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모임에서 사랑받는 책의 조건
나는 아내 외에는 사람을 자주 만나지 않는다. 외로움을 크게 느끼는 편도 아니고,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큰 즐거움을 느낀 적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도 규칙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모임이 있다. 바로 독서모임이다. 현재 두 개의 독서모임에 참여 중인데, 하나는 5년이 넘었고 다른 하나는 친구들끼리 하는 모임으로 이제 3년 가까이 되어간다.
이렇게 장기간 모임을 하다 보면 '발제'라는 걸 해야 할 순간이 찾아온다. 네이버 국어사전에 발제를 검색하면 다음과 같은 정의가 나온다.
토론회나 연구회 따위에서 어떤 주제를 맡아 조사하고 발표함
챗GPT에게 물어보면 발제란 글자 그대로 “주제를 내어 놓는다(發題)”는 뜻이란다. 즉, 모임이나 토론에서 논의의 중심이 되는 주제를 제시하고, 참가자들이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도록 문제를 던지는 행위를 말한다.
모두 같은 책을 읽어도 느끼는 점은 다르다. 그래서 한 사람이 자기만의 시선으로 책을 큐레이팅하는 것이 발제의 핵심이다. 이렇게 말하면 거창하게 들릴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실제 우리 모임에서의 발제는 훨씬 간단한 과정을 따른다.
1. 책을 선정한다.
2. 모임 장소를 정한다.
3. 질문지를 만든다.
발제자가 되었다고 쳐보자. 그렇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책을 선정하는 것이다. 이때부터 고민이 시작된다. 어떤 책을 골라야 할까? 벌써 오 년이 넘도록 독서모임을 하고 있지만 책 고르는 일은 여전히 쉽지 않다.
독자로서 책을 읽는 것과 발제자로서 책을 고르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전자의 경우, 내가 좋아하는 책을 고르면 된다. 물론 이것도 쉬운 것은 아니다. 많은 책을 읽어가며 내 취향을 찾아가는 과정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자, 즉 발제자로서의 선택은 더 어렵다.
후자의 경우, 내 취향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취향도 고려해야 한다. 나만 좋아하는 책이 아니라, 모임 구성원 대부분이 어느 정도는 공감할 수 있는 책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내가 경제에 관심이 많다고 해서 특정 투자법이나 성공담 중심의 에세이는 모임 책으로 부적절하다. 이 책을 통해 나눌 이야기가 충분히 있을지도 고민해야 한다.
물론 처음부터 딱 맞는 책을 고르기는 어렵다. 하지만 모임을 계속하다 보면 회원들의 성향을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책을 주제로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기 때문에 사람에 대해 더 잘 이해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아, 이분은 이런 책을 좋아하시겠구나"하는 감이 생긴다. 어떤 책을 읽다가도 "이 책은 그분이 좋아할 것 같은데"하고 느끼기도 한다.
그래서 내 경우에는 고르다 보면 어느 정도 정해진 분야 안에서 책을 선택하게 된다. 그중 가장 '안전빵'은 고전이다. 고전은 짧게는 수십 년, 길게는 수천 년 동안 살아남은 책이다. 수많은 책들 중 시간의 거름망을 통과한 강자들이라 지금까지 읽히는 이유가 있다.
대부분의 고전은 당시의 시대 상황을 뛰어넘어 인간 본질에 대한 통찰이 담겨 있기 때문에, 지금 읽어도 가치를 잃지 않는다. 개그맨 출신이었던 고명환 작가님의 강연이 인기를 끄는 것도 이런 고전의 힘을 잘 활용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개인적으로 모임에서 했던 고전으로는 『데미안』,『멋진 신세계』,『군중심리』,『죄와 벌』 등이 있다.
그다음은 소설이다. 소설의 장점은 회원들이 책을 읽을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우리 모임은 책을 읽는 것을 전제로 하고 만나는 모임이지만, 이 바쁜 현대시대에 모두가 책을 다 읽고 오는 것은 쉽지 않다. 이런 점에서 소설은 접근성이 좋다.
소설가들은 기본적으로 필력이 보장된다. 이야기를 파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독자들이 읽기 쉽게 글을 구성한다. 식품회사의 연구원이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맛있게 먹을까를 연구한다면 소설가들은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글을 맛있게 읽을 수 있을지를 연구한다. 그래서 독서가 수월하고, 등장인물에 대한 이야기나 주요 스토리에서의 선택에 대해 이야기할 거리도 많다. 이런 이유로 소설은 자주 모임 도서로 선정된다.
기억에 남는 소설로는 『채식주의자』,『작별 인사』,『프로젝트 헤일메리』,『스토너』 등이 있다.
다음은 사회 문제를 다루는 책들이다. 최근에는 『시대예보 : 경량문명의 탄생』, 『오픈 엑시트』, 『자살하는 대한민국』 등을 읽었다. 이들 책은 현재 현재 대한민국 사회가 겪는 문제나 앞으로 마주할 가능성이 있는 이슈들을 다룬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주제를 담고 있어 토론이 활발하다. 또 저자들이 해결책을 함께 제시하는 경우가 많아 이를 두고 의견을 나누기에도 적절하다.
반면, 독서모임에서 다루기 어려운 책들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이른바 '벽돌책'이다. 특별히 정해진 페이지수는 없지만, 보통 부록 포함 500페이지가 넘으면 벽돌책이라 부른다.
이런 책들의 문제는 첫째, 모두가 끝까지 읽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실제로 이런 책을 선정하면 몇몇 회원이 멋쩍게 "몇 장까지만 읽었어요..." 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둘째, 책을 다 읽었더라도 후반부쯤 가면 초반 내용을 잊어버리기 쉽다.
지금까지 모임에서 다룬 벽돌책으로는 대니얼 카너먼의 『생각의 관한 생각』, 매슈 워커의 『우리는 왜 잠을 자야 할까』 다섯 가지 주요 물질에 대해 설명한 『물질의 세계』등이 있었다. 독자로서 읽을 때는 좋았지만, 모임에서 다루기에는 위에서 말한 문제들이 커서 자주 선택하기 어렵다. 도전 차원에서 1년에 한두 번 정도가 적절하며, 가능하다면 두 번에 나눠 모임을 갖는 것도 방법이다.
또 하나 어려운 유형은 과학 서적이다. 과학적 사실을 중심으로 하는 책들은 읽는 재미는 있지만, 자유로운 토론으로 이어지긴 어렵다. 대부분 "이런 내용을 새로 알게 되어 신선했어요" 수준에 머물게 된다.
마지막으로 이처럼 어려운 과정을 거쳐 책을 골랐다면 최대한 빠르게 구성원들에게 알려주는 것이 좋다. 어쩌면 이게 가장 중요할지도 모르겠다. 독서 시간을 확보할 수 있도록 최소 2주 전에는 알려야 한다. 도서관에서 대출해 읽는 분도 있고, 모임 전에 한 권을 두 번 넘게 읽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사실 이건 나다).
책을 고르는 과정을 길게 설명했지만, 이게 정답은 아니다. 같은 책이라도 어떤 사람이 발제하느냐에 따라 논의의 깊이가 달라지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발제를 피할 수는 없으니, 부담을 갖기보다는 자신이 해보고 싶은 방식대로 도전해 보는 것이 좋다. 이런저런 시행착오와 조정의 과정도 독서모임의 묘미다.
발제를 할 때마다 느끼는 건, 책을 고르는 일이 결국 사람을 이해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어떤 책을 함께 읽느냐에 따라 모임의 분위기와 대화의 방향이 달라진다. 그래서 책을 고르며 나는 매번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나누게 될까'를 상상한다. 그 과정이 어렵지만, 동시에 가장 즐겁다. 책을 통해 사람을 배우고, 사람을 통해 다시 책을 읽게 된다.
이번 글에서는 책을 선정하는 것까지 이야기했다. 다음 글에서는 모임 장소를 정하는 법에 대해 써보겠다. 모두들 오늘도 즐거운 독서모임 하시길. 혹은 해보시길.
사진출처 : CHAT GPT5