐비닐과 쓰레기로 숯을 피우는 냄새가 타오르고, 곧바로 맛있는 냄새가 타는 냄새를 덮는다. 이제는 안개가 아니라 밥 짓는 연기가 동네 위를 나지막이 떠다닌다. 태양이 흰색에서 노란색, 주황색, 다홍색, 심홍색으로 산란한다. 구름을 뚫던 빛이 약해지면서 자연의 색도 옅어진다. 다행히 자연은 초록빛이 빠져도 생기를 잃지 않는다. 하나의 검은 덩어리가 되어서도 생명력은 유유히 헤엄친다. 곤충부터 파충류, 식물과 포유류가 한데 섞여 녹아들었다. 암흑이 된 대지를 대신해 밤하늘이 밝아진다.  별들은 어둠보다 넓게 펼쳐져 숨을 쉬듯 반짝이고, 달은 누구 하나도 빼놓지 않겠다는 듯 공평하게 빛을 뿌려 어둠에 젖은 대지를 아늑하게 만든다. 실내의 불마저 꺼지고 하늘과 땅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깊은 밤이 되면, 사람도 자연의 일부가 된다. 어둠 속에서 일렁거리던 나무의 실루엣마저 사라지고, 이전에는 들리지 않던 소리들이 허공에서 뒤척인다. 자연의 음성은 갓난아기를 재운 뒤 작게 소곤대는 부모의 목소리 같다. 우리는 그 소리를 놓치지 않으려 귀 기울여 보지만 이내 잠들어 버린다. 


*카리심비(Karisimbi): 해발 4,507m 르완다에서 가장 높은 산 



B329, 2019, 박초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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