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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냥이 May 01. 2024

이직할 때가 없는 그대에게

아내는 요즘 바빴다. 회사에서는 과장 승진을 앞두고 있었고 이런 그녀에게 팀장은 새로운 프로젝트를 맡겼다. 이번 일은 그녀가 맡아본 일 중 가장 컸다. 이렇게 사안이 큰 만큼 업무량도 많았고 다른 이해자 관계자들과 협의할 일도 많았다. 그러면서 담당자인 그녀는 직속 상사인 팀장뿐 아니라 소장, 본부장까지 직접 보고하며 일을 진행해야 했다.


한 편 회사 밖으로도 분주했다. 승진 가점을 위해서 도시계획기사를 신청해 필기를 합격하고 실기시험을 앞두고 있었다. 이를 위해 그녀는 청량리역 근처에 있는 학원을 끊었고 주말마다 두 시간이 넘게 걸리는 청량리행 열차에 아침부터 몸을 실었다.

 

이 두 가지를 모두 해내기 위해 그녀는 집에 제시간에 들어가는 것을 포기했다. 회사 일을 마친 후에도 근처 독서실로 가서 저녁 10시까지 기사 실기 공부를 했다. 집에 오면 열한 시가 넘었다. 회사에서 오자마자 침대에 화장도 지우지 않고 곪아 떨어지는 그녀를 목격하는 날이 잦았다. 


내 아내지만 참 열심히 산다 싶었다. 걱정이 됐다. 단지 바빠 보여서만은 아니었다. 남편이자 가까이 서 그녀를 살피는 동반자로서 그녀가 이것을 진정으로 원하는지 좀처럼 확신이 가지 않았다. 마치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일이 이렇게 벌려져 있어서 어찌 됐건 수습해야 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렇게 달리고 있는 그녀에게 힘 빠지는 소리는 할 순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그녀가 다 해내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는 않았다. 내가 십 년 동안 본 그녀는 늘 그랬다. 그녀는 어떻게든 해낸다. 머리가 좋아서 아니다. 많이 움직여서다. 그녀는 고민은 적게 행동은 많이 한다. 그래서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결과물을 내곤 했다. 정 나랑 반대 스타일이다. 


나였다면 진작에 때려치웠을 일들을 그녀는 꿋꿋하게 해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다음 주면 끝날 예정이었다. 이 날만 바라보며 그녀는 이 악물고 버텨왔다. 나에게도 그때가 되면 좀 쉬고 읽고 싶은 책도 읽고 하고 싶은 공부만 할 거라며 선언하며 다녔다. 


그런데 내가 야간 출근하던 날 저녁 통화에서 그녀는 울먹였다. 말로는 괜찮다고 말했지만 그렇지 않았던 거다.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쌓였던 스트레스가 오늘 일로 터져버렸다. 그러면서 HJ는 일은 괜찮은데 인간관계가 힘들다고 말하고 이로 인한 고충을 토해냈다. 


원하는 게 많다고 불평하는 이해 관계자, 결정해야 할 순간에 뒤로 빠지는 팀장, 열심히 회의해서 낸 결론을 그때그때 입맛에 바꾸라는 소장, 거기다 팀장과 소장의 의견이 달라 둘 다 입맛을 맞춰야 하는 문제들까지 산적해 있었다.


위 사람이 한 간단한 말에 아랫사람은 죽을힘을 다해 뛰어야 한다는 걸 그들은 모르는 것일까? 분명 그들도 아랫 직급에서 올라왔을 텐데 말이다. 웹툰 <송곳>에서 서는 데가 바뀌면 풍경도 달라진다는 대사가 떠오른다. 내 옆 자리에 있던 대리님이 모든 직장 생활의 괴로움은 결정권자와 실무자가 다르다 데서 온다는 말도 떠오른다. 


실무자인 그녀는 이런 일들로 몸과 마음이 갈려나가고 있었다. 프로젝트 마감이 다가올수록 그녀에게 수많은 압박이 쏟아졌다. 그러다 프로젝트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 본부장은 K차장을 이 프로젝트에 추가로 꽂아 넣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 사람은 본부장과 친밀하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이런 갑작스러운 인사에 의문을 제기한 그녀에게 본부장은 “HJ 씨는 이런 일 안 해 봤잖아 혼자서 맡기엔 너무 과해”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녀 말마 따라 얼탱이가 터지는 일이었다. 


이럴 거면 처음부터 자기를 보조로 주면 되지 프로젝트가 거의 마무리에 와가는 시점에 이런 인사라니. 그러다 나중에는 본부장으로부터 그녀가 승진 때문에 욕심을 부린다는 오해까지 받았다. 그녀는 이런 상황에 대해 점점 더 회의감에 빠졌다.


HJ는 억울해했다. 하고 싶지도 않은 일을 억지로 해나가는 것도 힘든데 여기다 오해까지 받다니. 그녀의 직속상사가 이런 상황을 알고 본부장과 오해를 풀었으니 그녀에게 다시 한번 더 가서 이런 오해를 풀라고 전달했다.      


그녀는 그 사람이 오해를 해놓고 또 푸는 것도 자기가 가서 풀어줘야 하는 것이냐며 나에게 항변했다. 맞는 말이었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은 쉽게 진급하는 것 같은데 자기는 왜 이런 거냐며 푸념했다. 그러면서 이런 상황에 지쳐 이직을 할 곳이 있나 찾아봤는데, 한 곳도 없는 현실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름 회사에서 열심히 오 년 넘게 일해왔는데, 이직할 때가 한 곳도 없다는 현실에 그녀는 펑펑 울었다. 회사에서 그동안 했던 노력들이 눈 녹듯이 사라지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이 냉정한 현실에 그녀에게 뭐라 위로한 말을 찾지 못했다. 

   

나도 똑같이 느꼈기 대문이다. 일을 하면 할수록 내가 이 회사에서 하는 일을 과연 다른 회사에도 써먹을 수 있을까란 고민을 많이 한다. 그래서 요즘은 이직을 활발하게 할 수 있는 직종들이 부럽다. 본인의 기술을 사회에서도 통용이 되어 어디를 가든 제 몫을 다할 수 있는 직업들 말이다. 이런 내 노하우들이 누적되는 일들을 직업으로 선택했어야 했나란 생각 요즘 많이 들던 참이었다. 


그러나 이런 생각에 갑자기 직장을 때려치울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한 가지 일을 열심히 하는 것만으로는 앞으로 생존을 보장할 수 없는 현대사회가 너무 치열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우리는 지금 이런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을. 내 일도 열심히 하면서 나머지 시간에 내 기질에 맞는 이런 노하우들이 축적되는 일들을 시도해 보는 수밖에 없어 보인다.



PS. 아내가 도시계획실기 시험은 무사히 치렀다. 프로젝트는 내일 끝날 예정이다. 홀가분한 표정으로 웃으며 그녀를 도냥이는 기다린다.



※ 이 글에 나오는 인물의 이름이나 직위들은 작가에 의하여 모두 임의 변경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그림 출처 : Ai Copi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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